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
얄밉게 돌아서는 예준의 뒷모습을 보며 콧김을 내뿜던 수빈이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어차피 자주 만나는 친구들도 아니고, 앞으로 경조사 때나 볼까 말까 할 친구들인데 못 볼 꼴 좀 보였으면 어때? 괜찮아 괜찮아.”
이미 엎질러진 물, 손으로 쓸어 모아봤자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앞서가던 예준이 뒤를 돌아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안 오고 뭐해?”
“밥이나 먹자.”
그에 수빈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토했다.
“하!”
밥은 얼어 죽을.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것!냐, 지금?”
수빈이 분한 듯 구둣발을 구르며 하는 말에 예준이 다시 뚜벅뚜벅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신수빈,,
낮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준의 목소리에 수빈이 고개를 들고 그를 쏘아봤다.
“너 되게 일관성 없는 사람인 거 알아?” 무표정한 얼굴에서 툭 떨어진 그 말뜻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수빈이 눈을 찌푸렸다.
“밥은 밥일 뿐이야. 초코우유가 그냥
초코우유인 것처럼.”
“……뭐?”
수빈은 뒤늦게 그가 자신이 어린 시절 그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초코우유가 죄가 있다면 맛있다는 것뿐이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넌 뭐가 그렇게 꼬여서 매사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어린 날의 수빈은 예준에게 분명 그렇게 얘기했었다.
말문이 막힌 수빈은 뒤늦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하……. 그래, 할 말 없다.”
날카롭게 꼬집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못 먹고 나온 밥 같이 좀 먹자는데,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 기분 더러우면 술이라도 한잔해. 얼마든지 사줄 테니까.”
시 니컬하게 말을 마친 그가 곧장 뒤를 돌아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수빈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걸음을 떼지 않았다.
따라오는 게 느껴지지 않자, 그가 반쯤 고개를 돌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빨리 오라니까? 나 바빠.”
순간 그의 뒤로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며 자연 후광을 만들어냈匚匕 부서진 빛의 파편들이 반짝이며 그의 곁을 부유했다.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비주얼 하나는 최고지. 찌푸린 미간마저 섹시하니 말 다했다.
저런 사기캐 같은 비주얼로 최진상에게 보란 듯이 시원하게 복수를 해준 건 분명 통쾌한 일이 었을지 모른다.
예준의 말마따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고맙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는 전생에 홍길동이 었나 보다.
“하아. 그래. 간다, 가.”
하지만 밀려드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막상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 느끼는 게 많아서다.
왜 어린 날의 예준이 누군가의 호의에 마냥 고맙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건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도 한 살씩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가며 자연스레 이해를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상황에, 생각지도 못한이로인하여.
수빈은 마구 도리질을 쳐댔다.
복잡하게 밀려드는 잡념과 최진상 때문에 잡친 기분까지 모두 털어내려는 일련의 몸짓이었다.
“나 비싼 거 먹을 거야! 술도 비싼 거 먹을
거고!”
수빈이 소리치며 예준의 뒤를 따랐다.
물론 밥 한 번 얻어먹는다고 해서, 네가 했던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다짐하며.
최진상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진 나는 문득 어린 날의 너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냥 술이 고팠을뿐이라고.
수빈은 예준을 따라 그의 차가 세워진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잘 빠진 세단의 외관이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파리가 앉아도 미끄러질 것 같이 잘 정돈된 내부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뭐 먹을래.”
시동을 건 예준이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네가골라. 네가 살 거니까.”
뻔뻔한 수빈의 대꾸에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너 고기 좋아하니까고기 먹으러 가, 그럼.”
“그러든가.”
도도하게 대꾸했지 만 가슴이 부풀었다.
당연히 콜이지, 고기는 언제나 옳으니까 소고기 사달라고 해야겠다. 히히.
차가 건물을 빠져나가 막 도로로 진입했을 때, 예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조금 늦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할아버지인 계춘에게서 걸려온 거였다.
“네. 말씀하세요.”
예준의 무미건조한 대꾸에 계춘이 물었다.
[어디냐, 지금!]
“서울이요. 무슨 일이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춘의 쉰 목소리가 다급히 터져 나왔다.
[네 할머니가쓰러지셨다!]
예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유턴을 했다.
“엄마야!”
끼이익! 굉음을 내며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꾼 차 안에서 몸이 휘어진 수빈은 깜짝 놀라 손잡이를 꽉 잡았다.
“야,뭐하는 거야!”
운전 똑바로 안 하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예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일 있어?” 다급히 물었지 만, 그는 대꾸가 없었다.
“어디 가냐니까기”
막무가내로 끌려갈 수는 없어 되물은 말에 그가 낮게 중얼거 렸다.
“할머니가 쓰러지셨어.”
수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애자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 만, 예준이 오래 전 자신에게 도움을 줬을 때 그 배후가 그의 할머니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준과 동행했던 남자가 애자의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준이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도운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직접 애자를 만나 감사하다고 꼭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엔 때가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됐다.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고개를 돌리니 미간을 좁힌 예준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녀석이라 항상 속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는데, 지금 그의 표정은 확실히 온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일단 서두르자!”
늦지 않게 병원에 가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수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그녀의 새된 비명이 까마득한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 * *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애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뒤였다.
그녀의 곁엔 고용인 몇 명과 계춘만이 함께였다. 아버지인 훈탁과 어머니인 소정은 해외 일정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였다.
“정신좀 드세요?”
예준이 침대 맡에 허리를 숙여 애자의 이마를 다정히 짚었다.
“그럼, 그럼. 할미가 우리 손주 괜한
걱정시켰구나.”
애자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바짝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그제야 쿵쿵 뛰며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와닿지도 않던 현실이 부쩍 그림자를 드리우며 뒤를 덮쳐오는 기분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할머니.”
애자의 손을 꼭 잡은 예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시면 안돼요…….”
감정을 숨기느라 급급해 자칫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손자가 아주 오랜만에 제 속내를 드러 낸 순간이 었다.
애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다독였다.
“우리 예준이 두고, 할미가 가긴 어딜 가.
맞서 싸워서 이겨버려야지.”
이깟 병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애자의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있었다.
문 밖에 있던 수빈은 맞잡은 손만 꼼지락거렸다.
하아. 어쩔 거야, 이 분위기…….
엉겁결에 예준을 따라 병원 안까지 오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차에 있던 게 나았을까?
이런 분위기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어르신에게 예전에 빌려주신 돈은 참
감사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흠흠. 주책맞게 자꾸. 나화장실 좀 다녀오겠소.”
애자의 곁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계춘이 병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다 문 앞에 서있던 수빈과 맞닥뜨렸다.
“앗!,,
깜짝 놀란 수빈이 얼른 물러섰고, 계춘은 습윤한 눈가를 훔치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구요?”
“아, 저 그게.”
난감한 상황이 었다.
“우리 할망구 찾아왔는가?”
계춘의 물음에 수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그러니까 저는.
“예준이 친구입니다.”
친구라는 단어에 계춘이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을 뿐인데, 계춘은 수빈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지? 내가 뭐실수했나?
얼굴이 뚫어져버릴 것 같은 시선에, 식은땀이 삐질 솟던 그때.
계춘이 수빈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환히 웃었다.
“우리 예준이 여자친구구먼!”
“네?”
“아이고! 우리 할망구 보러 같이 와준 거 아녀!”
“아니, 어르신. 저 그게 아니라.”
“예준이 랑 같이 있다 전화 받고 급히 왔네 ! 그렇지?”
“아. 그건 맞는데.”
“할망구!”
아, 안 도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