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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70화 (70/70)
  • 70화

    1년 후.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반묶음 한 머리를 헝클이던 이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은 이라의 앞으로는 여러 서류가 한 무더기였다.

    그에게 청혼받은 날부터 오늘까지 너무 바빴다. 새로운 집을 꾸미는 것부터 시작해서, 은우의 양육권 문제, 학교 문제, 제이든의 인터뷰 방송에, 혼인신고까지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뭐 다 좋긴 했다. 이건은 정말 친권 포기 각서를 보내줬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더러운 꼴은 좀 볼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지강에게도 연락 한 통 없었다.

    아마 은우가 제이든을 그렇게 쉽게 아빠로 받아들인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지강이 아빠 노릇을 못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법적인 문제라 빨리 해결되진 않았다. 심사도 있었고 여러 법적인 절차 때문에 바쁜 와중에 더 바빴었다.

    제이든의 인터뷰 방송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터졌다. 그리고 그건 그의 활동 시작을 알리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송이 나간 뒤로 그를 캐스팅하기 위한 연락이 비처럼 쏟아져 한동안 제이든은 휴대폰을 꺼버리기까지 했다. 결론은 영화 출연을 다시 하게 됐지만.

    “꽤 많네.”

    막 거실로 나온 제이든은 제 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웃고는 소파에 앉았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온 그는 한 잔을 이라 앞에 내려놨다. 이라는 그 커피를 들고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국제결혼이 이렇게 까다로운 줄 몰랐죠. 바라는 서류가 뭐 그렇게 많을 줄이야.”

    안 그래도 복직한 이라는 미친 듯이 일복이 터져 바쁜 와중에 그런 것들을 해결하느라 몸이 열 개여도 부족했다.

    “은우 체험학습은 내가 선생이랑 통화했어.”

    그가 피식 웃자, 이라는 혼이 나간 얼굴로 소파에 털썩 누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일어나 이라의 다리를 들고 앉아 제 허벅지 위로 가는 두 다리를 올렸다. 큰 손으로 자연스럽게 마사지했다.

    “결혼식에, 당신 스케줄까지……. 쉬는 게 쉬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일했던 이라는 새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 휴가를 냈다. 그때 맞춰 미국에서 그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은우는 학교에 체험학습과 동시에 방학을 연달아 썼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식과 일정이 끝나면, 제이든은 다시 영화계로 복귀한다. 몇 달은 함께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얼마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은우랑 둘이 잘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계약 파기하고 싶은 거 부추기지 마.”

    이라가 큭큭 웃었다. 작가로서의 그는 어디에 있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그는 아니었다. 그 문제로 들어온 캐스팅을 전부 거절하는 제이든 때문에 한 번은 에릭이 한국까지 찾아와 사정했었던 적도 있었다.

    “에릭이 그 영화는 무조건 대박이 날 거라고 했어요.”

    “……은우가 좋아하는 영화래. 그것만 아니었다면 당장 때려치웠을 거야.”

    세계관이 큰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 역할에 그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기는 좋았지만, 사실 오래 쉬기도 했고 본업인 글 쓰는 게 더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이든 본인의 생각이지만.

    그랬던 그가 복귀하게 된 이유는 은우 때문이었다. 그 시리즈물의 영화를 좋아하던 은우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기 때문.

    “젠장, 내 아들만 아니었다면 릭이고 제니고 내 인생에서 지워버렸을 텐데 말이야.”

    이를 가는 그를 보며 이라는 숨죽여 웃었다. 에릭과 제니퍼가 은우에게 얼마나 선물 공세를 했는지 그가 알면 아마 뒤집어지겠지. 이건 영화 개봉할 때까지 비밀로 해야겠다.

    사실 작가로서의 그도 좋았지만, 이라 역시 배우로서 앞으로의 그가 기대됐다. 그를 알고 난 뒤로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차근차근 보며 새삼 또다시 반했다. 그는 늘 새로운 모습으로 이라를 설레게 했다.

    띠띠띠띠, 띠로링-

    현관문이 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 년 새 불쑥 큰 은우가 책가방을 맨 채 들어왔다. 품에는 자기만 한 박스를 들고선.

    “다녀왔습니다! 아빠아, 은우 올라갈게요!”

    씩씩하게 인사하던 은우는 바로 이 층으로 올라가려다가 거실에 있는 이라와 제이든의 모습에 멈칫했다. 제이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히 웃었다.

    “How was your day, son?”

    “I’m good…….”

    전혀 굿하지 않은 얼굴이네. 이 상황이 웃기는지 제이든이 큭큭 웃자, 소파에 누워 있던 이라는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왔어? 근데 그게 뭐야?”

    “……엄마 왜 지금 있어?”

    “뭐?”

    아이가 흠칫 놀라 숨겨지지도 않는 박스를 계단 위로 슬그머니 내려놨다. 이라가 눈썹을 휙 올리자, 제이든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이라의 이마가 빠직 구겨졌다.

    “가져와.”

    단호한 말에 은우가 울상이 돼 제이든을 바라봤다.

    “아빠아.”

    “아빠 부르지 말고, 가져와.”

    은우가 입술을 툭 내민 채 박스를 들고 거실로 왔다. 포장을 보니 게임기였다. 그것도 아주 비싸고, 비슷한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다.

    “있는 걸 왜 또 사?”

    이해가 안 돼 묻자, 은우가 시무룩하게 도움의 눈길을 제이든에게 보냈다. 이라의 매서운 시선이 이번엔 그에게 꽂혔다.

    “자꾸 사주지 말랬죠? 지난주에는 노트북에 그 지난주는 태블릿에! 애초에 컴퓨터도 두 대나 있는 게 말이 돼요?”

    “친구들이 다 있다잖아. 내 아들만 무시당할 순 없지.”

    그의 당당한 말에 이라가 어이가 없었다.

    “저걸 다 가진 애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자꾸 당신이 다 사주니까 애 버릇 나빠지잖아요.”

    “이라, 그 말에는 오해가 있어. 은우는 나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사준 거라고.”

    은우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제도 밀린 적 없고, 나 아빠랑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 진짜야, 엄마!”

    “영어는 당연히 해야지.”

    이라의 말에 제이든이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히가 어디 있어? 아이의 노력을 그렇게 평가하면 안 되지. 은우가 잘한 만큼 난 보답과 칭찬을 해 주는 거야.”

    “퍽이나요. 너무 과하잖아요. 고작 일 년도 안 쓴 휴대폰을 바꾼 것처럼요.”

    “……유행은 늘 한 걸음 앞서지.”

    “둘 다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이라가 씩씩대며 둘을 노려보자, 은우는 슬쩍 제이든 뒤로 가 숨었다. 엄마는 화나면 무서웠다. 하지만 아빠는 늘 제 편이니 엄마에게 함께 혼나 덜 무서웠다.

    “자, 은우. 우리는 이런 걸 예상했어.”

    제이든은 은우를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 상태로 이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늘 혼날 준비가 돼 있지.”

    “응응!”

    억. 뒷목이야……. 당당한 저 부자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출퇴근이 없는 제이든은 은우가 학교에 다녀오면 종일 함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라가 모르는 게임기나 장난감들이 2층에 수북하게 쌓였다.

    “맞다. 아빠, 친구들이 아빠 사인받아달래요.”

    그때 은우가 번뜩 생각난 건지 그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이라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에릭 삼촌 사인도요! 이번에 미국 가면 받을 수 있어요?”

    “그래, 거기 있는 히어로 사인은 은우가 다 받아.”

    어차피 건너건너 다 그의 지인이었다. 그의 허락에 은우는 아싸, 하며 벌떡 일어났다.

    “친구들이랑 전화하고 와도 돼요?”

    “그래, 나이스 타이밍이야.”

    은우가 해맑게 웃으며 상자를 들고 와다다 뛰어갔다.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라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엄마만 보면 좋다고 웃던 내 아들이 일 년 사이 저렇게 클 줄이야.”

    “여전히 당신만 보면 좋아해.”

    “당신을 더 좋아하잖아요.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더 좋냐는 숙제에 아빠라고 썼어요!”

    이라가 고개를 휙 들어 그를 노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씩씩댔다.

    “그런 폭력적인 질문이 어딨어요? 엄마랑 아빠는 다 좋은 거지, 누가 더 좋냐고 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질문이에요.”

    “그래, 그래.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늘 불만이 많은 법이지.”

    “이러기예요? 하!”

    아이가 더 크면 함께 할 시간이 더 없을까 봐 이번에 무리해서 휴가를 낸 거기도 했다. 물론, 이미 은우에게는 제이든의 존재가 커서 이라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듯했지만.

    이라가 투덜거리고, 제이든이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 있을 때 다시 와다다 계단을 내려오는 은우의 소리가 들렸다.

    “아빠! 세후 집에서 레고해도 돼요?!”

    이미 현관까지 뛰쳐나가며 묻는 허락에, 이라가 어이가 없어 웃다가 소리쳤다.

    “이은우! 엄마한테는 이제 묻지도 않아?!”

    “사랑해!”

    달칵, 쿵! 쏜살같이 나가버린 은우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현관 쪽만 바라봤다.

    “은우는 곧 아홉 살이야, 이라.”

    “나한텐 항상 애예요. 내 품에만 있는.”

    “글쎄, 은우는 자유롭게 둬. 대신 날 품에 넣어주면 고맙겠어.”

    “뭐……, 으앗!”

    누워 있던 이라의 몸을 휙 올린 그는 제 허벅지 위로 이라를 앉혔다.

    “당신, 그거 알아?”

    “뭐, 뭘요?”

    단단한 허벅지 옆으로 양다리를 내린 채 앉은 이라가 그를 내려다봤다. 어쩜 날이 가면 갈수록 이 남자는 더 잘생겨지는지. 무르익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루하루 절실히 깨달았다. 꽤 풋풋했던 십 년 전의 그는 어렴풋이 남았을 뿐, 이제는 늘 이렇게 자신만 보면 목을 축이는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은우는 세후 집에 가면 세 시간은 안 와.”

    녹색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아, 내가 좋아하는 눈. 홀린 듯 그의 눈을 바라보던 이라는 손을 들어 날 선 턱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세 시간이면 충분하네요.”

    이라의 아래에 깔린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당신은 아직도 날 잘 몰라.”

    “글쎄요, 언제까지일지. 당신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요?”

    생긋 웃는 도발에 제이든은 매우 재밌다는 듯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세 시간 후에 그 말 후회할걸. 내 밑에서 울고 있을 테니까.”

    미소 짓던 이라가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문이나 잠그고 와요.”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얇고 결 좋은 이라의 약지에는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예쁘게 빛나는 결혼반지가 자리해 있다. 그는 그런 이라의 손가락에 키스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I can’t describe in words how much I love you.”

    “나도요.”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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