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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0화 (10/63)
  • 10화

    턱을 괸 채 반쯤 풀린 눈으로 수빈이 물었고, 그녀를 지켜보던 예준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꾹 다물려있던 입술이 뒤늦게 떨어졌다.

    “제대로 본거 맞아.”

    잔에 담긴 술을 비워낸 예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난 껍데기만 그 집 아들이지, 진짜 그들 속에 섞여있는 존재는 아니야.”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집 나간 딸 대신 핏덩이를 떠안은 외할아버지는 매일 술에 절어 그를 때렸다.

    어렵사리 입양된 집에서도 애자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친모에게서조차 그랬다.

    '예훈이에요. 저희 집 장남이요. 예훈아,

    인사드려야지.,

    어머니인 소정은 버젓이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를 대놓고 부정하며, 차남인 예훈을 장남이라고 소개시키기도 했다.

    하긴. 동생인 예훈이야 말로 훈탁과 소정의 피를 모두 물려 받았으니, 억울해도 입양아인 자신을 탓할 수밖에

    그래서 예준은 스스로를 절대 타인과 섞일 수도, 섞여서도 안 되는 사람이라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다.

    비참한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도, 되물려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예준에게 '결혼'이란 떠올리는 것만으로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단어였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될 걸 아셨는지, 나한테는 스스로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셨어. 그러니까 아직도 날 쥐고 흔들 수 있는 거고.”

    그런 가족들에게 질릴 만큼 질렸고, 예준이 원하는 건 할머 니의 소원을 들어주는 동시에 훈탁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에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거였다.

    “약속한 대로 재산 증여만 받으면 곧장 한국 뜰 거야.”

    “너는 너대로 챙길 거 챙겨서 새 인생 살면

    돼.”

    훈탁에게 대가로 약속 받은 돈은 말하자면 독립 자금인 셈이다.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연거푸 술만 마시던 수빈이 흐물흐물 녹아내린 몸을 간신히 테이블에 걸친 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린 2인 1조 강도가 되는 거지? 보니 앤 클라이드처럼. 작정하고 너희 집 털자는 거잖아.”

    들릴 듯 말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예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비유네.”

    예준의 답을 끝으로 침묵 속에 각자 술잔만 비우길 여러 번.

    “지예준.”

    “……지예준.”

    지예준, 지예준, 지예준.

    몇 번을 반복해서 이름만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예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르지만 말고 말을 해.”

    짜증스러운 타박에 수빈이 턱을 괸 채 한숨을 포옥 내쉬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러다 다시 올라오길 반복하고, 다시 또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더니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네가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네가 싫어할까 봐.”

    “함부로 말도 못하겠어.”

    말꼬리가 흐려지더니 그녀는 결국 타앙, 하고 테이블에 고개를 처 박았다.

    “네가 또.”

    “돌 던졌다고 생각할까봐.”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에 예준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위로하고 싶으면 그딴 쓸데없는 동정으로 하지 말고, 그냥 내 제안을 받아들여.”

    그게 서로 깔끔하고 좋잖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예준의 말에 수빈이 치덕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거둬내며 다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너 사실은 나쁜 애 아닌 거 내가 잘 아는데.” 예준이 질색하는 타입이 오지랖인 걸 아는 수빈의 목소리는 한없이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속내가 걸러지지 않고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알긴 뭘 알아. 사람 잘못 봤어.”

    그러 니까 혹시라도 내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수빈은 그런 예준을 가만히 응시하며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너는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싫어?” 푸념을 늘어놓는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예준은 그런 질문 자체가 불쾌한 듯 눈가를 구겼다.

    수빈을 보고 있노라면,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걸, 너는 다 쥐고 사는 것만 같아서 죽도록 미웠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싫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인 건데, 너는……

    “미운 정이고 나발이고 나한테 정붙일 생각하지 마. 나는 깔끔하게 돈만 받고 각자 갈 길 갈 사람이 필요해서 너를 적임자로 택한 거니까.”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정 붙이는 순간 넌 쓸모없어지는 거야.”

    인정머리 없는 단어에 수빈은 다 뭉그러진 발음으로 물었다.

    “내가 쓸모없어지면, 그땐 어쩔 건데? 버릴 거야?”

    괜한 질문을 한다.

    멍청이처럼.

    쓸데없는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말자고, 예준은 스스로를 세뇌했다.

    “굳이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내 대답은 하나야. 쓸모없어진 너?”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당연히 버려.”

    “곁에 둘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예준은 널브러진 수빈의 머리 맡에 오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놓았다.

    “택시 타고 가. 술 깨면 다시 얘기하고.”

    이미 미동도 없을 만큼 잠들어버린 수빈에게 예준이 낮게 속삭였다.

    “네가 흔들리는 거 본 이상, 난 어떻게든 너 흔들 거야.”

    “나한텐 시간이 없고, 너한텐 탈출구가 필요할 테니까.”

    벼랑끝에 서있는 건 나나 너'가 아닌 '우리' 임을 잊지 말라고.

    그는 그렇게 수빈을 남겨둔 채 술값을 계산하고 미련 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스르륵 감겨있던 수빈의 눈꺼풀이 조용히 올라섰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몸을 일으키고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오만 원 짜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쁜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여자를 내팽개치고 가냐?”

    뼛속까지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중얼대던 수빈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이모, 나갑니다.”

    가게를 빠져나온 수빈은 오만 원을 바지주머 니에 구겨 넣은 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택시 타라고 쥐여준 돈까지 챙겨 넣으며 꾸역꾸역 버스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이 차창에 그대로 비추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다음 날. 일을 하면서도 수빈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준 생각뿐이 었다.

    그가 자신에게 던진 말이나,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

    예준이 나타난 이후로 수빈의 관심사는 온통 그와 관련된 일이었다.

    레스토랑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되고, 직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

    룸으로 들어간 수빈은 테이블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연신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진작 헤아려야 했을 숫자들이지만, 막연히 미뤄두었던 것들이다.

    실감도 안 나고,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마주했다고 해서 당장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선택지가 너무 없었다.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사회생활을 한지 햇수로 8년, 정남과 방훈이 분식점을 시작한 지 11 년.

    예준의 빚을 제외하고도 갚아야 할 빚이 남은 상황이었다.

    분식집에서 나오는 수익은 그대로 빛을 갚는데 쓰였고, 수빈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해왔다. 언젠가는 다가올 날을 대비해 예준에게 줄 돈도 꼬박꼬박 모아왔지 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심정으로 8년을 착실하게 모아 겨우 고지가 코앞이었지 만, 상상도 못한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적금을 깨야했다.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즐기고 싶은 거 참고 참아가며 지지리

    궁상처럼 받쳐온 청춘인데, 억 소리 나는 빚이 얼마나 까마득한 액수인지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순간이었다.

    '무이자에 준비할 시간만 10년을 줬어. 그런데도 못 마련한 돈을 무슨 수로?’

    예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가 죽게 생긴 마당에 네 사정 따위 봐줄 의향이 전혀 없다는 말은 그냥 하는 시시한 협박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제대로 꼬집어 상기시켜주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기간을 미룬다고 쳐도 돈을 모두 갚으려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욱 혹독하고 처량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월급 고스란히 바치는 건 고사하고, 투잡, 쓰리잡이라도 뛰어야 할 판이다.

    이러니 결혼 따위는 꿈도 못 꾸는 게 당연하다. 빚은 누구에게 나눠줄 수 있는 짐이 아니었다.

    삶을 이토록 비참하고 괴롭게 만드니까.

    돈 때문에 아등바등 살아도 돈에 팔려가는 결말까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갚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거다.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걸까? 막힐 혼삿길도 없는 내가 너무 자존심 부리고 있는 걸까?

    1 년만 눈 딱 감고, 고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도 있을 텐데. 정남과 방훈이 고생하는 걸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텐데.

    똑똑.

    룸의 문을 두드린 영하가 모습을 나타냈다.

    “수빈 부지배인님. 오픈 준비 시작했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고민에 고민만

    거듭했는데, 씁쓸함이라는 결론만 지은 채 마무리되 었다.

    그날 저녁. 수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금세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막 내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내일이 쉬는 날이니, 내일은모처럼 집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좀 자자고.

    그런 생각을 하며,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던 그叱

    “수빈아,,

    익숙하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목소리.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감각을 곤두세웠다.

    “오랜만이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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