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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3화 (3/63)

3 화

드디 어 올 게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수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혹시나 해서 먼저 와봤어 . 바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사전 답사라도 온 듯한 그의 말투에 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모님은 잘 계시고?”

“덕분에,,

예준이 물었고, 수빈이 대답했다.

“가게는.”

“그것도 덕분에.”

다정하게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었으나, 대답만큼은 진심이었다.

지긋지긋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바람에 아직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나마 발 뻗고 잘 수 있던 건 십여 년 전, 예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운데 가서 얘기 좀해.”

예준의 말에 수빈은 한숨을 쉬 었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빚진 입장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오늘 기분이 너무 별로거든. 몸도 너무 피곤하고.”

개차반 같은 맞선남한테 잔뜩 데인 마당에 철천지원수 같던 놈까지 상대할 여력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까, 다시 날 잡자.” 느릿하게 휴대폰을 꺼 내드는 수빈의 머 리 위로 무거운 음성이 떨어 졌다.

“너 지금 뭘 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들자, 내리는 빗줄기만큼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준이 보였다.

“내가 너한테 돈 꾸러온 걸로 보여?”

“아니면 빌려준 돈 받겠다고, 네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사람으로 보여.”

예준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그녀에게 똑똑히 상기시켜주려는 듯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나한테 어떤 빛을 졌는지 잎은 모양인데, 살만해졌다고 태도까지 바꾸면 안 되지.”

“살만해졌다고 태도 바꾼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수빈이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돈이 라고는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네가 굳이 오늘이 아니면 안될 이유가 뭐가 있냐고.

여유 있는 네가 여유 없는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연락도 없이 착아온 건 너잖아. 오늘 마주칠 줄도 몰랐다며? 그냥 안 마주친 셈 치면 안

되냐?”

“마주친 이상, 그렇게는 안 도H. 나도 바쁜 사람이라.”

수빈은 그를 노려보다가 못 이긴 척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껏 지예준이 결정한 모든 행동에 시답잖은 이유가 붙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가 바쁘다면 바쁜 거고, 갑자기 찾아온 만큼 용무가 급하다는 뜻이 다.

“그래, 됐다.”

개떡 같은 오늘의 일진 따위, 빚쟁이에게 들이댈 핑곗거리는 아니었다.

“귀신같이 노려볼 건 또 뭐야. 가면 되잖아.

가자고, 가!”

수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이 그녀를 휙 지나쳐 걸었다.

“야! 같이 가야지 !”

인정사정없이 멀어지는 예준의 우산 속으로 수빈이 얼른 제 몸을 구겨 넣으며 비를 피했다.

“비 맞는 사람 빤히 보면서, 혼자만 그렇게 우산 쓰고 가버 리는 건 무슨 경우야? !”

수빈이 타박했지만, 예준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젖은 옷이 달라붙기 라도 할까 봐 질색하는 얼굴이었다.

눈이 세모꼴이 된 수빈이 그를 흘겨보며 꿍얼댔다.

“하여간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해요.”

“너도 얼굴 두꺼운 거 여전하고.”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받아친다.

서로 변한 게 없다면서 타박을 주거 니 받거 니 했지 만, 예나 지금이 나 두 사람이 원수같이 구는 건 누구 하나 더 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똑같았다.

두 사람은 곧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수빈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예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버라이어티 했던 예준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그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이미 어그러진 채였다.

예준은 6학년 때 수빈의 반으로 온 전학생이 었다.

그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어있던 애들이 한 트럭이었다.

그만큼 핫한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에 눈을 반쯤 가리고 있던 아이의 분위기는 한눈에 봐도 음산했고, 퇴폐적이 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 그리고 낡은 청바지에 색 바랜 단화.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것들이었다.

날이 더우면 남방을 벗고, 추우면 입고, 너무 추우면 그 위에 잠바 하나.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라 늘 말끔히 다녔던 수빈에 비해, 예준은 가로등 불빛조차도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반 지하에서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었다.

급식비를 못 내서 운동장에 멍하니 앉아있던 날이 태반이었으니, 옷차림에 신경 쓴다는 거 자체가 그에겐 사치였다.

'마실래?'

큰맘 먹고 내민 초코우유를 예준은 받지도 않고 수빈을 노려봤었다.

'내가 왜.'

'뭘 왜야? 밥 안 먹었잖아. 배고플까 봐 그러지.’

분홍색 망토에 왕방울만한 털이 달린 머리띠.

한눈에 봐도 나는 공주요.’ 하는 수빈의 차림을 못마땅하게 훑던 예준이 벌떡 일어나 대꾸했다.

'못생긴 게 오지랖은.’

'너나 먹어, 그딴거.,

보통 이정도로 날카롭게 반응하면 움찔해서 물러나기 마련인데, 수빈은 꿈쩍도 안했다.

'아유, 그래.넌 잘생겨서 좋것[다.먹기 싫으면 말아라.’

음식 보고 그딴 거라고 지껄이는 놈을 뭐하러 챙겨줬나 싶다.

그때 그냥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욕이나 퍼붓고 신경 꺼버린 채 살았다면, 조금은 관계가 달라졌을까?

사고는 며칠 뒤에 터졌다.

학교에서 봄 소풍으로 놀이동산을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예준만 소풍비를 내지 못했었다.

예준과 한동네에 살던 수빈은 그의 사정을 잘 알았고, 전날은 우연히 그의 집 앞을 지나치다가 보지 말아야 할 장면까지 봐버렸다.

'소풍은 무슨 놈의 소풍! 길바닥에서 얼어 뒈질 뻔한 거 거둬다 키워줬으면 됐지, 어디서 감히 돈을 달라 마라야! 어?!’

동네에서도 유명한 난봉꾼이 었던 그의 외할아버지가 술고래가 돼서 예준을 잡아먹을 듯이 혼내고 있었다.

감옥 같은 쇠창살 너머의 반 지하에서 두드려 맞던 예준과 눈이 마주쳤을 땐 너무 놀라서 그만 찍소리도 못하고 내달려버렸다.

'누구야, 밖에!’

'엄마야!'

도깨비 같은 할아버지의 호통이 뒤따라왔고, 그때의 공포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루 말로 못했다.

다음 날.

예준은 눈 밑에 시퍼런 멍 하나를 달고 등교했다. 그걸 보는 수빈의 마음은 돌덩이라도 얹은 것 마냥 무거워졌었다.

그날 오후, 체육 시간이 채 끝나기 전 핑계를 대고 교실에 가장 먼저 올라온 수빈은 자신의 소풍비가 든 돈 봉투를 들고 예준의 책상 근처를 배회했다.

태평양 같은 오지랖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그냥

잃어 버렸다고 할까?’

부모님께는 사정을 말하면 봐줄 것도 같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 었다.

예준한테 이걸 뭐라고 하면서 전해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분명 꺼지라는 말밖에 안 할 텐데.'

고민하는 사이 종이 쳤고, 친구들이 몰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예준의 책상 서랍 안에 돈 봉투를 던지듯 밀어 넣었다.

일단 던져놓고 본 거다.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돈을 전해줄 지는 수업 시간 동안 생각해볼 요량이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생각도 못한 사고가 터져버린 거다.

'선생님 ! 제 소풍비가 없어졌어요.’

반 친구 중 한 아이가 자기 소풍비가 없어졌다며 엉엉 울었匚卜. 선생님은 곧장 소지품 검사를 했고, 돈 봉투는 보란 듯이 예준의 서랍에서 나왔다.

'지예준. 너, 이거 뭐야.’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네 책상에서 나왔는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호랑이같이 변한 선생님의 모습에 놀란 건 예준이 아니라수빈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어 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무섭고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나, 더 늦기 전에 해명을 해야했다.

수빈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선생님! 그거 제가 넣어놓은 거예요!’

하지만 이유가 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선생님의 말에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예준을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는 듯한 반 아이들 앞에서 고하기엔 예준을 두 번 죽이는 일 같았다.

뒤늦게 교무실에 불려가 상황 설명을 하고, 돈을 잃어버렸다는 아이가 자신의 노트 사이에 끼워진 소풍비를 발견하며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예준과 수빈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진 후였다.

'미안해.'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사과하는 수빈을 예준은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경계심과 분노가 뒤섞인 그 눈빛이 마치 그가 느끼고 있는 모멸감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좋은 뜻으로……

'좋은 뜻?'

말을 자른 예준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자기만족을 너무 거창하게 포장한 건

아니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의 대꾸에 수빈은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입을 열기까지가 꽤나 힘겨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풀리겠어?’

'필요 없으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바짝 다가선 그가 냉기 어린 음성으로 경고했다.

'네가 했던 것처럼, 나도 너한테 똑같이 돌 던질 거야.'

'니가 그 돌에 맞아 죽을 때까지.’

결국 제대로 된 해명조차 못 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눈만 마주쳐도 절로 어깨가 움찔거릴 만큼 예준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가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던 그 무렵.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건 믿기 힘들 만큼 한순간의 일이 었다.

수빈의 아버지인 방훈이 사업 확장을 시도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생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들을 덮쳤다.

집 안에 빨간 딱지가 붙고, 살림은 허망할 정도로 단출해졌다. 결국 하나 남은 집까지 팔고 이사를 가야했다.

그때, 수빈은 운명의 장난도 이런 장난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가까스로 마련한 새 보금자리가 바로 예준이 살던 그 낡은 주택의 옥탑방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예준은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부잣집 사모님이 된 예준의 엄마가 재혼한 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사라진 예준의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진실은 알 길이 없었다.

많은 게 달라졌으나, 수빈은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게 없어 보일 만큼 여전히 밝고 씩씩했다.

반면, 부잣집 도련님이 된 예준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다.

차림새에 가려질 외모는 아니었지만, 옷이 날개라는 말은 정말 맞았다. 말끔한 그의 얼굴은 귀티가 줄줄 흘렀고, 겨울방학이 지나고는 키까지 훌쩍 자라 물오른 미모에 정점을 찍었다.

변한 건 그의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그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어보였다.

그런 예준이 3흐[년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최남진을 제치고 전교회장이 된 일이었다.

얼마 후. 약이 오를 데로 오른 남진이 예준을 착아왔고, 곧 누구 하나 끼 어들지도 못할 정도로 살벌한 싸움이 붙었다.

최남진은 악랄한 놈이었다. 먼저 시비를 걸고, 죽도록 사람을 패도 그는 늘 피해자였고, 무법자였기에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는 놈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결과는 개처럼 얻어맞고,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최남진의 완패였다.

'너 일부러 그런거지?’

태연하게 교무실을 빠져나오는 예준에게 수빈이 물었다.

'뭐가?'

분명 겉모습은 예전과 비할 바 없이 말끔해졌는데, 어쩐지 그가 가진 분위기는 묘하게 더 어두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봤어. 네가 걔만들리게끔 뭐라고 하던 거.자극한거잖아. 먼저 때리게끔.'

최 남진과 관련된 모든 사건. 그건 명백한 복수였다.

하지만 예준은 뭐가 문제냐는 투로, 교복을 툭툭 털어댈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라니?'

눈 하나 깜짝 않고 반문하는 예준의 태도에 외려 당황스러운 건 수빈이 었다.

'똑같이 두 손 두 발 가지고 싸웠는데 뭐 문제 될 거 있어?’

덤 덤하다 못해 나른할 정도로 느린 말투, 새까맣게 가라앉은 짙은 시선이 수빈의 몸을 바짝 조여 왔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 남진 몸에 손가락만 스쳐도 재수 없으면 정학이거나 퇴학이었을 시절과는 달랐다. 핸디캡이 없어진 예준이, 비로소 그와 동등이 맞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용서가 미덕이다. 뭐 그딴 소리는 나중에 네 자식한테나 해. 난 죽을

때까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면서 살

거니까.’

싸늘하게 일갈한 채 멀어지는 예준의 팔을 수빈이 덥석 잡았다.

고개를 삐딱하게 내린 예준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안 놔?'

한 대 맞아야놓을거냐며 그가

겁 박해왔지만, 수빈은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당장 멈춰! 의미 없는 복수는 피를 부를

뿐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보,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 … / 옹알이가 터져 나왔다.

'뭐?'

'복수는…… 피를……

,..?,

'아니야, 아무것도.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

정말이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수빈을 지켜보던 예준은 그녀에게 천천히 허리를 숙여 다가갔다. 그러고는 일부러 더 낮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왜.'

'남일 같지가 않아서, 무서워?’

피식 새어 나오는 숨결이 뜨겁게 귓불에

달았다

O八人 I •

'다음은 너일까 봐?’

소리 없이 웃던 그의 얼굴은 영락없는 포식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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