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 살벌한 부부-16화 (16/63)
  • 16화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됐어. 버스 타고 갈 거야.”

    “너 지금 몰골 완전 추노야.”

    "뭐가 어째?”

    ……이게 진짜.

    “네가 타고 싶다고 해도, 기사 아저씨가 안

    태워줄 것 같다고.”

    줘 패버리고 싶은데, 그럴 기운도 없었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눈물샘도 같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애꿎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결국 수빈은 또 한 번 예준의 차를 얻어 타야 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흐윽 ”

    문이 닫히는 동시에 꾹 참고 있던 설움이 복받쳤다.

    간신히 소리는 내지 않고 있었으나, 막을 새도 없이 뚝 떨어져 내린 눈물 한 방울 때문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하필 장소가 예준의 차 안이라는 것고匕 이런 모습을 보이는 상대가 예준이라는 게 끔찍하게 싫어서 더 서러웠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로 대충 얼굴을 가리고는 숨죽여 울었다.

    예준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손수건을 내밀었고, 체념하는 심정으로 그걸 받아든 수빈은 떨어지는 코부터 막았다.

    ’……짜증나.'

    패앵!

    예준 모르게 눈물을 훔치려고 일부러 더 세게 코를 푸는 시늉을 했지만, 그는 별 반응 없이 조용히 차만 몰 뿐이었다.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가 빠르게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끄..그고. ”

    -I -I.

    가까스로 누르고 있는 숨을 더 이상 참기가 버겁다고 느껴질 때 쯤, 예준이 손을 뻗어 음악을 틀고는 볼륨을 크게 높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눈물이 터졌다. 엉엉 우는 소리도 함께 말이다.

    고막이 터져나갈 만큼 쩡쩡 울려대는 음악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덕분에 수빈은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허어어엉엉.흑, 흐으으응.”

    정남과 방훈이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짝 하나 맺어주지 못해 안달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맨 처음, 수빈이 독신으로 살겠노라 선전포고를 했을 때였다.

    '엄마.'

    '왜.'

    '나 독신으로 살기로 했어.’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투사처럼 선전포고를 한 그녀를 정 남은 이유도 묻지 않고 등짝을 후려 쳤었다.

    들은 체도 안 하는 정 남이 었지 만 수빈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준비한 레포트라도 발표하듯 독신으로 살 때의 장점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틈만 나면 독신을 외치며 자신의 결심이 확고함을 상기시켰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말없이 듣기만 하던 정남이 어느 날 문득 했던 말이 '실패한 사람처럼 말하지 마. 남자는 다시 만나면 되니까.'였다.

    예상했던 발언이 아니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수빈은 곧장 반박했다.

    '내가 고작 남자랑 헤어졌다고 이러는 거 같아?’

    '어.'

    '아니거든?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실패라고도 생각 안 해. 나는 그냥 혼자가 편해서……:

    '너 예전엔 안 그랬어.’

    반박할 새도 없이 그 말에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차라리 귀신을 속여, 이것아.'

    정남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일갈했다.

    그럴 만도 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그와 이별하기 전까지는 내 꿈은 현모양처를 입에 달고 살았던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외동이라 외롭게 컸으니, 자식은 힘닿는 데까지 낳을 거라고. 빨리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결혼, 결혼, 결혼. 3년 전만 해도 수빈은 그놈의 결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정 남과 방훈도 그런 수빈의 모습을 무척이 나 잘 알기에 더 그랬다.

    '네가 아직 진짜 짝을 못 만나서 그래.’

    정남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너만을 평생 아끼며 행복하게 해줄 인생의 반려자는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거라고.

    그건 수빈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식을 둔 부모로써의 바람이 기도 했다. 딸의 꿈이 망상이 되어버린 걸 쉽게 지켜볼 수 있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3년 전, 방훈의 사고

    그날 수빈의 가족을 덮쳤던 비극은 결국 그녀의 파혼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정남과 방훈이 파혼의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던 터 라, 말 못 할 아픔은 고스란히 수빈의 몫이었다.

    그날 이후 결혼에 대한 환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건 타인에 대한 불신과 공허함뿐이 었다.

    '엄마, 나 연애 안 하니까 너무 편한 거 있지? 결혼 같은 걸 왜 하려고 했나 몰라.’

    정 남이 그랬듯, 수빈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괜찮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물론 속내는 괜찮지 않았고, 정남도 여전히 들은척 한번 안했지만말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로해야 했다.

    그날의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결혼까지 약속했던 건호는 수빈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고, 또한유일한 사랑이었다.

    잊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는 소리 없이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고, 수빈이 마음을 추스른 걸 확인한 예준은 음악을 끄고 라디오를 틀었다.

    잔잔하게 퍼지는 음악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빈이 입을 열었匚卜.

    “아까 다 들었지?”

    들릴 듯 말 듯한 그녀의 물음에 예준은 침묵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 나 시집 못 보내서 안달이야. 그러니 내가 결혼한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다 가짜래. 그냥 돈 갚을 능력이 없어서 빚 대신 팔려가는 거래. 하나뿐인 딸이 끝이 정해져있는 결혼을 한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은 어떤 심정일까?”

    이래도 너랑 내가 같은 입장인 것 같니?

    그녀는 원래 자신이 독신주의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한때는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과거도 있었음을 넌지시 고백했다.

    “내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컸던 사람인데.”

    봇물 터지듯 터져버린 수빈의 하소연을 예준은 싫은 소리 한 번 않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근데 지금 내처지를 봐.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누구 발목에 족쇄 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랑 해.”

    이제껏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던 예준이 툭 던지듯 내놓은 말에 수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

    “상대가 나라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너는 네 손에 족쇄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엔 네가 들고 있는 게 내 족쇄를 풀 열쇠로 보이거든.

    “너한테 진짜 좋은 남편은 못 되어주겠지만, 좋은 사위는 되어볼게.”

    네가 큰 걸 희생해주는 것처럼 나도 못지않게 해줄 거라고.

    운전대를 잡은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에 수빈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너는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냐! 1년 뒤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때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건 단순히 빚이 사라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예준이 차분하게 반박을 시 작했다.

    “우리는 독신으로 살기 위해 기혼자가 되는 거야.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기 위해 결혼을'이용'하는것뿐이라고.”

    인생 저당 잡히기 싫은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니까.

    말을 잃은 수빈의 눈꺼풀이 파릇 떨렸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평생 남자한테 뒤통수 맞을 걱정 없이 엄마 아빠랑 오래도록, 원한다면 평생 행복하게.

    내 인생이니까. 내가 뜻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거라고

    “약속한 기간이 끝나면 나는 외국으로 갈 거야. 명목은 많으니까 걱정할 거 없고, 한국엔 1 년에 한 번 정도 들어와서 인사드릴게. 여전히 사이좋은 부부인척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물질적 보상은 충분히 해줄 테니까 먹고 살 걱정은 말라는 말을 덧붙이는 예준의 말에 수빈의 굳었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조금은 긴장감이 더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시 입을 연 건 예준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너한테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 말씀드리도록 해. 나랑은 정리하겠다고. 전부 내 탓으로 돌려도 좋아.”

    그 잠깐의 침묵 동안 예준은 수빈이 한때 결혼 예찬론자였다는 사실을 곱씹 었던 듯했匚上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는 수빈의 말 중에 내심 마음에 툭하니 걸려있던 한 가지를 언급했다.

    “팔려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개척한다고 생각을 해.”

    듣는 입장에서도 매우 언짢은 비유였던 듯, 찌푸린 미간이 사나웠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넘치는 근자감은 어디다 팔아먹고 팔려가니 마니 죽는 소리야? 네가 심청이야? 내가 뭐 너 인당수에 밀어 버리기라도 하냐고.”

    분명 예준은 한결같이 처음 착아온 그때부터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인데, 그때와는 달리 그의 제안이 호의적으로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래알 같은 현실에 처해있는 내 의지가 너무 약해져서?

    “장담하건데, 이 결혼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손해를 보거나 불행해질 일은 없을 거야.”

    “너야말로 무슨 근자감……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신호가 걸려 도로 위에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수빈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확신에 찬 목소리. 진득하게 얽혀오는 그의 모든 것에 불가항력적으로 몸이 얼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찾아와 손을 내밀어주던 예준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는 건 왜 일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행동은 지극히 자신을 위한 거였다. 하지만 의미만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처럼 일일이 의미부여하지 말고, 결과만 생각한다면?

    어쩌면.

    어쩌면 그 역시 자신에게 돌파구가 되 어줄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무조건 피하고만 볼 일이 아니라는거다.

    우리는 지금 '진짜 결혼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은 힘을 잃고 이리저리 휘청대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엉켜든 생각들을 어떤 대답으로 풀어내야 할지 몰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자신은 그의 말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예준이 눈치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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