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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3화 (13/63)
  • 13화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낮선 천장이었다.

    새털처럼 가벼운 몸에 착착 감겨오는 이불의 느낌이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포근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애써 뒤로한 채, 그녀가 쾌남처럼 웃어젖혔다.

    “에이, 이건 아니지!”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호탕한 웃음소리와는 달리 혼잣말하는 수빈의 목소리가 염소마냥 달달 떨렸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녀가 조심히 시선을 틀었다.

    만약에.

    만약에 고개를 돌렸는데, 상체를 탈의한 지예준이 옆에서 잠들어있는 개떡 같은 시 나리오라면. 자신은 그 시나리오를 쓴 작가의 멱살을패대기 쳐버리겠다, 다짐하며.

    두려움과 걱정으로 뒤엉킨 얼굴이 마침내 완전히 옆으로 향했다.

    수빈의 동공이 그대로 떨림을 멈추었다.

    마주한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깊이 응시했다.

    “잘 잤어?”

    느른하게 늘어진 채 고개를 반쯤 파묻은 예준이 말했다.

    이불로 반쯤 가려진 그의 훌륭한 상체를 영혼 없이 훑던 수빈이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 며 물었다

    “이거 너무 식상한 전개 아니냐?”

    “뭐가?’,

    “너왜 벗고 있어?”

    “나 원래 잘때 뭐걸치고 못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잤니?”

    그가 어깨를 슬쩍 들썩였다.

    “보시다시피.”

    수빈의 시선이 예준의 코로 향했다.

    “네 콧구멍을 틀어 막고 있는 그건 설마, 휴지?”

    “그럼 양말일까?”

    “코피가 터질 정도로……격렬했니?”

    그녀의 물음에 예준이 잠시 생각을 곱씹는듯하다가 대꾸했다.

    “대답해야 돼?”

    수빈이 석상처럼 굳은 채,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예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너,어제기억하나도안나지.”

    침착하기만 한 예준의 물음에도 수빈은 차마 대꾸 할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뭐라도 기억이 나야 대처를 할 텐데, 정말 머릿속이 백지장이었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왠지 떠올리면 안될 기억들일 것 같았다.

    수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번데기처럼 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욕실로 향하던 그녀의 발끝에 무언가가 턱 하고 걸렸다.

    수빈은 영혼 없는 기계처럼 스르륵 시선을 내렸다.

    메마른 눈빛이 제 엄지발가락에 걸린 봉긋한 천 조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야, 이 흉물스러운 건.

    “아……

    내 브래지어구나.

    검은 호피 무늬 브래지어가 그녀에게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감흥 없이 그걸 주워든 수빈은 몇 걸음 더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짐승처럼 포효했다.

    갑자기 머리에 번개를 맞고 초능력 하나가 생긴다면, 그건 반드시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어야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바라는 건 과거로 돌아가는 일 뿐이었으니까.

    타임 슬립이 어렵다면 기억을 조작하거나 없애는 능력은 어떨까?

    나쁘지 않다.

    맨 인 블랙에 나오는 요원처럼 지예준의 머릿속에서 아예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주저앉은 채 절규하던 수빈이 벌떡

    일어섰다. 망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옷!”

    일단 옷부터 입고 생각하자고 판단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옷이 보이질 않는다.

    “내 옷 어디다 뒀어!”

    수빈이 당장이라도 예준을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댔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게 진짜!

    “빨리 안 내놔! 네가 나무꾼이야, 뭐야!”

    날개옷 빼앗긴 선녀처럼 광광 뛰어대는 그녀를 지켜보던 예준이 입술을 꾹 물며 웃음을 삼켰다.

    잠시 후, 그가 턱 끝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어.”

    “너, 나와서 보자.”

    있는 힘껏 예준을 노려보던 수빈이 이불을 돌돌 만 채 욕실을 향해 콩콩 뛰 었다.

    거칠게 문을 닫은 수빈이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예준의 시선이 문 앞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이불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하얀 솜이불이 탈피를 마친 애벌레의 그것처럼 놓여있었다.

    욕실로 들어선 수빈은 문을 잠그자마자 등을 기댄 채 쭉, 미끄러져 내렸다.

    “……하아.”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묵직한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차마 예준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어, 도망치듯 욕실 안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나갈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쳐댔다.

    아무리 막 나가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원나잇을 할 만큼 부도덕하진 않았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는데, 기억은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대가 무려 지예준인 상황.

    “돌겠네, 진짜.”

    제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한참이나 욕실 바닥에 주저 앉아있던 수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보니 욕조 위로 나란히 걸린 옷가지가 보였다.

    수빈의 블라우스와 슬랙스, 그리고 예준의 것으로 추정되는 셔츠까지.

    “뭐야, 이건 또.”

    그녀는 손을 뻗어 빠르게 제 옷을 빼들었다.

    블라우스는 다 말라있었는데, 바지는 덜 마른 빨래처럼 눅눅했다.

    '어제 그 정신에 옷까지 빨고 잤어?’

    뭔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대던 수빈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화장은 번져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이러고 빨래를 했다고?”

    브래지어는 내던지고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손빨래를 했단 말이야?

    볼만 했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아버 렸다.

    아니, 그보다.

    “..팬티?”

    오도카니 서있던 그녀의 시선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그러 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역시나 상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분명 브래지어는 바닥에

    나동그라져있었는데, 팬티는 멀쩡히 챙겨 입고 있는 상태라니.

    온갖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앞 다퉈 떠올랐다.

    적군과의 역사는 이루어진 것인가, 아닌 것인가.

    수빈은 우리가 잤냐는 물음에 예준이

    “보시다시피.”라고 대답했던 걸 떠올렸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말뜻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순간, 꺼져가던 희망에 작은 불씨가 붙었다.

    수빈은 간단히 씻은 후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일단 나가서 자연스럽게 예준의 동태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어젯밤의 일을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 일도 없던 거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그땐 어떡하지?

    걱정 뒤로 자책감이 뒤따랐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수빈은 눈을 꼭 감고 심호흡을 한 두I,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어젯밤은 실수였어. 너도 피차 마찬가지일 테니까 잊자.”

    물론 잎자고 해서 잎어질 일은 아니지만, 그렇 다고 예준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는 일이었다.

    초조한 속마음을 감추려 수빈은 몇 번이나 혼잣말을 연습했다.

    “지예준! 어젯밤은 실수였어. 그러니까

    우리…….”

    굳은 각오와 함께 마침내 문고리가 돌아갔다.

    “깨끗이 잊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리운 새까만 인영에 소스라치게 놀란 수빈이 소리쳤다.

    “아악!”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화장실 전세 냈어? 왜 이렇게 안 나와?” 팔짱을 끼고 선 예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빠져서 엉덩이라도 깨진 줄 알았네.” “남이야 엉덩이가 깨지든 말든.” 불퉁한 중얼거림과는 다르게 수빈의 입술이 새초롬하게 튀어나왔다.

    “왜? 진짜 엉덩이 깨졌으면 네가 나 업고 병원이라도……

    “아, 비켜!”

    “엄마야!”

    인정사정 밀고 들어오는 예준 때문에 하마터면 진짜 엉덩이가 나갈 뻔했다.

    “야!”

    겨우 중심을 잡고 선 수빈이 홱 고개를 돌리 며 소리 쳤지 만, 예준은 눈길 한 번 안 주고 제 셔츠만 챙겼다.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나쁜 노

    셔츠를 챙겨 선반 위에 얹어놓은 예준이 뒤를 돌아 수빈을 빤히 쳐다봤다.

    “안 나가? 나 샤워해야 되는데.”

    순간 이대로 내뺄까 생각도 들었지만…….

    제기랄.

    망할 놈의 빚이 문제였다.

    결국 수빈은 연습했던 말을 꺼내놓기로 했다.

    “나 할말 있어.”

    “해.”

    여유롭기만 한 그의 모습에 반해 수빈은 입이 바싹 말랐다.

    “어젯밤은!”

    “어젯밤은 없던 일로 하자는 뭐, 그런 쓰레기 같은 발언을 할 생각은 아니지?”

    쓰, 쓰레기?

    예준의 날카로운 반문에 수빈은 이제 막 작동을 시작한 뇌가 도로 가동을 멈춰버리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놓고.”

    여전히 자신의 한쪽 콧구멍을 꽉 틀어 막은 휴지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희망의 불빛이 흔적도 없이 빛을 감추고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역사는 이루어지고야 말았던 거다.

    수빈은 할 말을 잃었다.

    맘 같아서는 '내가 그랬을 리 없잖아!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개자식아!’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원수 앞에서 신명나게 퍼마시다가 기절이나 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심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울고불고 책임져! 이 쓰레기 자식아!,라고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자존심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명은 벗어야 했다.

    “네가 날 몰라도 너무 모를까 봐 하는 얘긴데.”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나 원나잇 같은 거 할수 있을 만큼 간큰 애 아니야.”

    원나잇이란 말에 예준의 곧은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민감한 단어였다.

    그가 인상을 쓰자 수빈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표정이 왜 저따위야? 같이 저질러 놓고 왜 나만 개날라리로 만드냐고.

    당황한 그녀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잤다면 !” 호기 좋게 외쳤지만

    “……그건 실수였어.”

    모기만 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준은 욕실 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짧은 침묵의 무게가 온몸을 옥죄는 듯 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예준의 곧았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살벌한 얼굴을 한 그가 곧 서릿발 휘 날리는 목소리를 낮게 흘렸다.

    너 지금 실수라고 그랬냐?

    말도 못할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에 수빈의 심장은 바짝 쪼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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