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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9화 (9/63)

9 하'

해명할 틈도 없었다.

수빈은 계춘에게 손이 덥석 잡힌 채 병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순식간에 예준의 여자친구가 되어 병실에 등장한 수빈에게 감당도 안 되는 시선들이 다다닥 꽂혀 들었다.

“할망구! 여기 좀 보소! 아 글从II, 이 참한 처자가 우리 예준이 여자친구라는구먼 !”

참하다는 소리를 처음 들은 수빈은 아이고, 어르신 감사하다고 허리라도 숙일 뻔했지 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예준도 뒤늦게 상황이 파악된 듯, 계춘과 수빈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너무 정신이 없어, 일단 달려오긴 했지만 수빈과도 얘기가 덜 끝난 상태라 예준도 난감했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당장 엎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준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수빈은 그만 누워있던 애자와 눈이 더럭 마주쳐버 리고 말았다.

어찌할 틈도 없이, 애자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왜 이제야 왔어. 어디 얼굴 좀 보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비척이며 몸을 일으키는 모양새가 위태롭기 그지없었匚匕

그저 상반신을 약간 들어 올리 려던 것뿐인데, 가냘픈 어깨가 휘청거리더니 급작스럽게 몸이 침대 밖으로 기울었다.

“어어! 할멈!”

“어르신!”

“할머니!”

놀란 계춘과 수빈, 예준이 동시에 외치며 애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계춘이 가장 뒤쳐졌는데, 의외로 애자를 가장 먼저 부축한 건수빈이었다.

애자가 넘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해버린 것이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빠르게 애자를 부축한 수빈이 그녀를 침대 위로 바로 눕히고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와 손등을 꼭 잡았다.

그런 그녀의 손등 위로 주름진 애자의 손이 겹쳐 올랐다.

뒤늦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어쩔 도리는 없었다.

“아이고오 이렇게 예쁜 처자를 우리 예준이가…… 세상에.”

물기가 가득 어린 애자의 목소리에 수빈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름이 뭔가?”

“신수빈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이름도 예쁘네.”

수빈은 바짝 긴장해있었지만, 우려 아닌 우려와는 달리 애자와 계춘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를 매우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다짜고짜 호구조사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 손을 연신 쓰다듬는 애자의 온기와 다정한 눈빛이 낯설기는 했지만 딱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약간 기분이 이상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친구의 가족들은 자신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몹시도 상처를 주었었다.

그때의 뼈저린 이별은 수빈이 결정적으로 독신주의자가 된 계기이기도 했다.

“우리 예준이는 얼마나 알고 지냈나?” 상념에 빠져있던 수빈에게 애자가 물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거짓을 고할 수는 없어 사실대로 말했지만, 이게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다.

“아이구. 그렇게나 오래.”

연신 아이구만 외치던 애자가 벅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우리 예준이가.” 이렇게 예쁜 아이를, 이렇게 예쁜 아이를 부모님께 헤아릴 수 없이 큰 사랑을 받으며 양지의 꽃처럼 자랐던 그녀지만, 가족이 아닌 남에게 이토록 조건 없는 칭찬과 애정 어린

눈빛을 받아보기는 또 처음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가족들에게 받았던 냉대가 떠올라 더욱 그랬다.

어찌 되었든 애자는 그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듯했다.

침묵이 너무 무거워지기 전, 수빈은 과하지 않은 선에서 애자에게 안부를 묻고 그녀의 쾌유를 빌어주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거리낌 없이 잘 다가가던 성격이기도 했고, 워낙 친화력이 좋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수빈의 뒷모습을 예준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이유에서 그녀가 적임자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순간이었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예준과 수빈은 계춘에게 인사를 하고 나란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원에 올 때와 똑같이 그의 차에 올라 도로를 내달렸지만, 분위기는 사뭇 숙연해져버렸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거워 이것도 너의

빅픽쳐였니?,라고농담을 건네 볼까 했지만, 이 상황에 할 농담은 아닌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예준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앞만 보며 운전했다.

워낙에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얼굴이라 여전히 무뚝뚝해보였지만, 그도 심경이 복잡한 듯 보였다.

그에 수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곱창 먹으러 갈래? 내가 잘 아는 집 있는데.”

* * *

“이모! 저 왔어요!”

수빈은 평소 그녀가 자주 들르는 단골집에 예준을 데리고 갔다.

“어이구, 이 잘생긴 총각은 누구여? 애인 만들었어?”

주인인 정자가 고개를 빼고 예준을 살폈匚卜. 수빈은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애인은 무슨. 내 웬수야, 웬수.”

그녀는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는 곱창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잔을 채운 예준은 건배 따위 생략한 채 먼저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卜. 네가 정말 결혼에 미련이 없다면 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있는지.”

보채지 않는 특유의 냉철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확실히 예준은 할머니의 상태에 예민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건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님 일은 유감이야.”

탄식하던 수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너한테 빌려줬던 돈.”

“내 돈 아니야.”

고등학생이 그런 큰돈이 어디 있었겠느냐는 말에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도 그 돈이 예준의 돈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자연히 그의 부모님이 배후였것!지, 하고 생각했다.

사건의 전말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연히 수빈의 사정을 알게 된 두I, 예준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애자가 유일했다.

'우리 손주, 무슨 걱정 있니?’

'할머니 실은요……

'그래, 이 할미한테 얘기해보거라.’

물론 백 프로 진실을 고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절 도와줬던 친한 친구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요.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의 수빈과 예준은 절대 친한 사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순수하게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 건넨 말은 더욱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방으로 예준을 데리고 들어온 애자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두I, 기꺼이 돈을 마련해주었다.

'네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거라. 이건 우리 예준이 랑 할미랑 둘만 아는 거다.

알았니?’

테이블 위에 잔을 소리 나게 올려놓은 예준이 느리게 시선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돈.”

밀어붙일 타이밍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가족들 몰래 마련해주신 돈이야.”

“뭐?’,

“정확히는 내가 할머 니한테 빌린 거고.”

연민에 호소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빈의 성격상 더할 나위 없는 공격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모든 걸 전해들은 수빈의 얼굴에 균열이 이는 걸 예준은 똑똑히 보았다.

수빈은 얼굴 한 번 뵌 적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은혜를 입은 입장이라 늘 애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돈이 예준의 부모님도 모르게 준비한 사비였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병실에서의 그녀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수빈이 었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곧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자신이 아무리 독신주의자라고 해도 사람을 속이는 일이 내킬 리가 없었다.

수빈이 일단 좀 먹자고 그를 다독였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기만 했다.

“내가 너랑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자고 온 줄 알아?”

“아까는 밥 사준다고 오라며? 원하면 술도 사준다며?”

까칠한 그의 말에도 수빈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난 너랑 얘기할 적당한 자리를 만들려던 것뿐이야. 밥이랑 술은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틀린 거 하나 없는 말인데도 듣는 수빈은 입 안이 썼다.

굳이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는 걸까 생각해봤지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예준이 이렇게 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티는 안 내도 그 역시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황이것!지.

“우리 아버진 한다면 하는 분이야.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서 내쫓는 건 물론, 필요하다면 매장도 마다 안하실 분이고.”

낮게 중얼거리던 그가 스르륵 시선을 올려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기댈 건 너한테 빌려줬던 빚을 돌려받는 방법 밖에 없어.”

“내가 죽게 생긴 마당에 네 처지 따위 봐줄 생각 전혀 없고.”

매서운 협박하는 예준을 수빈은 턱을 괸 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너한테는 할머니가 전부야?”

예상치 못한 발언에 예준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뜻이야?”

“……그냥.”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천천히 털어 넣은 수빈이 테이블 위에 트f 하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왜 네가 어떻게든 너희 아버지한테 재산이든 뭐든 악에 받쳐 빼앗아오려는 것처럼 느껴지지?”

물론 할머 니를 방패삼아 상속을 노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예준에게 할머 니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남처럼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남보다도못한.

“내 기분 탓일까?”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수빈이 어느덧 동이 난 소주병을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어 정자에게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시켰다.

“자, 이제 솔직히 말해봐.”

“네 진짜 꿍꿍이가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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