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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5화 (5/63)
  • 5 화

    출근길에 오르는 순간까지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그나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수빈은 세일 호텔 안에 있는 고급 중식 레스토랑인 비향(枇香)의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호텔관광과를 다니다가 방학 때 실습을 나온 곳에서 바로 취직이 됐고, 일탈 한 번 없이 쭉 일을 해온 탓에 제법 이른 나이에 부지배인이 되었다.

    오늘은 그녀가 승진한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수빈 부지배인님 저희 오늘 회식하는 거죠?”

    비향의 막내 웨이트리스인 영하가 다가와 애교 있게 물었다.

    “그래, 까짓 거. 하지 뭐.”

    “소고기 먹어도 돼요?”

    “뒈지게 혼나기 전에 돼지로 먹어.”

    “아! 아재개그!”

    영하가 그녀의 아재스러움에 치를 떨자, 수빈이 껄껄 웃었다.

    워낙에 밝고 털털한데다가 주변 사람들까지 살뜰히 챙기는 리더십까지 겸비했으니, 그녀의 주변에 사람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럼 전 오겹살로 먹을래요.”

    “난항정살!”

    “난가브리살!”

    뒤따라 나온 그녀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신이 나서 외쳤다.

    “난 꽃등심!”

    그 와중에 눈치 없이 외치는 인간 하나를 때려주려고 돌아섰는데.

    “야, 이……!”

    과장님이 다.

    호텔 근처에 있던 삼겹살집으로 우르르 몰려간 그들은 한바탕 신나게 먹고 마시며 그날의 회포를 풀고, 미뤄두었던 자축을 했다.

    기분 좋게 회식을 마치고, 심야버스에 오른 그녀가 카드 결제 문자를 확인했다.

    “이번 달도 통장이 아니라, 텅장이구나.” 꾹 참았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영하가 먹고 싶다던 소고기, 과장님이 외치던 꽃등심 같은 걸 얼마든지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빚을 갚는 일 말고는 모든 게 다 사치 일 뿐이었다.

    돈을 벌고 있기는 했지만, 그 돈이 내 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미처럼 일해도 모이기가 무섭게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가니, 돈 버는 재미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신수빈. 배가 불렀네, 아주.”

    그나마 불법 사채업자에게 끌어 쓴 돈을 예준이 갚아주었기에 망정이었다.

    하마터면 차곡차곡 빚 갚는 건 꿈도 못 꿀 뻔했는데.

    사실 예준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빌려준 돈을 제때 받으러 온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돈 갚으라는 말만 했다면 그는 죄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얼토당토않은 얘길 꺼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어찌 됐든 예준의 의도와는 별개로 큰 빚을 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 이렇게 기운이 빠지긴 했다.

    “아, 뭐만 하면 지예준이야!”

    그녀가 작게 투덜거렸다.

    뭘 해도 기승전, 지예준이 될 만큼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은 수빈의 심사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1 년만 고생해주면, 네가 나한테 진 빚. 전부 없던 걸로 해줄게.’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

    '생각 잘해.’

    왜 자꾸 떠올라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

    '네가 결혼 따위 안 해도, 너희 부모님 모시고 평생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는 치러줄 테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웃기고 있어, 진짜. 결혼이 장난이야?” 괘씸한 마음에 그녀가 구시렁댔다.

    하지만 위태롭게 이성을 붙들고 있는 그녀를 끈질기게 회유라도 하려는 듯, 예준의 목소리는 실체도 없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꾹꾹 찌르며 물어왔다.

    '어때?'

    결국 미간을 찌푸린 수빈이 허공에 마구 손을 내저었다.

    “아아! 저리 가! 이 악마 같은 놈!”

    그녀의 외침에 흠칫 놀란 버스 기사가 룸미러를 흘깃거렸다.

    '제주도에 엄마 가게 하나 차려드리고 싶잖아. 그거 운영하면서 죽을 때까지 엄마, 아빠랑 꼭 붙어사는 게 네 소원이잖아.,

    이제 그가 하지 않았던 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달콤하게 속살대는 그것은 예준이었지만, 예준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수빈의 염원이 예준의 허상을 뒤집어쓰고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뒤흔드는 소리 였다.

    '눈 꽉 감고, 조금만 버 텨봐., 상상 속 예준의 허상이.

    '1 년만 버티면.’

    수빈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이며.

    '넌 영원히 자유야.'

    천년 묵은 여우같이 웃어댔다.

    “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 치우라고!”

    지끈거 리는 편두를 짚으며 괴로워하던 수빈의 정신을 깨운 건 휴대폰의 메시지 알람 소리였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대학 동기로부터 온 모바일 청첩장이었다.

    “아, 맞다. 이번 주에 선영이 결혼식

    축의금도 내야하는데.”

    잎고 있었던 경조사였다. 그리고 뒤이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고지서들이 줄줄이 소식을 알리며 도착했다.

    밀려드는 메시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냥 미친척한번 할까.”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수빈은 곧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정신 차리자, 신수빈.”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은 수빈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나긴 하루가 또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 * 1*

    대학 동기의 결혼식은 강남 한복판에 있는 고급 웨딩홀에서 진행됐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던 동기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무척이 나 아름다웠다.

    남편 될 사람이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만 알음알음으로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나이 차가 제법 나 보였다.

    “사람일 한치 앞도모른다더니, 선영이 아주 한순간에 팔자 폈네. 안그래?”

    “내 말이. 그 복학생 선배랑 꽤 오래 만났잖아. 난 당연히 그 선배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웬걸.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결혼 발표를 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간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저 마다 수군덕 거 렸다.

    수빈은 간간히 미소만 지으며 듣기 만 했고, 그러던 중 다른 친구 하나가 말을 이었다.

    “결혼뭐 별거 있냐? 사랑은 연애로 충분하지, 결혼은 현실이야. 선영이 쟤가 현명한 거라니까?”

    그녀의 발언에 여기저기서 공감하는 듯한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맞아. 죽어라 사랑해서 결혼해도 이혼하는 마당어I, 조건이라도좋으면 땡큐 아니냐? 그럼 적어도 돈 때문에 궁상떨지는 않을 거 아니야.”

    “부럽匚匕 예물 장난아니게 받았던데.”

    그때 평소 결혼에 대해 별로 긍정적이지 않던 친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런 결혼이면 나도 해보고 싶다. 1 년만 살다 헤어져도 미련 없게.”

    푸념 섞인 농담에 까르르 웃던 친구들이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다.

    “별말을 다 해요.”

    “왜? 좋은 조건으로 짧고, 굵게 후회 없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헐리웃에서는 이혼해도 친구처럼 잘만 지내던데 뭘. 좋으면 계속 살고, 아니다 싶으면 자기 인생 찾아가는 게 뭐가 나빠?”

    “여기가 헐리웃이야?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인생은 장난이냐? 한 번 하는 거,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구한말 조선시대도 아닌데.”

    분주한 친구들의 수다를 듣는 수빈의 기분도 묘했다.

    그래도 결혼은 조건보다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타인들의 시각은 정말 다양했다.

    시기도, 조건도, 우선순위도.

    저마다 모두 다른 관점으로 결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정작 스스로도 조건 때문에 독신주의자가 됐고, 한때는 모든 걸 다 바쳤던 사랑에 쓰디 쓴 배신도 당해보지 않았는가.

    감정은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하고, 조건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적어도 돈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게 몇몇 동기들의 지론이 었다.

    “어머님 얼굴 피신 거보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사위 잘 얻은 덕분에 뒤늦게 호강하시나 보다.”

    “선영이가 효도한 거지.”

    시시콜콜 이어지는 이야기에 수빈은 신부가 된 동기의 얼굴과 그들의 부모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렇게 행복할까 싶을 만큼, 얼굴이 좋아보였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한때 누구보다 열렬하게 현모양처를 꿈꿨던 적도 있었지만, 왠지 자신의 미래에는 영원히 그려지지 않을 그림 같아서.

    '하여간 오지랖 넓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철판 두꺼운 건 또 어떻고?’

    문득 학창시절 예준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넌 너무 감정적이라탈이야.’

    피식

    웃음이 났다.

    “지는 냉동 인간 주제에.”

    수빈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근데 저기 앉은 남자 말이야. 진짜 잘생기지 않았냐?”

    동기들의 관심은 어느새 신랑 측 하객들 중의 누군가로 바뀌었다.

    “안 그래도 나도 그 말하려고 했는데. 저기 세 번째 테이블에 앉은 남자 말하는 거지? 나도 처음에 봤을 때 연예인인줄 알았잖아. 본 애들은 다들 한마디씩 하더라.”

    “눈 몇 번 마주친 거 같은데 밥 먹을 때 슬쩍 합석해볼까?”

    “아서라. 저 정도 남자가 임자 없겠냐?

    괜찮은 남자들은 다 유부남이거나 게이야.” 친구들의 대화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녀들이 말한 신랑 측 세 번째 테이블. 모여 앉은 하객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수빈이 눈을 깜박이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匚上 요 며칠 예준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인지, 헛것이 다 보였기 때문이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예준과똑 닮은 남자가 근사하게 슈트를 빼입은 채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앗! 이쪽본다!”

    호들갑스러운 동기 한 명의 말마따나, 그가 고개를 돌렸고 수빈은 정확히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남자의 유려한 얼굴 위로 피어났다.

    수빈은 곧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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