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호4
어째서 예준이 신랑 측 하객으로 있는 걸까.
예상치도 못하게 그를 맞닥뜨린 수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지예준이 확실해. 뭐야, 또 여긴 어떻게 알고 나타났지 ?’
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수빈은 서둘러 친구들을 재촉해 연회장으로 향했다.
“너희는 음식 먼저 담아 오卜. 자리는 내가 잡아놓을게!”
수빈은 거의 빼앗다시피 친구들의 가방이며 외투를 받아들고는 후다닥 홀로 들어 섰다.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자리가 어딜까 찾다가, 후미진 구석 쪽으로 비어있는 4인용 식탁을
발견했다.
'옳지! 저기다!’
바로 옆에 딱 붙어있는 테이블엔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모여 식사가 한창이었다.
수빈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뒤늦게 음식을 담으러 나갔다.
접시에 육회를 마구 쓸어 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식성 좋은 건 여전하네.”
고개를 든 수빈이 건너편에 있는 예준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공중으로 접시를 던질 뻔했다.
“엄마야!”
하지만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떠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낼 뿐이었다. 접시 위에 나란히 담긴 초밥들이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 서있었다.
초밥보고 숨이 막힌 건 처음이 다.
수빈은 주변을 살피며 이를 꽉 물고 복화술 하듯 물었다.
“뭐야, 너. 여긴 왜 나타났어? 또 무슨
꿍꿍이야?”
그녀의 물음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신랑이 우리 회사 부장님 아들이야. 난 회사 식구 일이니 당연히 참석한 것뿐이고.”
그게 가능한 확률이라고 생각해? 변명을 대려면 좀 그럴 듯한 걸 대던가!
수빈의 입매가 실룩였다.
“말이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속고만 살았어?”
“솔직히 말해보卜. 나 쫓아온 거지? 그렇지?”
“네가 날 좇아온 건 아니고?”
“미쳤냐? 내가 왜!”
어이가 없어 언성이 높아진 수빈을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예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접시 위에 덜렁 육회 한 움큼만 올린 채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난관에 부딪치 면 뚫고 나가자는 주의 였지 만, 예준과의 일대일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테이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옆에 있던 어르신들은 오간데 없고, 슈트를 빼입은 남자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은 수빈이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뭐야. 옆에 할머니, 할아버지들 벌써다 드시고 가신 거야?”
“아. 그분들 이 앞 타임 하객들이었나 보上 너 일어나고 곧장 나가던데?”
그녀의 대꾸에 수빈은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살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예감에 눈이 절로 세모꼴이 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때, 대각선에 앉아있던 남자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본부장님 여깁니다!”
아니야, 아니겠지. 왜 이래! 이러지 마라!
자기도 모르게 촉새처럼 중얼대던 수빈이 뒤를 돌기 무섭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더 니, 순식간에 비어있던 옆자리가 채워졌다.
수빈은 눈을 크게 뜬 채 제 옆자리에 안착한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다른 의미로 눈이 커졌다.
“뭐야, 너!”
수빈이 툭 뱉은 말에 예준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글쎄. 내가 잡은 건 아닌데, 마침 여기가 비어있었나 봐.”
두 사람의 대화에 양측의 지인들이 놀라서 수빈과 예준을 번갈아 쳐다봤다.
“수빈아. 아, 아는 분이야?”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상냥하게 물으며 테이블 아래로 그녀의 구두를 툭 걷어찼다.
난폭한 발길질이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 그게……
수빈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예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본부장님, 아시는 분이세요?”
당황하던 수빈과 달리 예준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중고같이 나온 동창입니다.”
그의 소개에 모여 앉은 남녀 무리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고, 예준은 수빈의 동창들을 향해 매너 있는 인사까지 해보였다.
“지예준입니다.”
그의 인사에 수빈의 일행들이 뒤늦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신기하다. 이런데서 수빈이 동창을 다 만나고. 반가워요.”
얼굴이 하나같이 잘 익은 홍시 같았다. 오직 수빈만 덜 익은 땡감마냥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동창들의 관심은 오롯이 예준을 향해있었다.
“이런 보석 같은 동창이 있었으면서 얘는 소개팅 한 번 주선을 안 하고, 호호호.”
분명 아까 저들끼리 예준을 보며 하던 말을 수빈도 다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괘씸하구나! 네년의 주리를 틀어버리겠다!,라고 외칠 것 같았다.
수빈은 그만 눈을 꾹 감아버렸다.
가벼운 소개와 인사가 끝나갈 때였다.
“저 근데, 실례지만 무슨 일 하세요?” 아까 언뜻 예준을 본부장님이라고 부르던 걸 들은 친구 하나가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 중에 가장 어려보이는 데다가 수빈과 동창이면 자기들과도 동갑일 텐데, 30대 초반에 본부장은 얻기 쉬운 직함이 아니었다.
흐르는 귀티나 포스를 보니 재벌 회장 아들이라도 되는 걸까 싶어질 때쯤,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가 예준을 대신해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아, 여행사에서 일합니다. K투어라고.”
“K그룹의 그 K투어요?”
“네. 저희는 전부 본사 직원들이고, 앞에 계신 분은 전략기획본부의 본부장님이세요.” 남자의 소개에 여자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K투어는 대한민국에서 단연 으뜸가는 여행사였다.
예준을 바라보는 동기들의 시선엔 동경을 바탕으로 한 온갖 긍정적인 감정이 넘쳐났다.
그때 였다.
누군가가 수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동기 한 명의 어깨를 턱하고 짚으며 알은체를 해왔다.
“여어. 이게 누구야? 사랑스런 내 동기들 아니야?”
가래가 그르렁그르렁 끓는 목소리가 산통을 깨고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린 동기들이 흠칫 어깨를 떨고는 단박에 표정을 굳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학 시절, 동기들 사이에서도 남녀 불문하고 폭탄 중에 폭탄으로 불리던 최진상이었다.
이름 따라간다더 니, 최진상은 이름값을 아주 제대로 하는 진상 중에 상진상, 술만 먹으면 개진상으로 돌변하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수빈의 얼굴도 덩달아 싸늘해졌다.
“야, 뭐야.저인간이여기 왜 있어?”
“몰라, 나도.”
나란히 앉은 동기들이 서로의 팔꿈치를 툭툭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청첩장을 받아 정식으로 초대되어 온 것 같지는 않고, 알음알음 입수한 소식으로 남자 동기들 사이에 자연스레 끼어 온 듯했다.
그는 그득한 허세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서 과시하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스스로의 외모에 매우 관대해 여기저기 껄떡대기도 많이 껄떡대던 인간이었다.
특히 군대 가기 전 마지막 학기 동안은 수빈에게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들이대던 위인이었다.
때문에 수빈이 그를 좋게 기억할 리가 없었다.
“어? 수빈이도 있었구나! 이야, 반갑다! 더 예뻐졌네?”
그가 멋대로 수빈의 맞은편 동기들 사이에 의자를 끌어다 끼어 앉고는 합석을 했다.
“얼굴이 왜 그러냐? 나 오랜만에 봤는데 안 반가워?”
어색하게 웃고 있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수빈은 시뻘건 날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못마땅한 얼굴로 진상을 쳐 다봤다.
“내가 반가워해야 돼?”
“야아. 왜 그러냐. 간만에 보는데. 우리 수빈이 까칠한 건 여전하구나?”
“내가 왜 니네 수빈이냐?”
예나 지금이나 거침없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 있던 예준이 슬쩍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겨우 잡아 내렸다.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던 진상이 와하하 웃으며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 차고 있던 명품시계를 자연스럽게 과시했다.
“나 요즘 잘나가. 무역회사 다닌다는 소문은 들었나? 요샌 워낙 입소문이 빨라서 말이야. 그나저나 이 나이에 내가 과장을 달았다.”
그는 별 거 아닌 것도 과하게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들먹거리는 진상의 태도를 깔끔히 무시한 수빈이 육회 한 젓가락을 더 입에 넣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기분이 상한 진상이 집요하게 수빈을 물고 늘어졌다.
“내 얘기 들었어? 나 무역업 한다니까?” 무역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재벌 3세라고 해도 싫다는 말을 애써 삼키던 수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들었어. 중국에다가 짝퉁 판다며. 네가 차고 있는 그런 거 파는 거야?”
성격 더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어찌나 주변 사람 까 내리기를 좋아하는지, 대학 시절에도 그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수빈뿐이었다.
망설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은 진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가 떠오른 듯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근데 너그의대 다니던 놈은 어떻게 됐어?”
꺼내선 안 될 얘기가 기필코 나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