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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8화 (68/70)

68화

“불편해?”

훌쩍이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은우의 모습에 제이든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자세를 낮췄다. 아직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벅차오른 감정도 여전했다.

“…….”

대답 없이 작은 손으로 제 목에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은우가 힐끗 제이든을 바라봤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해 봤지만, 이건 그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혹시 뭐가 싫은 걸까. 그가 초조함을 숨기고 은우를 바라보는데, 그때 작은 입이 꾸물거리며 열렸다.

“그러면요.”

“응.”

“……이제 형아, 은우 아빠예요?”

힐끗 그를 올려다본 은우가 말을 이었다.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이런 거였나. 그는 넋이 나간 듯 아이를 바라봤다. 이런 거였을까. 내가 바랐던 것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천천히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엄마랑 결혼해도 될까?”

“이건 엄마 거예요?”

검은색 상자를 가리킨 은우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거야.”

“……아빠, 은우 이거 보물 1호 할게요.”

용기 내 입 밖으로 꺼낸 호칭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말도 안 되지만, 너무 뛰어 갈비뼈를 모조리 부러트리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쿵쿵댔다. 가슴 가득 들어찬 만족감, 황홀감 그리고 이 벅차오름까지.

제가 준 목걸이를 손에 꾹 쥐고 보물 1호로 하겠다는 아이의 모습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 팔을 뻗어 아이를 품 안으로 꽉 안았다. 눈물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은우가 아빠 보물 1호야.”

***

수연은 힐끗 계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제이든과 은우가 올라간 지 꽤 됐는데 소식이 없었다.

“혼자 뭐 해?”

그때 안방에서 나온 로버트는 편한 홈웨어를 입은 채 수연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시차 적응 때문에 조금 고생이었는데, 슬슬 익숙해진 터였다.

“그냥요. 은우랑 노니까 재밌었는데.”

“하하하, 제이디 어릴 땐 당신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로버트가 수연의 볼에 코를 비볐다.

“손주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아. 은우가 이라를 많이 닮았어.”

“……제이든은 결혼 안 할까요?”

여태 고민하고 있던 걸 털어놨다. 수연은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로레인 때도 결혼은 아예 관심 밖이었잖아요. 아이까지 생겼었는데도. 이번에도…….”

“수연. 제이디, 달라지지 않았어?”

로버트의 말에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미소 지은 채 한쪽 팔로 수연의 어깨를 감쌌다.

“로렌하고 있을 때는 많이 못 봤지만, 제이디한테 로렌과 이라는 아주 달라. 함께 있을 때 제이디가 이라만 쳐다보잖아.”

“그건……. 로레인한텐 안 그랬어요?”

“당신은 미국에 잘 안 왔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내가 제이디를 집으로 부른 적이 있었어. 내 아들이라는 기사가 난 뒤로 조금 시끄러웠을 때 말이야. 그때 며칠간 집에 있었는데, 로렌이 불쑥 찾아왔어.”

그것도 해가 질 저녁 무렵이었다. 차를 끌고 온 로레인의 막무가내 방문에 그때 보였던 그의 반응이 여전히 생생했다.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했지만, 에이미에게 방을 내어주라고 한 뒤로 작업에만 정신이 팔렸었지. 다음 날 로렌이 일어났을 땐, 제이디는 이미 스케줄을 나간 뒤였어.”

“그, 그랬다고요?”

“낯설지? 근데 일할 때 제이디는 그래. 그런 제이디가 이라 곁에 있겠다고 스케줄을 미루면서까지 한국에 무리하게 있던 것도, 억지를 쓰면서까지 이라를 미국으로 불렀던 것도. 그리고 이라가 온다고 했을 때 고작 일주일 쓸 가구를 최고급으로 바꾼 것까지 말이야.”

로버트가 씨익 웃었다.

“지금도 봐, 은우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잖아. 당신이 그랬지, 한국에 올 때마다 책상에 앉아서 떠난 아이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었다고. 지금의 제이디가 그래? 여전히 그 시간에 갇혀 아파해?”

수연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래도 로버트보다 자신이 더 제이든을 잘 안다고 생각해 왔었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제이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가 말해주는 제이든의 모습도 놀라웠다.

“제이디는 이겨냈어, 그건 이라와 은우 덕분이지.”

늘 마음이 아팠다.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그가 아프지 않고 웃을 수 있다니.

“저, 사모님.”

그때 고용인이 난감한 얼굴로 다가왔다. 수연과 로버트의 시선이 옮겨가자, 고용인은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 누가 찾아오셨는데 외국 분이셔서…….”

“모르는 사람은 반응해 주지 마세요.”

“그게, 꼭 만나 뵈어야 한다고. 한국말을 되게 잘하시는 분이세요. 로레인 왓슨이라고…….”

고용인의 말에 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로버트 역시 눈썹을 올렸다. 안절부절못하는 고용인의 모습에 로버트가 일어났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로버트.”

“로렌이 여기 근처에서 사진 찍히는 것보단 나아. 그것보다 아직도 한국에 있다니.”

인터뷰 때문에 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안 간 줄은 몰랐다. 제이든의 친구인 에릭은 진즉 떠났는데.

고용인이 서둘러 대문을 열어줬다. 정원을 지나 현관까지 오는 걸 보던 로버트와 수연이 일어나 현관 앞에 섰다. 로레인은 현관 안으로 들어오며 신발장을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로레인, 너…….”

“밥, 수연. 제이디 있죠?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Please.”

수연은 인상을 썼다. 언제 이라가 올지도 모르고, 지금 위에는 제이든과 은우가 함께였다. 괜히 로레인과 만나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이러지 말고 미국으로 돌아가. 그 말 하려고 들어오라고 한 거야.]

로버트의 단호한 말에 로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제발, 제발 그를 만나게 해 주세요. 제대로 대화조차 못 해 봤어요.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는데, 이제 바쁜 건 없는 거잖아요.]

[오, 로렌. 넌 아이가 아니야, 적당이라는 걸 알아야 해.]

[밥, 제발…….]

애원하던 로레인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로버트를 빗겨 지나갔다. 의아함에 로버트와 수연이 고개를 돌리고, 둘 다 놀란 듯 입이 벌어졌다.

계단에서 은우를 품에 안은 채 막 내려오던 제이든이 로레인을 발견했다. 그의 품에 있던 은우는 의아한 얼굴로 로레인을 보며 갸우뚱거렸다.

“너, 너 왜 지금…….”

수연이 당황해 제이든을 보자, 그는 로레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은우랑 같이 이라 데리러 가려고요.”

그대로 은우를 안은 채 저벅저벅 걸어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에 로레인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그가 바라던 가족의 형태. 이 모습은 제가 줄 수 있던 거였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가 저와 그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 아이가 아닌데도 저렇게 다정하게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충격이어서 말이 안 나왔다.

“누구예요?”

그때 은우의 말간 목소리가 들렸다. 로레인이 흠칫 놀랐다. 제이든은 그런 그녀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왜 왔어.]

[……대화를 하려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으로 로레인이 힘없이 대답했다. 아주 오랜만에 그가 말을 걸어줬다. 로버트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차갑게 돌아설 뿐, 로레인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었어.]

[뭐……?]

로레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가 차분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제이든은 잠시 고개를 돌려 은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로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라의 아들이야. 이름은 ‘은우’, 나이는 일곱 살이야.]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아. 그 아이는 나도 제이디도 상관 없……!]

[그리고 이젠 나의 아들이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로레인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넋이 나갔다. 그건 비단 로레인 뿐만이 아니었다. 수연도 로버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제이든을 바라봤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로레인은 초점이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연약한 아이의 목에 걸려 있는 파란 빛이 은은하게 도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아이가 태어나면 블루 사파이어로 목걸이를 선물할 거야.’

‘블루 사파이어? 왜?’

‘고대에는 하늘이 커다란 사파이어고, 지구가 그 안에 박혀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대.’

‘내 아이는, 분명 내 세상일 테니까.’

사파이어 목걸이가 점점 흐릿하게 보였다. 어느새 가득 차오른 눈물 때문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우리가 대화했을 때 있던 아이는 이제 없었다. 그가 바라던 아이는 더는 없었다. 그건 전부 다 나 때문이었다.

힘겹게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인 듯한 다정한 미소가 옅게 걸려 있었다.

[로렌. 나는 이라와 은우를 사랑해.]

[……그러지 마.]

[그리고 더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로레인의 두 눈이 커졌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그를 향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떠난 아이는 놓아줄 거야.]

[…….]

[나는 이라와 은우 덕분에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아픈 눈물이 뚝뚝 흘렀다.

[너도 이제 그 아이들을 놔줘. 흘려보내, 나와 같이.]

[흐으윽, 흐윽.]

[다음번에는 네게 오는 축복을 꼭 지켜줘.]

아팠다. 그를 잃었기 때문에 아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느새 곪은 다른 상처는 보듬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그랬다.

그저 사랑했는데. 미치도록 사랑했을 뿐인데.

[미안해, 제이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꽉 막힌 듯 아픈 가슴 속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여태 곪던 상처가 터져버렸다.

더는 볼 수가 없어 뒤돌아 나왔다. 완전한 가족을 이룬 그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저 누구보다 사랑했던 마음만 품으려고 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내 손으로 버려야 했다.

이것이 진정 내가 지은 죄의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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