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다시 말해봐.”
이상한일이었다.
몸도 못 가눌 만큼 취한 자신이 예준을 상대로 물리적 압력을 가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분명 사고는 같이 쳤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만 자꾸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수빈의 고개가 점점 잘 익은 벼처럼 아래로 향했다.
“없었던 일로 할 거 아니 면, 뭐 …… 어쩌자는 건데.”
없던 마음이 갑자기 생긴 건 죽어도 아닐 텐데, 예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뜨거웠다.
“원하는 게 뭐냐고!”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결국 수빈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예준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보고 있지는 않지만, 어쩐지 그가 묘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제 약속했잖아. 그 대가로 네 전 남친 떨궈준 거고.”
……아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위기에 몰린 그녀를 구원해준 건 힘차게 울리는 수빈의 벨소리였다.
“저,전화 왔다!”
부리나케 예준을 밀치고 신주단지 모시듯 휴대폰을 집어든 수빈은 예준을 향해 얼른 욕실로 들어가 씻으라는 듯 마구 손을 흔들었다.
예준이 사라지자 수빈은 재빨리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匚上 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녀의 얼굴은 잿빛이 되고 말았다.
- 장 여사님,
발신자는 정남이었다.
아. 망했다.
잠시 고민하던 수빈은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있잖아……
[수빈아.]
여보세요, 고 나발이고 변명부터 하려는데, 어딘가 평소답지 않은 정 남의 목소리에 괜한
위화감이 들었다.
[엄마가 어제 경황이 없어서 문자도제대로 못 남겼네. 전화기 꺼져있던데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기
“어?”
[집에 아무도 없어서 놀랐을 텐데.]
“어, 아니 그게…… 사실은 엄마 나도 어제
집 못 들어갔어.”
[지수네서 잤니?]
“어, 뭐. 그냥……
평소에도 절친인 지수 네서 자던 일이 빈번했던지라, 정남은 별 의심 없이 묻는 듯했다. 수빈은 지금 굳이 솔직히 털어놓을 타이 밍은 아니라고 빠르게 판단했다.
정남의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으니까.
“근데 엄마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방금 전에 한 얘기는 무슨 얘기고?”
[……그게]
“무슨 일인데 그래.”
불안을 감지한 수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자, 정남은 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匚匕
[아빠가 좀다쳤어』
수빈이 놀라지 않도록 애써 목소리를 낮춰 말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듣는수빈은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또 넘어졌어?”
[그렇지 뭐.]
“어디서 넘어졌는데? 많이 다쳤어?”
[계단에서 좀 굴렀는데,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치료 잘 했고, 정신도 멀쩡해.]
수빈은 말문이 막혔다.
괜찮다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돌덩이 하나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오늘 쉬는 날이지? 아직 집 안 갔으면 얼른 가서 가게 문 좀 잠글래?
정신없이 나오느라 닫기만 하고 그냥 와버렸네」
“병원이 어딘데.”
[일단 가게 문부터 좀 잠가. 아빠는 검사 결과 보고 금방 퇴원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걱정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정남은 방훈이 부른다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 렸다.
수빈은 이미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이나 붙들고 있다가 뒤늦게 툭 떨어트리며 멍하니 바닥만 쳐 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덥석 손목이 잡혀 돌아보니 예준이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며 자신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좀……다치셨대.”
수빈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번엔 예준의 할머니가그러더니, 이번엔 아빠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무슨 난리인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빈이 겉옷을 낚아채듯 주워 들고는 급히 서둘렀다.
예준은 수빈이 바닥에 하나둘씩 떨군 핸드백이 며 화장품, 휴대폰을 차례로 주워든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타, 얼른.”
주차장에 도착한 예준이 뒷좌석에 수빈의 물건을 대충 넣어둔 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수빈이 머뭇거리자, 차에서 내린 예준이 직접 조수석의 문을 열고 수빈을 거의 구기듯 밀어 넣었다.
의자에 패대기쳐지고 나서도 수빈은 좀처럼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예준의 머리털을 쥐어잡을 듯 고래고래 소리를 쳤을 텐데 말이다.
눈앞에서 예준이 손가락을 부딪쳐 내는 소리에 눈을 깜박인 수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무뚝뚝한 얼굴로 수빈의 이성을 깨운 예준이 트렁크에서 꺼내온 무릎 담요를 수빈의 다리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덮어.”
“됐……에취히!”
사람무안하게 기막힌 타이밍에 재채기가 터져 나오고 난리다.
그러고 보니 옷이 덜 말라 축축하다는 걸 여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손등으로 코 아래를 훔치는 수빈을 향해 예준이 말했다.
“덮으라면 덮어, 그냥 좀.”
“에취이!!!”
대답 대신 방금 전보다 더 큰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훌쩍.
당황한 얼굴로 코를 훌쩍이는 수빈을 바라보던 예준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제 뺨을 손등으로 슥 문질 렀다.
“좋은 말로 할 때 덮어. 침 그만 튀기고.”
그가 낮게 중얼거리자, 수빈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담요를 펼쳐 덮었다.
그제야 차를 출발시킨 예준이 수빈의 시트에 열이 오르도록 버튼을 누르고, 히터를 약하게 틀었다.
경황이 없어 신경을 못 썼는데, 예준의 머리도 덜 말라 물기가 흥건한 게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담요 하나 더 없어? 나보다 네가 더 젖은 거 같은데.”
수빈이 넌지시 묻자, 예준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남자가 담요는 무슨.”
“허세 떨다 개도 안 걸린다는 봄 감기 걸리지 말고, 빨리 덮어.”
……있어야 덮지.
차마 꺼낼 수 없는 대답을 삼키며 예준이 대충 손으로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이거 봐, 물 튀는 거 !”
수빈이 제 무릎에 얹어진 담요를 건네주려는 듯한 액션을 취하자, 예준이 낮게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
“신 경 끄라고 했다?”
고맙긴 고마운데 말투가 영 싸가지가 없어 이게 고마운 건지도 모르겠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를 바라보는데 예준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한 번도 걸려본 적 없어.”
중얼대던 예준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다시 한 번 예준의 재수 없음을 느끼며 수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했다.
웃긴다, 진짜. 병 이 예고하고 찾아오냐?
그러자 슬쩍 그녀를 바라본 예준이 툭 던지듯 말했다.
“긴장 풀어 별일 없을 테니까.”
그의 말에 수빈은 방금 전 그의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 시답잖은 위로에 정말로 마음이 놓여버려서.
* * *
가게를 가보니 불은 꺼져있는데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심지어 꽉 닫히지도 않고 약간 열려있는 상태였다.
그것만 봐도 정남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내려 보니 문틈에 정남이 늘 신고 다니던 슬리퍼 한쪽이 끼어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달려갔으면서, 왜 항상 자식한테는 별일 아닌 것처럼 구는
걸까
3년 전,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방훈은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됐지만, 자연스럽게 걷는 건 버거울 정도였고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툭하면 넘어지고는 했다. 때문에 방훈의 몸은 늘 멍투성 이 였다.
“가자. 병원 바래다줄게.”
“아니야. 내가 알아서 갈게.”
“그냥 좀 타. 차 주인이 타라는데 뭘 그렇게 따지고 있어.”
예준의 말이 맞았다.
엄마도 밤새 쪽잠 자고 아빠 곁을 지키고 있는 걸 텐데.
택시도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골목, 대로변까지 뛰어가기엔 상황이 별로였다.
결국 수빈은 이미 멀어지고 있는 예준의 뒤를 열심히 쫓아야했다.
“엄마. 어디 병원에 있어?” [오려고?]
a o ”
[안와도 된다니까.]
“빨리어딘지나 말해. 나 벌써 차 탔단 말이야.”
수빈의 채근에 정남이 마지못해 병원 이름을 말했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수빈아]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남이 다급히 수빈을 불렀다.
“응. 말해, 엄마.”
[올 때 엄마 캔 커피 하나만 사다줄래? 오늘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셨네』
하루라도 커피를 못 마시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정남이다.
못 마신 커피를 챙기는 걸 보니 방훈이 괜찮다는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알겠어. 사갈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빈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수빈은 예준과 함께 방훈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았다. 자기가 얼떨결에 예준과 예준의 할머니를 찾았던 것처럼.
병원 입구로 들어가기 직전, 예준은 갓길에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잠시 차를 세워두었다.
“여기잠깐만 있어.”
수빈을 두고 차에서 내린 예준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의 손엔 테이크 아웃을 해온 커피 한 잔과 과일 주스 두 잔이 들려있었다.
“가지고 들어가.”
예준이 내미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수빈은 곧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었다.
고맙다고 하려던 말이 어쩐지 목에 턱 걸려 버렸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걸 예준이 잡아주었다.
“혼자갈수 있겠어?”
“……어.”
조금 늦은 그녀의 대답에 시선만 내려 수빈을 바라보던 예준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야.뭐하는……
당황한 수빈이 몸을 빼며 버티자, 그가 고개를 돌려 보란 듯이 수빈의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손끝이 민망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떨지나 말던가.”
작게 핀잔을 준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지체 없이 걸어 나갔다.
“어어!”
수빈의 시선이 예준에게 잡힌 자신의 손목으로 향했다.
이렇게 또한 번 그에게 속절없이 끌려가버리고 만다.
의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데.
의지해서는 안 되는 녀석이라는 걸, 잘 아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