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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화 (2/63)
  • 2 화

    수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형식적인 인사를 모두 마친 준모는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종갓집 장손입니다.”

    그는 본인이 장손임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곧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의 조건을 바쁘게 열거해댔다.

    “부모님은 꼭 모시고 살 거라, 아내 될 사람은 직장보다는 내조에만 신경 써줄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좋겠다, 라는 말로 끝내긴 했지만 실상 분위기는 통보에 가까웠다.

    수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던 준모는 계속해서 맏이인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인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어필하는 중이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수빈은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신나게 떠들던 준모가 드디어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저, 그런데 수빈 씨 아버님 말인데요.” 물론 반가운 얘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올 게 왔구나 싶었지만, 수빈은 익숙한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몸이 좀 불편하시다고 들었는데…….”

    “네. 3년 전에 차 사고가 좀 크게 났었어요.”

    “아, 그렇군요.”

    쉴 새 없이 떠들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이내 몸을 뒤로 빼고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끼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럼 어머님만 일을 하고 계시겠네요. 듣기로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신다고 하던데,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보통 첫 만남에서부터 저렇게 노골적인 경우는 잘 없다.

    상황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게는 공통 관심사를 찾거나 취미 등을 물으며 거리를 좁혀오기 마련인데,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과는 달리 꼬H나 직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인 듯했다.

    하지 만 수빈은 그런 상대방의 다소 불순한 태도에도 친절한 대꾸를 이었다.

    “그냥 학교 앞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에요. 떡볶이가 주 메뉴고 대부분의 손님이 학생인.”

    물론 건물주는 따로 있으며 세를 내고 장사한다는 다소 상세한 내용까지 덧붙여주었다.

    준모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 였다.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성사된 만남인 만큼 어느 한쪽이 우월한 조건은 아닐 텐데.

    도토리 키 재기지만, 조금 더 우월한 도토리는 제 쪽이라는 걸 상기라도 시키려는 듯한 저 태도도, 다 알면서 굳이 조건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저 속물 같은 근성도.

    이제는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다.

    “저기, 수빈 씨.”

    “네. 말씀하세요.”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준모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친정 부모님 모시고 살 의향이 있으신가요?”

    무슨 의미인지 곧장 파악이 안 된 수빈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준모도 막상 꺼내놓고 민망했는지 제 뒷목을 주물러댔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보다.

    “그런 거라면 사실 좀 곤란해서요.”

    양심 있다는 거 취소.

    네가 뭔데 곤란하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커피 한 모금을 조용히 마셨다.

    준모는 수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얼른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수빈 씨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제 스타일이라 첫눈에 반했을 정도니까요.”

    아무래도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난 거니까, 괜한 걸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건 수빈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일어나기엔 지금이 적기라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어떡하죠? 아시다시피 전 외동이라 형제도 없거든요. 부모님은 쭉 모시고 살 생각이고, 승진한지 얼마 안 돼서 직장도 계속 다닐 생각이에요.”

    준모의 얼굴에 낭패스러운 기색이 스쳤고, 수빈은 깔끔하게 쐐기를 박았다.

    “아쉽지만 저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랄게요,,

    그런데 이 남자.

    “자, 잠깐만요! 수빈 씨 !”

    태도가 급변한다.

    일어서려는 수빈을 다급히 붙잡던 준모가 표정을 일그러뜨리 며 말했다.

    “그렇게 단정만 짓지 마시고 잘

    생각해보세요.”

    아무것도 책잡히지 않고 마무리하는 게 수빈 스스로에게도 가장 이득인 결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의 마지막 발언 정도는 들어줄 요량이었다.

    헌데.

    “말 안해도 아시겠지만, 여자는 시집가면 출가외인입니다. 수빈 씨가 언제까지 부모님 뒤치 다꺼 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 라고요.

    게다가 거동도 불편하시다면서요.”

    선심 쓰듯 내어준 시간이 도를 넘은 무례함으로 돌아왔다.

    “설마 딸 하나 가지신 분들이 노후 준비도 안 해놓으신 건 아니죠?”

    ……이자식 봐라?

    “후우. 내키지는 않지만, 정 원하시면 수빈 씨 부모님을 근처로 모시든가 하는 편의 정도는 제가 고려해볼게요.”

    편의 정도는……?

    “이봐요.”

    강준모의 지능적 패드립과 도끼병이 발현되기 무섭게, 수빈의 내면에서도 용암 같은 분노가 꿀렁이기 시작했다.

    “하아.”

    많은 경고의 의미를 내포한 묵직하고 살벌한 한숨 소리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차게 식혔다.

    “내가 진짜 어지간해서는 좋게, 좋게

    끝내려고 했더니만.”

    서릿발이 휘날리는 듯한 분위기에 움찔한 강준모가 눈을 크게 떴다.

    “저기요, 김준모 씨.”

    “저, 김준모가 아니라…… 강준모입니다.”

    “네가 강준모든, 중절모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요.”

    순식간에 표정과 말투가 변한 수빈이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얻다 대고 패드립을 치세요. 네?”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살벌한 음성에 준모는 반박도 못했다.

    “네 부모 귀한 줄 알면 남의 부모 귀한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세상에 효자가 너 하나야?”

    그의 입이 바보처럼 벌어지는 걸 지켜보던 수빈이 허옇게 눈을 까뒤집더니 물어뜯을 것처 럼 으르렁거 렸다.

    “효도는 셀프로 하라고, 이 쪼다새끼야.”

    뒤이어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 뺨치는 걸쭉한 욕지거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드 올릴 틈도 없이 얻어맞은 고막 폭행에 강준모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있다가,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갔다.

    “지가 뭔데 내 부모를 부양해라, 마라야.

    기가 막혀서 욕이 다 나오네, 진짜.”

    맞선을 이렇게까지 개차반으로 말아먹은 적은 처음이었다. 뒤늦게 밥주걱을 들고 쯫아올 정남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성질머리가 이런 걸 어떡하나.

    차라리 잘됐지 싶다.

    부모님도 양심이 있으실 텐데, 이런 불같은 성정의 딸을 죄 없는 남에게 덥석 감당하라

    안겨주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열세 번째 맞선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어휴, 신수빈. 성질머리 어디 가냐? 이걸 누가 감당해.”

    늘어가는 건 한숨과 셀프디스 뿐이지만, 오늘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

    말 한마디 못하고 헤어졌으면, 딸 가진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 불효녀로 남았을 테니까.

    차곡차곡 쌓이는 맞선 이력 만큼 독신으로 살겠다는 마음만 굳건해져갔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기가 뭐해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니,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진 뒤였다.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던 수빈이 손바닥을 허공에 내밀며 말했다.

    “날씨는 또 왜 이래?”

    피부에 스민 눅눅한 습기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만,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가 바로 와서 타긴 했으나, 타고 가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생각을 안했다.

    수빈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아우! 꿉꿉해!”

    소복하게 쌓여있던 벚꽃 잎이 빗물을 뒤집어쓴 채 죽이 되어 널브러져있었다.

    엉망이 된 건 떨어진 꽃잎인데, 왜 제 기분이 다 꿀꿀한 지 .

    기대했던 영화가 생각보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였을까?

    “……엄마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집이 가까워오니 시름이 늘어간다.

    그때 찰박찰박 빗길을 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지않은 곳에서 아기를 안은 한 여자가 아기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뛰어오고 있었다. 이미 엉망이 된 그녀는 아이가 젖는 게 걱정 됐는지, 가까운 상가 입구를 향해 뛰어 들어갔匚上 하지만 입구가 닫혀있어, 바람까지 동반한 비를 피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수빈은 망설임 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유, 예보에도 없던 비가 퍼붓고 난리네요. 그쵸?”

    “네?”

    흡사 도를 아십 니까를 만난 듯한 얼굴로 아기 엄마가 흠칫 물러섰다.

    하지만 수빈은 여전히 넉살 좋은 말투로 다가가 선뜻 우산을 내밀었다.

    “아기도 있는데, 비 맞지 마시고 이 우산 쓰고 가세요.”

    “아니……:

    “괜찮으니까 쓰세요.”

    미안함에 선뜻 받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수빈은 직접 우산을 쥐여주고, 밤톨같이 삐져나온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빙긋 웃었다.

    “잘가, 애기야.”

    성격상 그냥은 못 지나치는지라, 우산을 잃은 그녀는 비 맞은 생쥐꼴을 면치 못했다.

    사방은 어둑했고, 비 때문에 시야도 흐렸다. 스산한 어깨를 마구 비비며 걸음을 빨리 하던 그때였다.

    “꺄아아악!”

    가로등 불빛 아래 서있던 새까만 인영과 마주친 수빈이 흠칫 놀라 비명을 질렀다.

    검은 슈트에 검은 우산까지 받쳐 든 웬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도깨비?

    수빈은 발끝까지 떨어졌다 올라온 심장을 연신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눈에 봐도 장신이었던 그는 모델 뺨치는 위압감을 뽐내며 저승사자처럼 거침없이 다가왔다. 고인 빗물을 밟는 구두 소리가 수빈의 귓가를 예민하게 파고들었다.

    마침내 우산 아래 가려져있던 얼굴을 드러낸 그가.

    “오랜만이다.”

    나른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저승사자의 정체를 확인한 수빈의 눈이 쏟아질듯 커졌다.

    “……지예준?”

    가로등 불빛을 등진 예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지랖 넓은 건 여전하구나.”

    대꾸도 못하고 서있던 수빈이 뒤늦게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귀신같이 나타나서, 사람은 놀라게 하고 난리야!”

    그녀의 타박에 예준이 피식 웃었다.

    “성질 더러운 것도 여전하고.”

    익숙하게 시비를 거는 모습을 보니 지예준이 확실했다.

    “누가누구보고 성질이 더럽대. 어이가 없네, 진짜.”

    작게 꿍얼거리던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빞 받으러 온 얼굴이다?”

    “맞아’‘

    예준이 곧장 수긍했고, 수빈도 예상했다는 듯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너 나한테 아주 큰 빚졌잖아.받으러 온다고 분명히 말했었고.”

    “그래서?”

    “돌려받으러 왔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으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10년 전에 네가 진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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