19화
잠시 후.
“야, 이 진상아. 똑바로 안 업힐래? 콱 던져버리는 수가 있어.”
예준은 이를 악물고 수빈을 업은 채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정신 좀 차리라고 멱살을 쥐고 흔들어봐도, 휴대폰 패턴이라도 풀어달라고 뺨을 두드려봐도, 그녀는 물 먹은 솜 마냥 축축 늘어지기만했다.
차라도 밑에 대 놓았으면 좋았을 걸.
언덕 위에서 예준을 기다리던 대리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뛰어내려왔다.
“아이고! 사모님이 많이 되셨나 보네.”
기사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수빈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예준이 몸을 돌리며 그를 저지했다.
“괜찮으니까, 차 문이나 좀 열어주실래요?” 허공에 어정쩡하게 멈춘 손을 무안하게 거둔 대리기사가 알겠다며 얼른 달려가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같이 타실 거죠?”
“제가 왜요.”
“……네?”
황당해하는 대리기사를 세워놓고 예준은 뒷좌석에 수빈을 거의 패대기치듯 내려놓았다.
땀으로 범벅된 셔츠가 기분 나쁘게 몸에 달라붙었다.
넥타이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내리며 뒤를 도는데, 멀뚱히 서있던 기사가 흠칫 놀라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바라보니, 수빈의 블라우스가 바지에서 삐져나와 반쯤 올라가있었다.
뽀얗게 드러난 그녀의 옆구리가 보이자, 예준이 다시 고개를 돌려 대리기사를 빤히 응시했다.
그 무언의 압박이 어찌나싸늘하고 무거운지, 놀란 대리기사가 황급히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예준은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수빈의 몸 위로 툭 내려놓았다.
“하여간 계집애가 칠칠맞긴.”
기절한 듯 잠든 수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더니, 그녀의 몸 위로 제 상체를 내렸다.
그러고는 수빈의 몸을 덮고 있는 제 슈트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녀의 등과 옆구리에 꾹꾹 끼워 넣었다.
“비싼건데, 다 구겨지게 생겼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이 그의 날카로운 턱 선을 타고 흘러 내렸다.
“깨기만 해봐라. 죄다 청구할 테니까. 너는 이제 새 된 거야.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어?” 뺨에 미역처럼 달라붙은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예준이 낮게 으르렁댔다.
보조석에 올라탄 그의 메마른 음성이 차 안을 묵직하게 울렸다.
“출발하죠.”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온 차가 도로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도 호텔행이었다.
* * *
수빈은 현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버려졌匚卜. 예준이 룸에 들어오자마자 수빈을 팽개쳐두고 곧장 욕실로 들어간 탓이 다.
그녀를 업고, 매고, 끌고 오느라 온몸이 땀범벅이었匚卜. 핸드백은 또 왜 이리 무거운지. 벽돌이라도 하나 넣고 다니는 줄 알았다.
솨아아아.
꿉꿉했던 셔츠를 벗어던진 그가 샤워기를 트는 소리가 조용한 룸에 울렸다.
고요히 감겨있던 수빈의 눈이 슬그머니 떠진 건 바로 그때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우를 하는 건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사실 정신을 잃을 만큼 마셨던 건 아닌지라 수빈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긴장해라, 지예준.”
네 녀석의 실체를 오늘 밤 낱낱이 파헤치고 말 테니까
'넌 내가 술 취한 여자 덮치고 책임이나 전가하는 쓰레기로 보이냐?’
예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만약그가 정말 천하의 둘도 없는 개 쓰레기라면 두말 않고 그의 소중이를 걷어찬 뒤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다.
아무리 가짜 결혼이라고 해도 범죄자랑 얼굴 마주 대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수빈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찌뿌듯한 허리를 폈다.
움직이지도 못 하고 내내 기절한 듯 누워있던 지라 삭신이 쑤셨다.
“나쁜 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먹다버린 옥수수처럼 널어놓고, 샤워를 해?”
오늘 나 건드리다 걸리기만 해봐라.
수빈이 허공에 대고 발차기를 했다.
그때.
샤워기 소리가 멈추더니 딸칵문이 열렸다.
으악!
화들짝 놀란 수빈이 아무렇게나 다시 널브러졌다.
카펫을 밟으며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입 안에 가득 고이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수빈의 곁에 멈춰선 예준이 베스가운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 봤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옆으로 돌아눕는 건데 그랬다.
그의 시선이 레이저처럼 얼굴구석구석에 닿는 듯한 느낌 이 었다.
예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왜 뒤집어져있지?”
“깼었나?”
그의 말에 뒤늦게 아차 싶어진 수빈의 눈썹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갑작스런 예준의 등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는데, 처음 누웠던 방향과는 180도 다른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져있던 것이다.
예준이 무릎을 접고 몸을 내렸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야, 너 깬 거 다 알아.' 하면서 딱밤이라도 날리 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예준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그가 곧 그녀의 무릎 뒤와 등 뒤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헉!
순식 간에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 이 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빈을 안아든 예준이 향한 곳은 바로 침대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 아니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그녀의 뺨 위로 톡 하고 떨어져 내렸다.
당혹감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는데, 코끝으로 부드럽게 밀려오는 샴푸 향기가 그녀의 이성을 깨웠다.
언덕 올라올 때는 거칠게 헉헉대더니, 샤워를 하고 좀 살 만했는지, 아니 면 술이 좀 깬 건지 그는 별 무리 없이 수빈을 안고 걸어갔다.
독한 놈.
역시나 취기를 오기로 물리치는 무서운 놈이 확실했다.
잠시 후, 몸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이불 속으로 푹 파묻혀 버 렸다.
악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삼킨 그녀가 속으로 꿍얼거렸다.
나쁜 자식 ! 얌전히 좀 내려놓으면 어디 덧나나!
예준은 수빈을 내려놓은 채 바로 침대를 벗어나 화장대로 향했다.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 니 그가 드라이기를 꺼내들고 젖은 셔츠를 말리기 시작했다.
룸 안에는 드라이기 소음만이 웅웅 울려 퍼졌다.
수빈이 슬쩍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그녀를 등진 채 서있는 예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쪽 손을 허리춤에 대충 얹은 채, 벽에 걸어놓은 셔츠를 말리고 있다.
잠시 후 그는 옷이 어느 정도 말랐다고 생각했는지, 망설임 없이 베스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힉!
그의 몸을 떠 난 가운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지자, 근사한 등 근육이 수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수빈의 눈이 커다래진 채 그대로 멈추었다.
남의 몸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는 없지만, 저렇게 훌륭하고 쫀쫀한 피사체라니.
원수 같은 놈이긴 했지만, 자기 관리 하나는 진짜 철저히 했구나 싶어진다.
예준이 셔츠 단추를 잠그며 몸을 돌렸다. 동시에 수빈의 눈도 다시 꽉 감겼다.
타이를 매고 재킷을 챙겨든 예준이 침대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매트 끝에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녀석은 사람 얼굴 빤히 쳐다보는 게 취미인가보다.
수빈에게 다시 인고의 시간이 닥쳤다. 긴장감에 온몸의 솜털까지 바짝 곤두서던 그때였다.
“신수빈,,
한참이나 수빈을 내려다보던 예준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한 예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준이 손을 뻗었고, 곧 수빈의 뺨 끝에 그의 온기가 닿았다.
수빈은 온몸의 세포가 들고 일어나 날뛰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너 이 새끼, 내가 이럴 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싶어, 벌떡 일어서려는데 예준의 손이 뺨을 꼬집어 당겼다.
찹쌀떡 같던 그녀의 뽀얀 볼살이 주욱 늘어났다.
아
차마소리는 지르지 못했지만,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으읍!”
죽은 건 아니니, 꼬집혔을 때 아픔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뭐, 뭐하는 거야!
수빈이 동요했지만, 예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볼을 잡아 흔들었다.
“넌 나한테 업혀온 걸 다행으로 알아.”
“딴 놈이었으면 사달 나도 진작 났을 테니까.”
예준은 실컷 잡아 흔들던 수빈의 볼을 놓고는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악
수빈은 눈물이 핑 돌았다.
“다 큰 게 술이나 먹고 자빠지고, 잘하는
짓이다. 쯧쯧.”
혀 차는 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쓰러져있는 수빈을 향해 한껏 잔소리를 쏟아놓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곁을 떠났다.
뭐야
멀어져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에 수빈의
눈썹이 실룩였다.
저러고 그냥 가는 거야?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룸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살며시 눈꺼풀을 밀어올린 수빈은 한동안
쥐죽은 듯 누워 눈만 깜박거 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준이 완전히 떠났나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났다.
“아아!”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 이마를 불이 나도록 비벼대는 거였匚卜. 손가락 힘이 얼마나 센지, 아직도 맞은 곳이 불에 댄 듯 후끈거렸다.
수빈은 빨개진 이마를 연신 문지르며 뒤돌아, 예준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오가던 손동작이 서서히 느려졌다.
“진짜 아무 일 없긴 없었나 보네.”
그날 이후, 내내 가슴 속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조금은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생각과 함께 뒤늦게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샤워기 소리오「 이불의 촉감, 핑핑 도는 머릿속.
눈을 가늘게 뜬 그녀의 기억 위로 조각난 기억들이 흐리게 스쳤다.
백 프로 모든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예준의 행동을 보니, 그날도 오늘과 별 다를 바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피식
어쩐지 웃음이 났다.
제가 들이받는 바람에 코피가 터진 걸 대충 휴지로 틀어막고, 토사물이 묻은 옷가지를 빨며 신나게 욕지거 리를 뱉어 냈을 예준의 뒷모습을 떠올리 니
그냥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수빈은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발신자에 뜬 수빈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이게 뭔 상황인가, 사태 파악에 열을 올리고 있을 그의 모습이 선연했다.
또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뭐야, 너.]
'여보세요도 생략한 그가 황당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
[취해서 기절해있던 거 아니었어기
그래, 자식아! 이불 위에 패대기칠 때 감정 실려있던 거 내가 아주 고스란히 느꼈다, 요놈아!
……하고 확 쏘아붙여줄까도 했지만, 한밤중에 개고생을 한 그의 노고를 이쯤에서 그만 치하하기로 한다.
“상견례 말이야.”
불쑥 튀어나온 상견례라는 단어에 예준이 침묵했다.
잠깐의 여운이 흐르고, 작게 웃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 주 씀이 좋겠어.”
[……J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며. 우리 집 먼저 인사 오고 그 다음에 너희 집 인사 가는 걸로 해. 일정은 다시 잡자고.”
취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또박또박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예준은 할 말을 잃은 듯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럼, 수고.”
용건을 모두 전한 그녀가 쿨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하게 이용하고, 이용당해줄 테다.
그놈의 돌싱 프로젝트.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수빈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