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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9화 (69/70)
  • 69화

    “어? 엄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은우가 손가락을 휙 들어 가리켰다. 작은 손가락이 향한 그곳엔 정말 이라가 있었다. 막 입구에서 나오던 이라는 제이든과 은우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송국 주차장에서 이렇게 대놓고 있다고? 그것도 은우를 안고? 드디어 저 남자가 미친 건가. 이라가 화들짝 놀라 둘에게 달려가다시피 향했다.

    “뭐 하는 거예요?”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다행이랄까, 주변에 사람이 보이진 않았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제이든과 그의 넓은 품에 안긴 은우를 바라보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엄마!”

    “은우 왜 자꾸 형한테 안겨 있어? 형 무겁잖아. 당신도 왜 자꾸 버릇되게 애 안아줘요.”

    “엄마, 아니야.”

    은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자, 그보다 더 위에 있던 그의 눈이 가볍게 반달을 그렸다.

    “우선 갈까. 오늘 갈 곳 있어.”

    “어디요?”

    “타 보면 알지.”

    차 바로 앞에 있었으면서 애는 무겁게 왜 안고 있었을까 싶었다. 제이든이 은우를 뒷좌석에 태우는 동안 이라는 조수석에 앉았다. 힐끗 뒤를 돌아보다가 못 보던 물건에 이라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카시트 샀어요?”

    “자주 탈 텐데 필요하잖아.”

    그가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다시 뒤를 힐끔 돌아봤다. 은우는 처음 보는 시트에 신기해했다.

    “……어.”

    그렇긴 한데……. 뭔가 낯설었다. 이 비싼 차에 저런 카시트라니. 얼떨떨한 얼굴로 은우를 보던 이라가 이번에는 다른 걸 발견했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아까부터 해맑게 웃고 있는 은우의 목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은우야, 그게 뭐야?”

    이라가 목걸이를 향해 묻자, 은우는 제 목걸이를 손으로 덥석 잡았다.

    “약속이야!”

    “어?”

    “엄마도 기대해.”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투덜거리는 이라를 제이든이 똑바로 앉히고 자세를 바로 만들었다.

    “저게 뭐예요? 혹시 당신이 사준 거예요? 아니면 사장님?”

    “은우와 나 사이의 약속이야.”

    “근래에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예요?”

    이라가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콱 잡았다.

    “악!”

    꼬집는 힘에 허리를 비튼 그가 놀라서 동그래진 녹색 눈을 깜빡였다. 이라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꾸 그래 봐요, 아주.”

    “이라……. 날 너무 아들 대하듯이 하는 거 아니야?”

    얼빠진 그가 황당하게 묻자, 이라는 코웃음 쳤다.

    “은우보다도 요즘 당신이 더 말을 안 들어요. 방송국에서 그래요. 대놓고 이렇게 있으면 어떡해요?”

    “당신이 임자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알아야지.”

    피식 웃은 그가 차를 출발했다. 방송국을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차가 엄청 막힐 시간은 아니었지만, 곧 교통체증이 밀려올 듯 차가 많아졌다. 그만큼 대중교통 안에 있는 사람의 수도 빽빽해졌다.

    신호에 맞춰 차를 멈춘 그가 바깥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몇 달 전 한국에 왔을 때도 이런 상황에서 은우를 처음 본 거였는데.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언제요?”

    “은우 다쳤을 때. 딱 이렇게 대기 중이었는데 발견한 거거든.”

    이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했다. 아직도 아이의 손에 흉이 있었다.

    “정말 당신 없었으면 그때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된 거야. 이제 그럴 일 안 만들면 돼.”

    “……그래야죠.”

    “생각해 보면 신기해. 그때 어렴풋이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말도 안 돼. 놀라 그를 바라봤다. 그때는 십 년간 만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진짜야.”

    이라의 시선을 느낀 제이든이 피식 웃으며 다시 신호에 맞춰 차를 출발했다.

    “대학생 정도 되는 여자애들만 보면 당신 생각이 났었어. 뭐, 그때랑 별달라진 것도 없지만.”

    “십 년이에요. 앞자리가 바뀌었다고요.”

    “글쎄, 아무도 당신을 서른이라고 보진 않을 텐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은우랑 다니면 누나 소리 듣겠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 적도 몇 번 있었으니까. 끄응, 하며 말을 아끼는 모습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만도 하지.”

    “……근데 어디 가요?”

    “거의 다 왔어.”

    가는 길은 수연의 집으로 가는 길과 비슷했다. 하지만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향한 그는 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택 단지를 지난 곳에는 이라도 알 정도의 유명한 고급 빌라 단지가 나왔다.

    “배우 곽준서 알아요? 여기 그 배우 사는 곳이에요. 아, 그리고 엄청 유명한 아이돌 그룹도 있는…….”

    지나치는 줄 알았던 차가 빌라 단지로 쑥 들어갔다. 심지어 등록된 차인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입구가 열렸다. 놀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자, 제이든은 씩 웃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웃이 되는 건 확실하네.”

    “……설마.”

    집을 구한다더니, 그 집이……. 창밖의 빌라 모습에 놀라 굳었다. 제이든은 내리기 편한 곳에 차를 세웠다. 힐끗 돌아보자, 꾸벅꾸벅 졸던 은우가 비몽사몽 한 얼굴로 눈을 떴다.

    “내릴까?”

    제이든이 먼저 내려 은우를 안았다. 이라가 천천히 내리자, 한 팔로 아이를 안은 그가 다른 팔로 이라의 허리를 감싼 채 익숙한 듯 어디론가 걸었다.

    은우는 흥미진진한 얼굴이었고, 이라는 놀란 듯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둘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는 현관 앞에 멈춰 도어락을 눌렀다.

    “은우 생일이야.”

    비밀번호를 말해준 그가 달칵, 문을 열었다. 가구 하나 없이 아직은 텅 빈 집이지만,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었다. 안으로 들어간 제이든은 거실 중앙에 은우를 조심히 내려놨다.

    “가구는 당신 취향으로 골라. 근처에 은우가 다닐만한 초등학교도 있고, 아무나 들어오지 못해서 안전해. 공항하고는 한 시간, 당신 직장하고는 차로 이십 분 정도 걸려. 차도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사, 출고될 때까지는 한국에 있는 내 차를…….”

    “자, 잠깐만요!”

    다급하게 그의 말을 끊은 이라가 고개를 치켜들어 그를 바라봤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집 안에서 그와 은우까지 함께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낯설었다.

    “마, 말도 안 돼. 여기 지금…….”

    “당신 명의로 샀어. 당신 집이야.”

    그의 말에 은우는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좋은지 방방 뛰었다.

    “와! 와! 짱 넓어요!”

    와다다 거실의 끝과 끝을 뛰던 은우가 해맑은 표정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올라가도 돼요?!”

    “응, 이제 은우 집이니까.”

    “꺄아! 집이다!”

    작은 다리로 열심히 계단을 올라간 은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 상황에 적응을 못 한 건 이라 혼자뿐인 것인지, 미친 듯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가장 중요한 걸 말 안 했어.”

    미소 지었던 그가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라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잖아.”

    그가 미소 지었고, 2층으로 올라갔던 은우가 위에서 제이든과 이라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뭐라고……. 이라의 놀란 시선이 움직이기 전에, 그의 길고 모양 좋은 손이 검은 상자를 탁, 열었다. 그 안에는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사랑해.”

    두근. 두근.

    이라의 시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렇게 직접적인 고백은 처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서 듣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바보같이.

    “우와! 반짝반짝 빛나! 은우 거처럼!”

    위에서 들리는 은우 목소리에 이라가 시선을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제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매우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만지며 이라를 향해 꺄르르 웃었다.

    “아빠의 약속이야!”

    “은우한테 먼저 허락받았지.”

    그의 말에 다시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천천히 그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라의 시선이 다시 반지로 향했다.

    결혼 생활했던 내내 반지 하나 없었다. 바란 적도 없었다. 그냥 남들이 형식적으로라도 하는 모든 것들은 잊고 지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은우가 모처럼 허락해 줬는데 말이야.”

    언뜻 그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자, 그는 긴장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해 줘, 이라.”

    그가 손을 내밀었다. 제 손 위에 손을 얹으라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점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훌쩍이던 이라가 왼손을 올리자, 그는 잠시 그 손을 매만지다가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서늘한 감촉의 반지는 원래부터 그녀의 것인 것처럼 딱 맞았다.

    반지를 끼운 그녀의 손을 그는 놓지 않았다.

    “쭉 바랐어. 이 순간을.”

    “너무 벅차요……. 나는, 내가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제 너무 잘 알잖아요.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는 거.”

    이라의 젖은 눈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서글프게 우는 것 같으면서도 화사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그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이라의 양 볼로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젠 그냥 사랑할게요.”

    “늘 감사해할게. 당신과 은우를 혼자 두지 않을게.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할게.”

    부드럽게 이라의 눈물을 닦은 제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지켜보던 은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은우도 사랑해요!”

    “아빠도, 아빠도 은우 사랑해.”

    아빠라는 호칭에 그가 목이 멘 듯 잠시 멈췄다가 아이를 보며 웃었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라는 둘을 보며 결국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저 다짐했다. 행복한 이 순간을 만들어준 당신에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나에게.

    쭉 내게 다가온 당신을 이제는 그저 사랑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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