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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화 (4/63)
  • 4 하'

    어떻게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지 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지망으로 넣었던 여고에 뚝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고등학교마저 예준과 같은 학교로 진학해야 했다.

    맞아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질 거라는 둥, 다음은 너일까 봐 무섭냐는 둥, 겁을 잔뜩 먹게 했던 말과는 달리 예준은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신수빈. 복장 불량, 지각 벌점 5점:

    왜 나만 잡아!’

    '괘씸죄 추가, 벌점 10점.’

    '야! 이 치사한……!’

    “15 점.,

    선도부와 학교 임원으로서의 위치를 이용한 갑질 아닌 갑질과.

    '저리 비켜. 길 막지 말고.'

    '복도도 넓은데 왜 굳이 벽에 붙어있는 나한테 난리야!’

    '비키라고! 쥐똥만한 게.’

    종종 마주치는 눈빛으로 겁을 주는 정도였다.

    복수라기엔 너무 소소한 것들이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수빈은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그가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는 돌이 자잘한 조약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바윗덩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조마조마한 살얼음판도 매일 걷다보니 무뎌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견딜 만큼 익숙해지고, 이 정도면 제법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w.

    불행은 그런 마음을 비웃기 라도 하듯 불시에 들이닥쳤다.

    수빈이 열아홉 되던 해.

    길거리에서 작은 포장마차를 하며 간신히 생계유지를 하던 엄마와 아빠가 소위 말하는 자릿세 시비가 붙어 깡패들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다.

    아버지인 방훈은 심하게 다쳐 6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질 정도였다.

    내리쬐는 햇살마저 다사로운 봄이었지만, 수빈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계절이었다.

    비참했고, 서러웠고, 두려웠다.

    누구의 도움이라도 절실한 순간 손을 내밀어준 게 예준이었다. 물론 배후에는 애자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정남은 동네에 작은 분식집을 차릴 수 있었고, 방훈은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급하게 끌어 썼던 사채 빚도 막을 수 있었匚卜.

    그 돈이 자그마치 1억이었다.

    처음 예준이 애자의 수행비서와 함께 찾아왔을 때, 정남과 방훈은 딸의 친구라는 명목만으로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는 없다며 곤란해 했다.

    하지만 예준 측에서도 거절을 미리 예상했던 지라 애자의 수행비서가 동행했던 것이었고, 그는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며 수빈의 부모님을 충분히 안심시켰다.

    기한은 10년.

    물론 그 돈은 수빈에게 빌려주는 것이니 그녀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후부터 기한이 시작되어야 한다. 고로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 맞는 첫 5월부터가 시작이라는 것.

    원금은 반드시 받으러 올 테니, 이자까지 주실 생각만큼은 참아달라는 말은 사려 깊다 못해 눈물겨운 배려였다. 사실상 선행이었다.

    거래라는 단어조차 사치인 기히, 아니 그것은 사실 구원에 가까웠다. 예의상 한 번은 거절했지만 속으로는 거두어갈까 내심 겁이 더럭 났을 만큼.

    다행이었고 고마운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쩐지 수빈은 마냥 마음놓을 수만은 없었다.

    예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함부로 누군가를 동정할 녀석이 아니었다. 타인에겐 그런 관심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복수에 동정이 필요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슨 꿍꿍이일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한껏 날을 세우고 있는 건 오직 수빈뿐이었다.

    '이 렇게 도움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정남이 건넨 말에 예준이 미소 지으며 했던 말은 아직도 수빈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아니에요, 어머님. 수빈이도 예전에 제가

    어려웠을 때,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요.’

    '우리 수빈이가?’

    '소풍비를 내준 적이 있어요.’

    그 말에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그때 그 일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래도 이렇게 큰돈을.'

    '액수만 다를 뿐인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고개를 돌린 그가 수빈을 보며 빙긋 웃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수빈을 떠나며

    예준이 말했다.

    '야, 뭘 그런 표정을지어, 친구끼리.'

    '그냥 주는 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지 마.'

    언뜻 보면 미안함과 고마움에 말을 잃은 친구를 다독이는 동시에, 딸의 친구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정남을 위로하려고 건넨 깊은 헤아림으로 보였을 말이었다.

    '떼먹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받아올 테니까, 꼭 갚아라. 알았지?’

    하지 만 수빈은 알았다.

    그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느꼈던 비참함과 서러움을 되돌려주고 있는 동시에 지금 그들의 간극을 똑똑히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어떤 것이든 받은 만큼의 수백, 수천 배로 돌려주는 그의 복수는 스케일부터가 남달랐다.

    내가 준 소풍비 때문에 도둑으로 몰렸을 때, 예준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었을까?

    나는 이런 식으로 벌을 받게 되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마디로 온갖 감정이 마구 뒤엉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덧 졸업식이 되었을 때, 그는 때가 되면 받으러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훌쩍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헤어지고 10년이 흐른 지금, 예준은 예고했던 대로 나타나 빛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물론 빌린 건 응당 갚아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 수중에 있어야 할

    9900만원이, 삼 년 전 방훈의 병원비로 일부 사라졌다는 것.

    또 하나는 바로 당사자인 예준이 10년 전 자신이 진 빚을 돈'이 아닌, ‘결혼'으로 돌려받으려 한다는 거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러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카페가 북적였다.

    소음이 제법 있었지만, 예준이 던진 충격적인 말은 삽시간에 주변의 소음을 모두

    잡아먹은 채 수빈에게 날아들었다.

    “……뭘 하자고?”

    바보 같은 얼굴로 되묻는 말에, 시 니컬한 답변이 돌아왔다.

    “세 번째 얘기하는 거야.”

    “결혼하자고.”

    그의 성격다운 번개 같은 돌직구였다.

    “너 나랑 장난하니, 지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그럼 미쳤어?”

    직방으로 얻어맞은 수빈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를 타박했다.

    “안 미쳤고, 매우진지한 상태야.”

    다짜고짜 빚쟁이마냥 착아온 놈이 빌려준 돈 대신 엉뚱한 걸 요구한다. 내가 아는 '결혼'이라는 말 중에 혹시 다른 뜻을 가진 단어가 있는 걸까?

    수빈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배회하는 사이, 예준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그녀가 알아듣기 쉽게끔 꽤 오랜 시간, 천천히 공들여 설명했다.

    모든 얘기가 끝났지만, 사정을 들었다고 해서 바로 피부로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결혼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수빈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예준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패를 모두 꺼내놓기 시작했다.

    “1 년만 고생해주면, 네가 나한테 진 빚.” a

    “전부 없던 걸로 해줄게.”

    수빈이 반박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는 턱도 없겠지? 네 말처럼 결혼이 장난은 아니 니까.”

    빈정이 확 상한 수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 지금 돈 좀 있다고 사람 가지고 놀아?”

    “감정적으로 굴지 마. 어차피 너도 결혼 생각 없잖아.”

    눈 하나 깜짝 않고, 튀어나온 그의 대꾸에 수빈은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뭐?’,

    “아니고서야 맞선을 왜 열세 번이나 실패했겠어.”

    “부모님도 아셔? 너 독신주의자라는 거.”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예준의 공격에 수빈의 얼굴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내 뒷조사하고 다녔니?”

    “그럼 막무가내로 왔을까?”

    우아하게 커피나 홀짝이며 반박할 건 다 하는 그는 무척이 나 여유 있어 보였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짜고짜 너한테 들이댈 사람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 잠시 잎고 있었다.

    천하의 지예준.

    마음먹은 건 어떻게 해서든 해내고야 말았고, 빚지고는 못 살았으며,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하는 뱀처럼 간교한 인간이라는 걸.

    한마디로 무서운 애였다.

    하지 만 그렇 다고 해서 넋 놓고 팔려갈 수는 없는 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아무리 자기가 막힐 혼삿길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독신주의자라고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건 상식 이하의 제안이었다.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빚은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앞으로는

    착아오지 마.”

    자리에서 일어서는 수빈에게 예준이 물었다.

    “어떻게 갚을 건데?”

    “무이자에 준비할 시간만 10년을 줬어. 그런데도 못 마련한 돈을 무슨 수로?”

    아무렇지도 않게 푹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발언에 수빈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중에 갚을 돈이 없다는 걸 먼저 티낸 건 수빈이었지만, 예준 역시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뭐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녀석이 뒷조사까지 했다고 밝힌 마당에, 돌아가는 사정쯤이야 꿰고 있을것이다.

    수빈이 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계약서에 명시된 날은 다음 달이야.”

    “네 사정 따위 어떠하든, 난무조건 제 날짜에 받을 생각이고.”

    수빈은 거칠게 핸드백을 잡아채 어깨에 멨다.

    자리를 뜨던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예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생각 잘해.”

    “네가 결혼 따위 안 해도, 너희 부모님 모시고 평생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는 치러줄 테니까.”

    그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춘 수빈이 고개를 꺾어 예준을 내려다보았다.

    “엿이나 드세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수빈은 보란 듯이 예준의 우산을 가로채 발을 쾅쾅 구르며 카페를 빠져 나갔다.

    혹시나 자기 우산이니 내놓으라고 하면, 그 우산으로 비오는 날 먼지 나게 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그런 모양 빠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문을 열면서 스치듯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오만할 만큼 꼿꼿하기 만 했다.

    “나쁜 놈.”

    오늘 왜 이렇게 자기한테 욕 못 먹어서 안달인 인간들이 많은지.

    “가다가 빗물에 확 자빠져버려라.”

    벼락이라도 맞아서 정신 번쩍 차리면 더 좋고

    수빈은 우산을 펼쳐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으로 향했다.

    * * *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정남은 수빈을 기다리느라 TV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수빈의 인사에 정남이 벌떡 일어났고, 슬쩍 방문을 연 방훈도 빼꼼 모습을 드러 냈다.

    “우리 딸 왔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엔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씩 섞여있었다.

    “맞선 어떻게 됐니? 그 사람이랑 여태 같이 있다가 들어온 거야?”

    정 남은 빙 둘러대는 법이 없었다.

    직구로 던진 질문만큼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지 만, 아쉽게도 버라이어 티 했던 하루의 일과 중 어떤 것도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저 먼저 잘게요. 얼른 주무세요.”

    온몸으로 묻지 말라는 티를 팍팍 풍기며 수빈은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녀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다.

    행여 부모님의 한숨 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수빈은 얼른 수돗물을 틀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냉수에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고, 일부러 몸이 탱탱 불 때까지 샤워를 마친 후에야 욕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이고, 피곤하다.”

    침대에 그대로 털썩 몸을 맡긴 수빈이 찌뿌듯한 몸을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고 잠을 청해보지만, 어쩐지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동이 터오고 있었다.

    “아, 망했다. 출근해야 하는데.” 결국 밤을 꼴딱 새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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