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67화 (67/70)

67화

“수고했어요, 제이든.”

촬영이 전부 끝나고서야 이라가 다가왔다. 아까까지 카메라 앞에서는 잘만 웃던 그가 이라가 다가오자 얼굴을 확 굳혔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삐친 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촬영 전부터 쉬는 시간 내내 그는 이라만 보면 그랬다. 솔직히 황당해서 묻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내내 참고 있었는데.

“대체 왜 그래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당신 눈에는 이제 내가 차지도 않나 봐.”

“네?”

“남들은 좋다고 난리던데.”

제이든의 말에 이라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휙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안심했다.

“애도 아니고, 뭐 때문에 그래요?”

“글쎄. 당신 예쁜 건 나만 알면 되지 않나 싶은데.”

“……뭐 잘못 먹었어요?”

“허, 예쁘다는 소리에 반응도 없네. 자기가 예쁜 건 잘 알고 있다 이거지.”

“대체 그게 무슨……!”

칭찬하는 거야, 싸우자는 거야. 황당함에 따지려던 이라의 뒤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피디님!”

제이든의 시선도 이라의 뒤로 다가오는 남자 스태프에게 향했다. 아까 그 남자였다. 이라 역시도 채하를 보고선 제이든에게 작게 속삭였다.

“집 가서 마저 얘기해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곤란하게 하지 마요.”

매섭게 그를 노려본 이라가 휙 몸을 돌려 채하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그는 허,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난 후, 제니퍼와 관계자들이 그에게로 다가가 함께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라는 고개를 돌려 채하를 바라봤다.

“윤진 선배는?”

“먼저 나가셨습니다.”

“나도 가야겠다. 채하 너도 수고했어.”

“아, 아닙니다. 그…… 매우 친하신가 봐요.”

“응?”

무슨 소리지. 의아해서 채하를 보자, 채하는 슬쩍 제이든이 나간 쪽을 바라봤다. 아아. 이십 대 초라 그런지 사회 경험이 꽤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다.

이라와 제이든에 관련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방송국 내 사람 중에는 없을 터였다. 당연히 이라가 따로 말하지도 않았고, 물어봐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뭐.”

“……다들 피디님 부러워하세요.”

“나를?”

왜?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자, 채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제이든 님이 다들 어렵고, 또 막 무섭고 그렇잖아요. 영상에서 볼 때와는 달리 표정도 별로 없으시고.”

“제이든…… 씨가?”

하마터면 친근하게 제이든이? 이러고 되물을 뻔했다. 습관이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채하를 보자, 그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엄청 예쁘신 아나운서분도 오셨었는데 스탭으로 알고 오해하시던데요. 엄청 무안해하시면서 가셨어요. 근데 피디님께는 되게 친절하시니까……. 아, 물론 피디님이 안 예쁘시다는 게 아니에요! 아나운서분보다 얼굴은 피디님이 훨씬, 훨씬 예쁘시고……!”

“어……, 어, 그래. 고, 고마워?”

“아, 아뇨 진짜……. 진짜 피디님이 훨씬 예쁘세요.”

채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라는 눈을 깜빡이며 앞에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제이든만 계속 봐서 채하의 덩치나 키가 그리 크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달랐다. 꽤 키도 컸고, 몸도 다부졌다.

역시 비교 대상이 제이든이니 눈에 차지를 않네. 근데 아까 대체 뭔 소리였던 거야? 생각이 다시 그에게로 흘러, 이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남자가 저를 예쁘다고 칭찬하는데도 딴생각밖에 안 나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채하 너도 잘생겼어.”

“예? 아, 아뇨.”

“진짜야. 그리고 제이든 씨는 외국인이다 보니까 한국말을 잘해도 낯선 사람들이 불편한 것뿐이셔. 엄청 다정하고 부드러운 분이야.”

사실 후자는 거짓말이다. 그와 제대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모두에게 다 친절한 줄 알았다. 근데 열이면 열 전부 다 그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고 하니 의아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제이든은 정말 이라한테만 친절하고 다정했다. 물론 은우도 포함해서.

그래도 뭐, 진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난 윤진 선배한테 가야 해서. 정리 좀 부탁할게.”

“예? 아, 네!”

“수고해.”

생긋 웃은 이라는 서둘러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일하다 보면 채하 같은 남자들이 꽤 있긴 했다. 당시에 이라가 유부녀인 걸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알고도 들이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었지.

“그래도 저 어린애는…….”

홀로 고개를 젓는데 갑자기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애?”

“악!”

깜짝……. 휙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던 건지 입구에선 제이든이 벽에 기대 이라를 보고 있었다.

“뭐, 뭐예요?”

“남자에 애가 어디 있어. 그리고 뭐, 어리지 않으면 어쩔 건데.”

“당신 진짜……!”

휙휙 주변을 둘러본 이라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 대충 알고 있다고 쳐도 이런 건 너무 대놓고잖아. 아무도 없는 건물 뒤로 향한 이라는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진짜 왜 그래요? 촬영 잘해놓고! 무슨 불만이 있는 건데요!”

작은 얼굴에는 잔뜩 인상이 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짙은 화장을 한 이라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 얼굴은 그의 취향이었다. 화장까지 하니까 더 예뻤다. 이러나저러나 예쁜 건 매한가지네.

“당신이 예쁜 게 불만이야.”

“……뭐요?”

“그리고 나만 애가 타는 것도 불만이야.”

아니꼽게 이라를 보던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틴에이저 같은 놈도 당신만 보면 꼴에 남자라고 들이대잖아?”

“그건 오해가 있어요. 아니, 그보다도 당신이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죠! 아나운서도 당신 보러 왔다면서요!”

“그게 뭐. 당신 찾느라 종일 멍청하게 있었는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긴 할 것 같아?”

“네?”

이라가 눈을 깜빡이자, 제이든은 시선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그래, 내가 멍청했어.”

“당신 지금 은우보다도 애 같아요.”

“은우, 그래. 은우.”

홀로 생각에 잠겨버린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날 이렇게 황당하게 만들어 놓고……. 허. 이라가 크게 숨을 뱉어버렸지만, 그는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 중이었다.

***

“형아!”

와락.

집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작은 몸이 뛰어올라 품에 안겼다. 며칠이랬다고 어느새 적응된 느낌에 제이든은 미소 지으며 은우를 쉽게 안았다.

“형아, 형아. 그게 뭐예요?”

은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쇼핑백을 바라봤다. 은우를 안은 상태로 거실로 향한 그가 피식 웃었다.

“이건 형이 준비한 아주 중요한 거야.”

“중요한 거?”

은우가 큰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꼭 이라를 닮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왔니?”

수연은 주방에서 접시를 들고나왔다. 아까부터 달곰한 냄새가 풍기더라니, 쿠키를 구웠는지 먹음직스러운 쿠키들이 접시 위에 잔뜩 있었다.

“은우가 그러던데 네가 쿠키를 좋아한다며?”

수연은 의아한 얼굴로 식탁에 접시를 내려뒀다.

“형아가 엄청 좋아해요. 초코!”

“응, 그래서 잔뜩 했어. 은우랑 같이.”

아……. 시선을 내린 제이든이 잠시 멈칫했다. 너무 기대하는 아이의 표정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미소를 걸쳤다.

“맛있겠다, 은우가 엄청 잘했을 것 같아.”

“진짜요?! 저거 다 형아 먹어요! 엄마는 또 만들어주면 돼요!”

한순간에 들뜬 아이가 그의 품에서 내려가 쿠키 하나를 덥석 잡아 건넸다. 딱 봐도 엄청나게 달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쿠키를 받아먹었다. 와작와작 씹히는 초콜릿은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달았다.

“엄청 맛있는걸.”

“와아! 그럼 또……!”

“근데 은우야, 이거 궁금하지 않아?”

정말 저 쿠키를 다 먹어야 할까 봐 그가 선수 쳤다. 아이의 관심을 돌려버리자, 수연은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웃었다.

“궁금해요!”

“올라가자.”

그가 팔을 뻗자, 아까처럼 품에 은우가 쏙 안겼다.

“은우랑 할 얘기가 있어서 올라가 볼게요.”

의아한 수연을 두고 방으로 올라간 제이든은 침대에 은우를 내렸다.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는 은우는 그가 손에 든 쇼핑백을 궁금해했다.

“은우야.”

그런 은우의 옆에 나란히 앉은 제이든은 쇼핑백 안에서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검은색이었고, 하나는 파란색이었다. 그는 파란색 상자를 탁 열었다.

“와아, 와!”

상자 안에는 파란빛이 은은하게 도는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보석에 은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이든은 목걸이를 빼 은우의 얇은 목에 조심스럽게 채웠다.

“이거 은우 거예요?”

“응.”

“와, 아이템!”

은우가 좋아하는 게임 속 아이템과 비슷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목걸이를 만지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에 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은우야.”

“네!”

씩씩한 대답에 그는 언뜻 긴장한 듯 아이를 바라봤다. 평소에 다정히 웃어주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그의 얼굴에 은우의 얼굴에도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고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은우와 시선을 맞추며 작은 손을 큰 제 손바닥 위로 올려 감쌌다.

“형이 엄마를 너무 좋아해. 그건 은우도 알고 있지?”

은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는 엄마만큼 은우도 좋아해.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해도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나는 은우와 함께하고 싶어. 앞으로 은우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그가 손을 뻗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이건, 내가 은우한테 하는 약속이야.”

“약속이요……?”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

그의 표정에 긴장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은우의 아빠가 되면 안 될까.”

은우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이 약속, 지킬 수 있게 은우가 허락해 주면 좋겠어.”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은우의 코끝이 붉어졌다. 입술을 오므리던 은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잔뜩 차올랐다.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웅!”

너의 세상의 지지대이자, 날개가 되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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