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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2화 (12/63)
  • 12 하'

    잠시 후.

    수빈과 예준은 정자의 곱창집에 나란히 앉아있게 됐다.

    전장에서 승리한 장군 같은 표정의 예준과 나라를 잃고 끌려온 노비 표정을 한 수빈이 마주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수빈은 불과 몇 십 분 전에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었다.

    예준과 건호가 맞닥뜨리고, 예준은 수빈에게 “안녕, 자기야.”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헐리웃 배우 뺨치게 소화해냄과 동시에 건호에게 잡혀있던 수빈의 손목을 분리해냈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하마터면 욕이 튀어 나올 뻔했지 만, 수빈은 어금니를 꽉 물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봐, 봤지? 내, 나, 남편 될 사람이야.” 안면에 사정없이 경련이 일었다.

    남편 될 사람이 라는 수빈의 소개에 예준의 고개가 순식간에 슥 기울어 그녀를 향했다.

    수빈을 빤히 응시하는 예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마치 '진짜?’ 하고 되묻듯.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건호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다 건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피할 수 없는 전화였다.

    그리고 그사이.

    수빈을 제 가슴팍으로 당겨 안은 예준이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속삭였다.

    “지금대답해.”

    마치 복화술이 라도 하듯 은밀하고.

    “나랑 할거야, 말거야.”

    야릇하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당황한 수빈이 어금니를 꽉 물고 작게 대답했다.

    “하긴 뭘 해, 이 웬수야. 가만 안 있어?”

    “어허.”

    “넌 눈도 없어? 지금 아주 최악의 상황…… “네 대답듣기엔 최적의 상황이기도 하지.” 말을 잃은 수빈의 턱이 스르륵 벌어졌고, 예준이 눈썹을 까닥이며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렇지.

    이 원수 같은 자식에게 없던 영웅 심리가 갑자기 솟아났을 리가 없다.

    잊지 말아야 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를.

    천하의 요물, 지예준.

    “하자. 결혼.”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하는 교활한 인간이었다.

    수빈은 건호의 동태를 살피랴, 예준의 협박을 피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분주하게 시선을 굴리며 대답을 미루자, 예준이 조금 더 힘주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흡!”

    건호가 보기에 딱 오해하기 좋은 각도가 나와버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분간이 안 선다.

    그녀의 오묘한 표정을 느른하게 훑던 예준이 살풋 웃으며 귓속말했다.

    “대답, 안 할 거야?”

    “너 진짜 이럴래기”

    “네가 대답을 해야 나도 다음 대사를 고를 거 아냐.”

    협박이 분명했다.

    분한 마음에 마지막 오기를 드러낸 수빈이 이를 꽉 물고 물었다.

    “안 한다면?”

    그러자 예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누구세요?”

    모르는척하겠다는 거다.

    “이제와서 이러면 너는 미친놈안될 것 같아?”

    “뭐 어때, 모르는 새끼한테 미친놈 좀 되면.”

    “넌 좀 골치 아프겠다. 딱 봐도 전 남친 같은데.”

    이게 진짜!

    수빈의 얼굴이 확 구겨지려던 찰나, 건호가 전화를 끊어 버 렸다.

    동시에 예준이 수빈의 몸을 빙글 돌려 제 품에 끌어안았다.

    놀란 수빈이 속절없이 끌려가 예준에게 안겼다.

    건호가 바라보고 있을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표정 관리엔 자신이 없으니 예준을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반면 예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수빈이 정말 자신의 연인이라도 되는 양, 아주 사랑스럽 다는 손길로 그녀의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수빈의 귓바퀴에 닿을 듯 가까워진 예준의 입술이.

    “셋 셀 때까지 대답해.”

    위험하게 속살댔다.

    “하나.”

    다급해진 수빈이 얼른 옆구리를 찔렀으나.

    /둘_ ”

    자비는 없었다.

    “자, 잠깐만!”

    “해! 한다고! 하면 되잖아!”

    이 개자식아!

    크게 소리 내지는 못하고 거의 울부짖듯 수빈이 어금니를 물고 속삭였다.

    그제야예준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듯 올라섰다.

    “무르기 없기다.”

    소중한 먹이를 가로채려는 하이에나에게 얜 내 거라고, 표식이라고 새기듯, 천천히 다가온 예준의 입술이 보란 듯이 수빈의 뺨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건호에게 경고라도 하듯 매섭게 빛났다.

    초옥.

    그 당혹스러운 감촉에 수빈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보란 듯이 건호를 향해 선 예준이 수빈과 건호, 두 사람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사랑해, 수빈아.”

    그것은 마치 누구든 제 먹이를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고, 수빈에게는 죽음의 표식과도 같았다.

    * * *

    그 이후 수빈은 건호가 어떻게 자리를 떴는지 지켜보지 못했다.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수빈의 어깨를 감싼 예준이 신이 나서 먼저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예준이 건호에게 뭐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쪽은 버스 정류장에 볼일이 많으신가보다.

    그럼 일 보시고, 천천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뭐랬더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늦게 가면 염통 다

    떨어지거든요'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우리 자기가 돼지부속물을 너무 좋아해서.,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잘 구워진 염통 한 조각이 수빈의 앞 접시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게 마치 최면을 깨우는 신호탄처 럼 수빈의 몽롱한 의식을 깨웠다.

    “이제정신 좀 차리지 그래?”

    눈앞에 원래대로 돌아온 예준이 시큰둥하게 타박을 건네고 있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에 불이 붙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야!”

    수빈이 벌떡 일어나 예준의 머리통을 향해 풀스윙을 휘둘렀지 만, 예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찌검을 피했다.

    “이거봐라, 이거. 또 손버릇 나온다.”

    “뭐가 어쩌고 어째?”

    “기껏 도와줬더니, 왜 검은 머리 짐승처럼 굴고 난리야. 진정해.”

    “뭐? 짐승?!”

    부아가 치밀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되지, 볼에다 뽀……!”

    “뽀뽀?”

    “악!”

    제 머리털을 움켜쥔 수빈이 다시 소리쳤다.

    “그래! 그건 왜 하고 난리야기”

    “미친척하고 했다, 왜.”

    심드렁하게 대꾸한 예준의 눈빛이 불퉁해졌다.

    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그 눈빛이 꼭 동네 바보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 다.

    “너 바보냐?”

    이게, 진짜!

    “결혼할 남자가 데리러 온다는데 버티고

    서있는 놈이 흔한 줄 알아?”

    예준은 마치 뭐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 눈을 빛내던 건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미심쩍었던 거지. 제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렸을 거고.”

    그 짧은 시간에 건호를 꿰뚫어본 예준의 지적에 수빈은 할 말을 잃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 앉은 수빈의 잔에 예준이 말없이 술을 채워주었匚匕 그러고는 제 잔을 마저 채운다.

    “그런 놈한테 대충이 통할 것 같아?” 반박할 수 없었다. 틀린 말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어쨌든 성공한 걸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면서도, 이상하게 어딘가 찜찜하단 말이지…….

    수빈의 시선이 스르륵 굴러 예준을 향했다.

    “하아.”

    찜찜한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홧김에 던져놓은 대답은 어쩔 것이며, 사자처럼 버티고 서있는 지예준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수빈은 술만 연거푸 마셔댔다.

    “이모 여기 소주 하나 더 !”

    술을 물처럼 마시는 수빈을 예준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수빈이 물었다.

    “근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맘만 먹으면 그런 건 일도 아니지.”

    뜨끈한 선지를 막 건져 올리던 숟가락이 허공에 그대로 멈추었다.

    “너 미쳤니, 진짜? 뒷조사 작작 안 해?”

    도끼눈을 뜬 수빈의 매서운 얼굴에도 예준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태도였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거 싫다며. 앞으로는 연락하고 찾아가는 예의 정도는 차릴까 해서.”

    “허!”

    기가 막혔다.

    “지가 언제부터 예의 따졌다고. 남의 면전에 대고 평가 나부랭이나 지껄이던 게.”

    중얼대는 수빈을 보며 예준은 피식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테이블 위에 나란히 늘어선 다섯 개의 소주병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히히히. 다섯 병이나 마셨어, 세상에. 나 좀 대단한듯. 히히 히.”

    그녀의 주사에 예준이 얼굴을 붉히며 불쾌해했다.

    “쯧쯧. 개가 똥을 끊지.” 그가 작게 중얼거 렸다.

    그러거 나 말거 나 수빈은 신나게 퍼 마셔댔다.

    정말이지, 요즘 같은 날은 맨 정신으로 하루 버티는 게 일하는 것보다 백배는 힘들었다.

    “지예준.”

    딸꾹.

    “나 뭐하나만 묻자.”

    “물어,,

    “왜 하필 나야?”

    허심탄회하게 던진 질문에 예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술잔을 비운 그가 미간을 좁히며 씁쓸하게 대꾸했다.

    “나라고 네가 좋아서 하겠냐. 너 내 스타일도 아닌데.”

    “이게 진짜……

    딸꾹.

    “병풍 뒤에서 빕숟가락 들고 싶냐.”

    수빈의 반쯤 풀린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나도 너 완전 별로거든?”

    숟가락을 움켜진 그녀의 손이 예준을 향해 마구 삿대질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적당히 살다, 깔끔하게 헤어지기 딱좋은 파트너잖아.”

    그의 명쾌한 정리에 수빈이 꼬인 발음으로 열심히 꿍얼거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 어마어마한 욕을 해대는 것 같은 모양새에 예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놀려먹는 재미도 있으니, 같이 살면서 심심하진 않겠다.”

    살긴 누가 살아!

    “됐고!”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욕을 나눠 먹었으니, 남은 건 예준이 본격적으로 아까의 일을 꺼낼 일만 남았다.

    “나 집에 갈래.”

    “가긴 어딜 가. 얘기는 끝내고 가야지.”

    “너무 늦었어. 엄마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지금이야말로 철판 깔고 튀어야 할 타이밍이라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어어?”

    머리가 핑 돌면서, 땅이 덤벼드는 착각이 들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아아!”

    이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면 최소 이마가 깨지거나 코뼈가 부러질 지도 모를 거라는 걸 예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야, 신수빈 !”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소음과 함께 예준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어!”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이 자신 쪽으로 덮쳐오는 수빈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고.

    “아이고!”

    놀란 정자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대로 수빈은.

    우당탕! 털썩!

    뭔가에 강하게 이마를 부딮치며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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