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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1화 (1/63)
  • 1 화

    출장에서 이제 막 돌아온 예준에게 아버지인 훈탁의 일방적인 통보가 떨어졌다.

    “이번이 마지막기회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불려올 만큼 훈탁에게는 급한 용건이겠지만, 이유는 뻔했다.

    시원하게 말아먹은 아홉 번째 맞선 결과를 추궁하려거나, 열 번째 맞선을 추진하려는 것이거나.

    “한달 주마.”

    유예기간이 뭘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결혼에 관한 것은 확실했다.

    거기에 예준은 물러서지 않고, 꿋꿋하게 제 입장을 전했다.

    “결혼 생각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벌써 아홉 번째.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한결같은 소신을 밝히는 중이다. 팽팽하게 오가는 신경전 속, 미간을 한껏 좁힌 훈탁이 낮게 중얼거렸다.

    “고얀 놈.”

    그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허락된 여유도 남아있질 않은 상태였다.

    “어머님이 너한테 어떻게 하셨는데……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고작 결혼 때문에 이따위 경우 없는 행동을 해!”

    타악!

    솥뚜껑 같은 손이 소파의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과하게 흥분 상태인 훈탁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웬만해서는 언성도 잘 높이지 않던

    아버지가 왜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나오는 걸까

    예준은 지그시 눈을 내리깐 채 방금 전 그가 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는 곧장 할머 니인 애자를 떠올렸다.

    '우리 손자 장가가는 거 보고 죽는 게 할미 소원이야.'

    그건 그녀가 입 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이 匚卜.

    말만 들었을 때는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사람 같았지 만, 애자는 가끔 두통을 호소하거나부쩍 건망증이 심해진 걸 제외하고는 팔순이 넘도록 남편인 계춘과 등산을 다닐 만큼 정정했다.

    “할머님 때문입니까?”

    “그럼 내가 친자식도 아닌 너한테, 피 한 방울 안 섞인 손주라도 얻으려고 이 고생을 하겠어!”

    사실이라고는 하나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날카로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이 칼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큰 동요는 없었다.

    “길러준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 훈탁의 음성에 노기가 단단히 서렸다.

    “상속은 꿈도 꾸지 마라.”

    하지 만 예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긍의 의미였다.

    그도그럴 것이, 훈탁의 말처럼 친자도 아닌 자신이 재산 같은 건 감히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 달 이후엔 네가 누리고 살던 모든 것들.”

    “전부 거둘 생각이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길 처지라는 것.

    애초에 상속 같은 걸 욕심 낸 적은 없었지 만, 이 정도 무리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다면

    하고 마는 훈탁이 저런 얘기를 했다는 건, 사회적 매장을 뜻하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匚卜.

    그리고 예준이 법정 다툼 따위로 아버지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 예준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초강수까지 두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쉽게 접고 들어갈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확실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건제 신념의 문제입니다.”

    a

    “남은 인생, 원하지도 않는 결혼에 걸고 싶지 않아요.”

    “네 인생 따위 알 게 뭐야!”

    하지만 훈탁은 듣기 싫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길러준 은혜는 어떻게 해서든 갚으라고.

    그게 널 거둬 키운 유일한 이유였다고.

    터져 나오는 대로 말을 던졌다.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데리고 와,,

    낮게 일갈하는 목소리엔 어떠한 반박도 용서치 않겠다는 서슬 퍼런 경고가 묻어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라는 걸 깨달은 예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보겠습니다.”

    문으로 향하는 예준의 뒤통수에 훈탁의 외침이 날아들었다.

    “시간이 없단 말이다!”

    대꾸할 말이 없어,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발길을 붙든 건.

    “……너희 할머니.”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떨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6개월 판정받으셨다. 비통한 전언이었다.

    애자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예준은 서둘러 회사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뇌종양. 그것도 수술이 불가한 뇌간교종이었다.

    애자가 병원이 아닌 집에 있는 이유였다.

    길어야 6개월.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여생은 끝을 정해두지 않은 채, 이 순간에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손자 왔어 ?”

    평소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애자에 비해 다른 식구들은 거의 초상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예준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애자를 바라볼뿐이었다.

    “볕이 좋구나. 오랜만에 할미랑 산책 좀 할까?”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예준의 손을 맞잡은 애자는 손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애자가 건넨 말에는 본인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일절 포함되지 않았다.

    밥은 먹었니?,

    회사 생활은 좀 어떠니.’

    평소와 같이 예준의 안부를 묻는 걸로 시작해서.

    “예준아. 너는 꼭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평생 너 하나만 아껴줄 좋은 아내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대해주면서 그렇게 살아.”

    “우리 손자 장가가는 거 보고 죽는 게, 이 할미소원이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로 끝을 맺었다.

    “할머니.,,

    예준이 나지막이 애자를 불렀匚匕 그녀는 세월이 가득 묻은 온화한 얼굴로 손주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누구에게나 최고의 가치가 되는 건 아니에요 결혼만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 것처럼요.

    ……하려던 말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애자는 입 양아였던 예준에게 유일하게 온정을 베푼 인물이었다.

    혈육은 아니었지 만, 유일하게 믿고 따랐던 할머 니의 시한부 선고는 그에게도 무척 가슴 아픈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간곡한 소원은 곧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결혼에 관한 어떤 답도 내뱉을수 없었다.

    “바람이 차요. 이제 그만들어가요.”

    그저 평소처럼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예준은 다시 훈탁과 마주앉았다.

    훈탁은 며칠 새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부모님께는 끔찍이도 잘하는 효자였으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부유하는 공기가 무거웠고, 먼저 입을 연 건 예준이었다.

    “한 달 안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훈탁의 시선이 빠르게 예준을 향했다.

    “결혼하겠습니다.”

    가감 없는 깔끔한 결론이었다.

    탁했던 훈탁의 눈동자에 번뜩 생기가 돌았다.

    “그게…… 진짜냐?”

    그리고 예준은 곧장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냐, 그게.”

    조급해진 그가 당장이라도 간이고 쓸개고 내어줄 것처럼 되물었지만, 예준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덤덤히 자신이 준비해온 말을 꺼내놓았다.

    “진짜든 가짜든 데리고 오기만 하라는 말 기억하시죠?”

    그건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임과 동시에, 독신으로 살겠다는 본인의 신념에도 박차를 가하는 일이었다.

    예준이 원하는 건 완벽한독립이었고,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계약직 아내,였다.

    * * *

    “아휴! 장 여사님, 진짜! 결혼정보업체에 돈 그만 쏟아부으라니까?”

    한 번 만날 때마다 미팅비가 얼만데, 그럴 돈 있으면 엄마 옷이나 사 입으라고.

    아침부터 승강이가 한창이다.

    “이러다늦겠다! 일단좀 나가자!”

    “나 분명히 말했다, 엄마! 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현관 문턱에 구둣발을 걸친 수빈이 안간힘을 쓰며 버텼고, 정남은 딸아이의 등을 힘껏 떠밀며 그녀를 재촉했다.

    “얼른 나가, 얼른!”

    “이것 보卜, 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라고!”

    끝끝내 대답을 얻어내긴 했지만, 이게 벌써 열세 번째니 딱히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수빈은 못 이기는 척 현관을 빠져나와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갔다.

    “죽어라 떡볶이 팔아서 왜 엄한곳 배만 불려주냐고.”

    결혼 따위 관심 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녀의 부모님은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잎을만하면 이렇게 자리를 주선해 등을 떠밀곤 했다.

    터덜터덜 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에 늘어진 벚나무에서 떨어진 연분홍빛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맞선으로 보내기엔 참 아까운 날씨 였다.

    떠나려는 버스를 겨우 잡아타고 맞선 장소에 도착한 수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맞선남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강준모 씨?”

    안경을 추어올리며 허둥지둥 일어선 남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 신수빈 씨 맞으시죠?”

    “네. 처음 뵙겠습니다.”

    수빈이 웃으며 인사하자, 준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인 듯, 그냥 보기에도 수빈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빈이 예의를 갖춰 행동하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내키지도 않는 맞선의 결과는 늘 같았다.

    “저, 그럼 앉으시죠.”

    “네.”

    “음료는 아메리카노 괜찮으신가요?”

    “네. 따듯한 걸로 부탁드릴게요.”

    적당히 미소를 머금은 대꾸에 준모는 얼른 카운터로 달려가 수빈이 마실 커피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에 두 잔의 커피가 나란히 놓이고.

    “날씨가 참 좋죠?”

    언제나 그렇듯 진부한 날씨 얘기로 맞선은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수빈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파국으로 치닫게 될 맞선의 엔딩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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