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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1화 (11/63)
  • 11화

    수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수빈아.”

    고작 이름하나에

    어쩌면 너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수빈아,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내 안에서 억지로 죽여 묻어놓았던 그가, 생생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너무 아팠던 기억은 부러진 칼날 조각처럼 깊이 박혀, 잊을만하면 가슴을 헤집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코끝이 찡할 만큼.

    아프게.

    아무 말도 못하고 눈도 떼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수빈에게 건호가 조금씩 다가섰다. 신중하긴 했지만, 망설임 따위는 없는 움직임이었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묶여있던 수빈이 가까스로 꽉 막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오지 마.”

    건호가 손을 뻗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챙긴 수빈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걸음이 주춤거리 며 건호로부터 한 발 멀어졌고.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의 손끝이 머리에 닿은 게 먼저였다.

    “미안,,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

    곧장 이어진 사과는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사탕 같았다.

    영혼이라고는 1그램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그와 헤어지고 나서 만약 우연이라도 그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숱하게 고민하고 연습했지만,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작 실전에서는 이렇게 바보처럼 굳어 버리고 마니까.

    동요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한 번 그에게 휘둘리 면 넌 사람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나.

    치욕스러웠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수빈의 손이 건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 그 치욕스러움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무슨 낯짝으로 나타났니?”

    허공에 떠 있던 건호의 손이 서서히 내려왔다.

    “왜 나타났냐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匚上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내가 뭐부터 해야 네 마음이 좀 풀릴 수

    있겠어?”

    무거운 침묵이 살결을 휘감았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돼.

    정신을 다잡은 수빈이 건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알려주면 그대로 할래?”

    “노력해볼게.”

    세상 진지한 그의 눈빛에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허탈한 웃음을 그렸다.

    “다시 태어나, 그냥.”

    언젠가는 마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이걸 매듭짓고 새롭게 살아가는 건 수빈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였다.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수빈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고 나기 시작했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 그래서 네 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해.”

    “내가 너니? 사람을 패게?”

    “그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아직도, 라니.

    몇 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엊그제 다퉜던 사람마냥 가볍기만 하다.

    차라리 고마웠다.

    “난 너 갈아 마셔도 분이 안 풀리니까 그냥

    조용히 꺼져.”

    조금씩 현실을 바로 보기 시작한 이성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다음 침묵을 깬 건 요란하게 울리는 수빈의 전화 벨소리였다.

    액정을 확인하니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떴다.

    아마 평소였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발신자가 모호한 번호는 잘 받지 않았을 뿐더러, 전화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빈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건호를 앞에 세워둔 채였다.

    그리고얼마 지나지 않아

    [나야]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수빈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받지 말아야 했던 걸까?

    왜 또 너니.

    아니.

    너는또뭐니.

    발신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준이었다.

    만약 건호가 없었다면 수빈은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이 자식아!’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스르륵 굴러 눈앞에 떡 버티고 서있는 건호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섬광이 스치며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기똥차고도 무모한 아이 디어가 떠올랐고, 이성이 그것이 올바른 대처인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성질 급한 주둥이가 선수를 쳤다.

    “어,자기야.”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자기라니.

    자기라니.

    자기라니……!

    내뱉은 순간 후회했다.

    기똥찬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게 채 3초를 가지 않을 만큼 도무지 제 스스로가 저지른 짓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 만 찰나의 순간, 수빈은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건호의 얼굴에 옅은 균열이 일어나는 걸.

    두방망이질 쳐 대던 당혹감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묘한 기대감과 희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거 봐라?

    어쩌면, 어쩌면 정말 통할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빈의 얼굴이 용솟음치는 용기에 힘입은 양 더욱 뻔뻔해졌다.

    그리고 건너편의 예준은 어이를 상실한 듯 말이 없었다.

    [신수빈 씨 휴대폰 아닙니까?]

    한참 만에 돌아온 예준의 대답을 깡그리 무시한 수빈이 다시 대꾸했다.

    “어휴, 오늘은 좀 쉬라니까 왜 또 왔어.”

    […….]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어?”

    재차 이어진 대답에 수빈임을 확신한 예준이 불쾌하다는 듯 타박했다.

    [미쳤어기

    “그럼, 나도 보고싶지.”

    [뭐 잘못 먹었냐고.]

    너는 지껄여라. 나도 짖을 테니.

    모든 걸 무시하기로 결심한 수빈이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기 지금어딘데?”

    한결같은 수빈의 반응에 잠시 침묵하던

    예준이 대꾸했다.

    [너의 자기는 아니지만, 너희 가게 앞이긴

    해.]

    '울 엄마 가게는 왜 갔어 ! 이 자식아!’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 지금 버스 정류장인데 좀 데리러 와줄래?”

    지금이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리라.

    수빈은 얼굴을 단단히 굳히며,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내뱉었다.

    “귀찮은 인간 하나가 자꾸 붙잡고 늘어져서.’ 가늘어진 그녀의 시선이 건호를 못마땅하게 훑어 내렸고, 눈치 빠른 예준은 수빈의 의도를 빠르게 캐치해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 만』

    [지금 네가 날 너무 간절히 원하는 거

    같으니까』

    “빨리 와.”

    차마 닥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 빨리 오란 말로 예준의 입을 막았다.

    피식

    [정산은 나중에 하자. 제대로.]

    대답에 옅은 실소가 섞여 나왔다.

    [5분 안에 갈게』

    나지 막한 맺음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중에 제대로 정산하자는 그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큰맘 먹고 적군까지 끌어들인 상황. 지금 제대로 끝내지 않으면 안 됐다.

    “들었지?”

    “。”

    o-.

    “내가 더 설명해야 해? 결론 나온 거 같은데 가던 길 가지 그래?”

    예준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건호와 끝내고 그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

    그런데 건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큰일이다.

    저질러놓고 본 희대의 똥 같은 계획에 플랜B 따위를 세워놓았을 리가 만무하건만.

    어째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기분 나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예준이랑 삼자대면까지 하는 상황이 올까 보卜, 수빈은 초조했다.

    “가라니까?”

    수빈의 말에 건호가 곧장 되물었다.

    “결혼할 사이야?”

    “당연하지 ! 내가 너처럼 사람 간이나 보다 내팽개칠 사람으로 보여?”

    “아니. 그렇게 안 보여.”

    작정하고 비꼰 말에 순한 강아지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너는 좋은 여자니까.”

    그 말에 더욱 심기가 뒤틀렸다.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제발 좀 사라져줄래?”

    그 말을 끝으로 수빈이 빙글 뒤를 돌았다.

    건호가 피하지 않으니, 자신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손목이 건호에게 도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함께 한 세월이 길었던 만큼,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수빈이 거짓말에 서툴다는 것쯤 건호 입장에서는 금방 간파해낼 수 있는 거라,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수빈이 었다.

    그리고 건호는 궁금하거나 미심쩍은 건 그게 뭐든 자신이 직접 확인을 해야 성에 차는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멀리서 들려오던 구두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안돼.

    아직 예준이 나타나면 안 됐다.

    하지만 건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저기 온다.”

    묵직하게 떨어진 건호의 음성에.

    “네 애인.”

    수빈은 그만 눈을 감아버 렸다.

    뚜벅뚜벅. 이 구두 소리의 주인이 정말로 예준이라면 그녀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마침내 구두 소리가 멈췄고,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후우.”

    뛰어오기라도 했던 걸까?

    수빈의 뒷덜미에 사분히 닿았다 사라지는 숨결이 가팔랐다.

    “남의 여자손목을 덥석덥석 잡고 말이야.” 느른하고 여유로운 말투.

    “좋은 말로 할 때 놓읍시다?”

    이 상황에 필요 이상으로 감미로운 목소리.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보니 생긋 웃는 낯의 .

    “안녕, 자기야.”

    예준이 보인다.

    “많이 기다렸지.”

    미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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