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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6화 (66/70)
  • 66화

    “그럼 은우 봐 줄 사람도 없는 거 아니야?”

    수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은우와 관련된 최근 일을 털어놨다. 어차피 수연은 은우에 대해 대략 알고 있었고, 로버트 역시 함께 들었다.

    일을 털어놓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제이든과 이런 관계가 됐다는 것도 제대로 설명한 적 없는데 대뜸 아이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다 끝나고 나선 수연도 로버트도 당연하다는 듯 은우를 걱정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의 관계에 의구심을 표하지 않았다.

    이라는 힐끗 거실 소파를 바라봤다. 밥 먹은 후에 로버트와 큰 집을 이리저리 뛰어놀던 아이는 쿨쿨 잠에 빠졌다. 낯가림이 심했던 은우였는데 제이든도 그렇고 수연과 로버트까지 첫 만남에 이렇게 마음을 여는 게 놀라웠다.

    “우선은 당분간은…….”

    너무 갑작스럽게 은우를 맡게 돼서 준비된 게 없었다. 다니던 유치원은 그만뒀지만, 사실 반년 후면 은우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그래서 그동안은 유치원을 다니지 말까, 고민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라의 고민을 아는지 제이든은 선뜻 이라가 출근하는 동안 제가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 말했다. 그리고 은우도 그편을 더 바라는 것 같았고. 미안했지만 당장 여건이 되지 않아 거절하지 못했다.

    “이라야. 집 구한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 집이요…….”

    수연의 말에 슬쩍 제이든을 바라봤다. 집 구한다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라의 시선에도 그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래도 호텔보단 은우가 있기에 여기가 낫지 않아? 로버트도 당분간 여기 있을 거고, 우리가 아이 봐 줄 수 있으니까.”

    “그래, 무척이나 은우가 날 좋아하더군.”

    로버트가 씨익 웃으며 수연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난 당분간이 아니라 쭉 있을 예정이야, 수연.”

    다시 정정한 그의 말에 수연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가야죠. 일이 있잖아요.”

    “이제 그만둘 때도 됐지.”

    “그건……! 하여튼, 은우도 우리를 좋아하니까. 이라랑 제이든은 2층에 제이든이 썼던 방 쓰면 되고.”

    수연은 슬쩍 로버트를 흘겨보다가 다시 이라를 설득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이라는 힐끗 제이든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야 너무 감사하지만, 너무 죄송해서요……. 대뜸 이렇게 아이 맡기는 것도 그렇고.”

    “감사할 것도 죄송할 것도 없지. 이제 가족인데.”

    방긋 웃는 수연의 모습에 이라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가족……. 어느새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건가. 이리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던 건가.

    놀란 듯 아무 말도 못 하는 이라를 바라보던 제이든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손을 잡았다.

    “그럼 며칠만 있을게요. 촬영 끝나고 집 구할 때까지만.”

    “너무 빨리 나가면 그건 그것대로 섭섭한데.”

    수연이 투덜거리자, 제이든은 피식 웃으며 로버트를 가리켰다.

    “아버지랑 신혼 즐기셔야죠.”

    “뭐, 뭐?”

    당황한 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버트는 신혼이란 말에 만족한 듯 인자하게 웃었다.

    “내 아들이 뭘 좀 아는군.”

    “저희는 그럼 올라가 볼게요. 이라는 내일 또 출근이라.”

    일어난 그를 따라 이라도 얼떨결에 일어났다. 그는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잠든 은우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앗, 무겁지 않아요? 내가…….”

    “글쎄 은우는 내 품이 더 좋을걸?”

    씩 웃는 제이든이 2층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우왕좌왕하던 이라는 수연과 로버트를 바라보며 허리를 푹 숙였다.

    “가, 감사해요. 저, 그럼 먼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에이, 그렇게 일일이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얼른 올라가서 자야겠다, 내일 출근하려면.”

    “두 분 다 안녕히 주무세요.”

    굿나잇, 하며 손을 흔드는 로버트와 미소 짓는 수연을 향해 여러 번 고개를 꾸벅이던 이라가 뒤늦게 그를 쫓아 올라갔다.

    어느새 침대에 은우를 눕힌 제이든은 아이가 깨지 않게 이불까지 포근하게 덮어줬다. 평소 그가 쓰던 침대 사이즈에 눕히니 은우가 더 작아 보였다.

    “……정말 이래도 돼요?”

    이라가 걱정스럽게 묻자, 잠든 은우를 바라보던 제이든이 시선을 들었다.

    “여기 있는 거?”

    “네, 그리고 은우 봐주시는 것도…….”

    “당신이 못 봐서 그렇지, 오늘 두 분 다 은우한테 눈을 못 떼셨어.”

    그는 미소 지으며 새근새근 잠든 은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무료하던 일상에 은우가 나타난 거야.”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귀했다.

    ***

    “제이든 씨, 촬영 들어가실게요.”

    그의 대기실로 막내 스태프가 들어왔다. 그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촬영 장소로 가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연예인을 보는 게 흔한 방송국에서도 그는 특별 취급이었다. 에릭과 로레인 촬영 때보다도 더 관심들이 높았다.

    꽤 유명하다는 아나운서들까지 그의 대기실 앞으로 기웃거릴 정도였다. 오늘만 해도 팬이라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들만 한 트럭이었다. 종종 남자들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오곤 했고.

    대기실을 벗어난 순간부터 무표정하던 그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녹색 눈동자가 저에게 향하는 시선들을 이리저리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이라를 찾는 눈빛이었다.

    촬영 당일인데 막상 이라는 새벽부터 출근해 없었고, 촬영 직전까지 보이지 않았다. 연락도 해 봤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촬영장으로 들어가자 불쑥 여러 얼굴이 그에게 인사했다. 당연히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고 이라를 찾기 바빴다. 대체 어디 있길래 종일 얼굴 한 번을 안 보러 와.

    “이라 찾아요?”

    그때 윤진이 다가와 피식 웃었다.

    “안 보이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윗분 좀 뵈러 갔죠. 여러모로 이라가 일이 많았잖아요. 이게 특별 편성이라 말이 좀 많기도 했고요. 그만큼 기대도 있지만.”

    “아.”

    “제가 원래는 드라마 쪽에 있다가 이라 덕분에 맡게 된 건데, 사실 거의 메인은 이라예요.”

    윤진이 씩 웃으며 촬영 준비로 분주한 스태프를 바라봤다.

    “모두의 관심을 받는 제이든 씨의 100분짜리 인터뷰가 PD로서 이라의 첫걸음이니까요.”

    “영광이네요.”

    그가 피식 웃자, 윤진은 큭큭 웃었다.

    “지금 이곳에서 제이든 씨와 이라보다 더 핫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특히 이라한테 다들 주목하고 있죠.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때문에 이라가 여러모로 피곤해요.”

    이게 본론이었나. 그가 힐끗 윤진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에도 윤진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고생 많이 했어요. 워낙 힘든 업계라 일은 그렇다 쳐도, 개인적으로 이라가 걸어온 길이 평탄치는 않았죠. 어쩌면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

    “워낙 속 얘기를 잘 안 해요. 힘들어도 꾹 참고, 견디고. 저러다 속 다 버리지,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운데 그만큼 또 강하니까……. 선배로서, 상사로서 그리고 가족처럼 친한 언니로서도 믿고 아끼는 사람이에요.”

    윤진은 슬쩍 입구 쪽을 바라본 뒤에 말을 이었다.

    “제가 제이든 씨를 앞으로 더 볼지, 아니면 오늘 촬영을 마지막으로 보지 않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라 잘 부탁드려요. 언제 또 대화할 수 있을지 몰라서요.”

    이라에게 몇 안 되는 지인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와 이라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는 그런 윤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라를 아끼는 분이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 자주 있겠죠.”

    그의 확신에 찬 눈에 윤진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강한 확신이라니. 슬슬 촬영 시작을 하기 위해 다시 그를 바라보는데,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이 돌아가 있었다.

    의아함에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입구를 보고 있었다. 열린 입구에선 이라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예쁜 모습으로.

    평소에는 기본 피부 화장 정도만 하던 이라가 오늘은 늘 묶던 머리까지 풀고 평소보다 짙은 화장을 했다. 옷도 차려입은 터라 그 모습을 본 제이든은 제가 입을 벌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

    젠장. 저렇게 예쁜데 오늘 내내 얼굴을 안 보여줬다니.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예 몸을 돌렸다. 그래 봤자 고작 몇 시간 안 됐지만, 괜히 속이 뒤틀렸다. 당장 집에 데려가 꼭꼭 숨길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럴 거다.

    “이라…….”

    “한 피디님!”

    그가 부르기도 전에 이라의 앞으로 누군가가 재빠르게 달려갔다. 소품을 든 걸 봐서는 촬영 스태프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스태프가 남자에다가 해맑게 이라를 보고 웃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의 심기가 더 뒤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응, 채하야. 곧 촬영 시작하지?”

    “네, 맞아요. 지금 배우님도 대기 중이시고…….”

    고개를 끄덕인 막내 스태프 채하의 말에 이라는 대기 중이라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벌써 와 있나? 눈으로 그를 찾기 무섭게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이글거리는 녹색 눈동자에 당황했다. 왜 저렇게 노려보고 있지?

    “근데 집필 책을 저희가 소품으로 몇 권 놓긴 했는데 위치가…….”

    채하의 말에 이라는 당황함을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 어.”

    다시 남자 스태프에게 시선을 돌려버린 이라의 모습에 제이든의 미간이 휙 구겨졌다.

    “허.”

    나름 촬영이라고 그 역시 꾸몄다. 근데 잠깐 쳐다본 게 다야? 그의 심기가 확 불편해진 게 눈에 다 보일 정도라, 윤진은 눈앞에 놓인 상황을 보고는 웃음을 참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지금 질투하는 건가? 저 제이든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윤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아, 재밌다. 둘 다 얼굴이 재밌어서 그런가.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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