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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5화 (15/63)
  • 15화

    “병실엔 나 혼자 다녀올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수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방훈의 병실은 5층이었다.

    “512호, 512호……

    복도를 두리번대던 수빈이 513호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아, 찾았다.”

    바로 옆 병실에 512호라는 숫자와 함께 환자 명 단에서 신 *훈'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었다. 반쯤 열린 문에 노크하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는데 안에서 방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장씨. 나등좀긁어줘 봐.”

    자신의 아내를 동네 아재 부르듯 부르는 건 방훈 특유의 애정 표현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며 목소리가 그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수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지만, 그것도 잠시

    “근데 수빈이 선은 언제 또 연락준대?” 이어진 다음 말에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노크를 하려던 손이 허공에 멈춰서고, 아빠 하고 부르려던 말이 콱 하고 목구멍 안에 잠겨버렸다.

    “글쎄요 다음 주 중에 올 것 같기는 한데.” “저번에 봤던 남자는? 인상 참 서글하니 좋더만. 왜잘 안된 거래? 우리 수빈이가 별로래?”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딸이 너무 예뻐서 부담스러웠나? 얼굴값할까 보卜?

    우리 수빈이 그런 애 아닌데.

    한 번도 수빈 앞에서 대놓고 맞선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방훈이라, 그가혼잣말처럼 꺼내놓는 얘기들이 낯설기만 했다.

    “연이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중얼대고 그래요.”

    수빈에게 번번이 타박만 날리던 정남이 되레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냥……

    에휴, 무언가 말하려던 방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건호랑 헤어지고는 통 남자를 못 만나잖아. 그게 나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수빈의 어깨가 파릇 떨렸다.

    박건호.

    저조차도 매일 잊기 위해 애쓰는 존재였고, 이별 이후엔 가족들 간에도 암묵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아유, 참! 이 양반! 별말씀을 다 해, 지난 얘기는 뭐하러.”

    “아니, 잘 만나던 애들이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갑자기 헤어진다니까……

    “시끄러워요!”

    말없이 등을 긁어주던 정남이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방훈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이고, 나 죽네!”

    앓는 소리를 내던 방훈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정남에게 농담을 건넸다.

    “장 从I, 손맛 아직 안 죽었네. 나 갈비 한 대 나간 것 같은데, 좀 봐봐.”

    그가 콧소리를 내며 정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동시에 수빈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 결혼 안 한다니까?”

    갑작스런 딸의 등장에 방훈과 정 남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게 누구야. 우리 딸, 아빠 보러 왔어?”

    “가게는? 문제대로 잠갔니?”

    방훈과 정남이 차례대로 말했다.

    하지만 수빈은 묻는 말엔 대답도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결혼 안 해. 안 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해.”

    4개의 침대 중 두 개는 비어있었고, 나머지 하나의 침대에 누워있던 노파가슬그머니 고개를 빼들었다.

    그를 의식한 정남이 고개를 꾸벅이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

    “커피는 뭐야? 이 비싼 걸 왜 또 사왔어? 그냥 캔 커피면 된다니까.”

    남 앞에서 다툴만한 문제는 아니었던지라 급히 화제를 돌린 거 였지 만, 오히 려 수빈의 심기는 더 틀어지고 말았다.

    “누가 들으면 금가루라도 탄 줄 알겠네. 이거 그냥 커피야, 엄마.”

    “그냥 커피는. 이거 한 잔이면 믹스 커피가 몇 잔인데.”

    그 말에 그만 꾹꾹 눌러 참던 짜증이 치솟았다.

    ……하아.

    “그래, 맞아. 이 커피 마시려면 엄마가 떡볶이를 종이컵으로 몇 개나 팔아야 되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 쉬던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내가 비참한 건 괜찮은데.

    “결혼정보업체 통해서 결혼해봤자, 우리 집이랑똑같이 이깟 커피 한 잔에 벌벌 떠는 집에 시집가야 한다는 거.”

    가족이 비참해지는 건 싫었다.

    “우리끼리 궁상떠는 건 괜찮아, 하나도 안 비참해. 근데 마음에도 없는 남자 만나서 같이 궁상떨고, 눈치 보면서 살기는 싫단 말이야.”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손바닥이 움푹 패도록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누가 눈치를 준다고 그래? 누가 너한테 재벌 데리고 오라디? 그냥 마음 맞고, 평생 너 아껴줄 남자 하나 만나서 행복하게……

    “내 팔자에는 그런 남자 없을 테니까!”

    다 소용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꿈 깨라고 제발. 현실 좀 자각해, 엄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맺었다. 정 남은 놀란 듯,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었고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방훈이 넌지시 그녀를 불렀다.

    “수빈아,,

    한바탕 일었던 소란을 갈무리하려는 듯 방훈은 흥분한 딸을 너그럽게 달래기 시작했다.

    “아빠도 우리 딸 평생 끼고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천년만년 살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거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는 두 사람에게도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이었다.

    “근데 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니.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별하게 되더라도, 너만큼은 든든한 사람한테 맡기고 가야지. 안 그래?”

    3년 전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깨어난 방훈은 갑작스럽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늘 대비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소중하니까, 더더욱 혼자 남겨둘 수가 없는 거 라며 .

    하지만 수빈은 아무것도 듣기 싫은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건 아빠 욕심이잖아. 맡기고 간 놈이 든든한 놈일지, 냅다 뒤통수 후릴 놈일지 어떻게 아냐고. 그냥 마음 편히 나 혼자 살겠다는데 왜들 이래.”

    “수빈아.,,

    “내 인생이야. 내가 결정할 거고.”

    “나좀 제발 내버려두면안 돼?”

    해일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먹먹함이 가슴과 목을 답답하게 짓눌러왔다.

    우는 모습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심난한 표정으로 수빈을 바라보던 정남이 다시 물었다.

    “저번에 만났던 남자가 많이 별로였어? 그래서 그래?”

    다 잊어가던 강준모가 떠올랐다.

    대꾸가 없는 수빈에게 정남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인상도 좋고, 조건도 나쁘지

    않……

    “강도가 얼굴에 나 강도라고 써놓고 다니는 거 봤어? 하다못해 살인범 중에서도 인상 좋은 사람 많아 그게 뭐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엄만 왜 그래, 진짜!”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탓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잖아!”

    홧김이었다. 강준모와 있었던 일을 말했던 건.

    “내가 매번 맘에도 없는 맞선에 나가면서, 무슨 소리까지 들어왔는지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상대가 아무리 거지같은 놈이었더라도 부모님께 맞선에 대해 하소연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얘길 들을 부모님의 심정이 어떨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아니 나 다를까, 방훈과 정 남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사스벅이 된 정남을 보고도 입이 멋대로 떠들어댔다.

    결국 수빈은 그날 강준모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버리고 말았다. 더불어 열세 번의 맞선을 거치며 조금씩 무너져 내리던 자존감과 매번 느끼던 모욕감까지 .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다그치는 정남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匚上

    “언제 궁금해 하기나 했어? 엄마랑 아빠가 궁금한 건 몇 번째 맞선에서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뿐이었잖아!”

    그만

    이성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말들을 당장이라도 멈추라고 소리치는데.

    “나는 혼자가 좋아. 애초부터 믿었으면 안 될 놈한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울고불고 바보 되는 것보다, 외로워도 혼자 살다 죽는 게 백배는 낫다고.”

    한 번 터져버린 설움은 벼랑 끝에 몰려 발악이라도 하듯 발버둥을 쳐댄다.

    결국 수빈은 충격에 빠진 정남과 방훈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서로를 너무 위한 게 탈이라면 탈이었을까.

    비록 순탄하기만 했던 삶은 아니었더라도, 이제껏 우리 셋이서도 잘 살아왔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이대로만우리 계속 살아가면 안 되겠냐고.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자꾸 나를 밀어내지 말아달라고.

    그저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언제라도 떠나버릴 사람처럼 구는 부모님의 말에 밀려들었던 서운함과 속상함이 엉뚱한 데로 표출되어버린 상황.

    ……최악이었다.

    그 와중에 병실 앞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준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

    잠시 나마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방금 전 제 입으로 꽥꽥 떠들어대던 말들이 뭐였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지 만, 예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수빈이었다.

    “하아.”

    머리칼을 헤집으며 고개를 돌린 수빈이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뒤이어 수빈을 따라 나오던 정남 역시 예준을 발견했다.

    뒤늦게 그의 존재를 인지한 정남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예준이니? 예준이 맞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 그래.”

    정 남은 자못 당혹스러운 얼굴로 예준과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부터 있었니? 같이 왔었어?”

    “네. 수빈이가 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밖에서 기다렸어요.”

    “그래.”

    “수빈이는 걱정 마시고, 아저씨께 안부 전해주세요 곧 다시 문병 오겠습니 다.”

    깍듯이 인사하고 멀어지는 예준의 옷깃을 정남이 다급히 붙잡았다.

    “저기, 예준아!”

    제 팔을 붙들고 있는 정 남의 손을 물끄러 미 내려다보던 예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에 조금 머뭇거리던 정남이 입을 열었다.

    “우리 수빈이한테……

    “빚 받으러 온 거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는 정남의 턱이 바르르 경 련했다.

    “네가 어떻게 도와줬는지 한 번도 잊고 산 적은 없단다. 돈은 약속한 날짜에 꼭 돌려줄

    테니, 혹시나 염려치 말았으면 해.”

    글쎄. 무슨 수로.

    제가 알기로는 그럴 여유는 없었다. 혹시나 여유가 된다면 그거야 말로 원치 않는 바였고.

    하지만 예준은 정남이 꺼낸 말에 대답 대신 조용히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예준아. 우리 수빈이 좀……

    멀어지는 예준의 뒤통수로 정남의 희미한 혼잣말이 새어들었다.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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