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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5화 (65/70)
  • 65화

    -뭐?!

    수화기 너머로 소리친 수연의 목소리 때문에 제이든은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한쪽 눈을 찡그린 그의 모습을 보던 은우가 웃기는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은우를 마주 보며 피식 웃은 제이든은 다시 휴대폰을 고쳐잡았다.

    “그래서 집에는 못 갈 것 같다고요.”

    -그게 문제니? 아이까지 있는데 호텔이라니! 요즘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 어린애가 호텔에 있으면 얼마나 불편해?

    예상외의 말에 의아했다. 수연은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높였다.

    -진작 말을 해 줬어야지. 이라랑 같이 사는 것도 몰랐네.

    “……아.”

    -미역국도 이라 생일이어서 해 달랬던 거라니. 그런 줄 알았으면 집으로 불러서 생일상이라도 차려줬을 텐데.

    그러고 보니까 여태 수연에게 한마디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옮겨 은우를 바라봤다. 아침에 사 온 게임기에 정신이 팔린 은우는 해맑게 웃으며 작은 손으로 와다다 두드리고 있었다.

    -너는 로레인 때도 그렇고 말이야. 엄마한테 얘기 좀 해 주면 덧나니?

    그때도 그랬나.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로레인 하고 동거를 알렸을 때, 말하는 제이든도 듣는 로버트도 덤덤했으나 수연만은 펄쩍 뛰었었다.

    “허락 구해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늘 수연과는 문화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그 자신이 한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었나.

    “죄송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이라랑은 그럴 것 같았지만. 아무튼 집으로 들어와.

    “네?”

    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무슨 소린지 몰라 되물었으나, 수연은 당연한 듯 말했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왜 호텔에 있어? 이라랑 아이 데리고 당분간 엄마 집에 있으면 되지.

    “……굳이요?”

    -굳, 굳이라니. 아들, 섭섭하게 그럴 거야? 안 그래도 이라한테 연락하고 싶은 거 꾹 참고 있었어. 일 잘 풀린 것 같아서 축하해 주고 싶었건만.

    “꽤 바빠요.”

    일요일인데도 이라는 출근했다. 덕분에 은우와 둘이 있어 꽤 즐겁게 지내는 중이었지만. 출근하기 전까지 미안하고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던 이라가 생각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바쁘면 더 잘 됐지. 곧 너 촬영도 한다며? 둘 다 바빠질 거 아니야. 그럼 아이는 누가 봐?

    ‘그 유치원은 관둘 거예요.’

    어젯밤 잠들기 전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하던 이라의 말이 떠올랐다. 이라가 그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은우도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형아, 형아. 이거 깨줘요.”

    그때 불쑥 은우가 게임기를 내밀었다. 하고 있던 게임이 어려운지 아이의 볼이 빵빵해졌다. 괜히 손으로 쿡 찔러보고 싶은 마음을 참은 제이든은 휴대폰을 머리와 어깨 사이에 끼운 뒤 게임기를 받았다.

    “저 꽤 바빠요. 보스를 처치해야 해서.”

    -뭐, 뭐라고? 뭘 해?

    “방금 미션을 받았거든요.”

    제이든이 씩 웃으며 은우를 바라보자, 은우는 그의 말이 재밌는지 꺄르르 넘어갔다.

    -어머, 아이 웃는 소리가 다 들리네. 내가 기분이 다 좋다.

    “아버지 오신다는 건 알고 있을게요. 이만 끊…….”

    -엄마 집으로 오라니까? 나도 보고 싶어, 은우!

    수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는지, 은우는 제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그런 은우를 힐끗 보던 제이든은 흠, 하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건 이라랑 상의해 볼게요. 대신…….”

    ***

    “저녁이요? 그래서 지금 은우 사장님 댁에 있는 거예요?”

    “응, 꽤 잘 놀아.”

    이라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퇴근하고 데리러 온다길래 은우도 함께 올 줄 알았는데, 은우는 현재 다른 곳에 있었다.

    “너무 민폐잖아요. 점심도 거기서 먹었으면서 저녁까지…….”

    “우리가 들어오길 바라시더라. 집 구할 때까지.”

    “집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놀란 이라를 힐끗 보던 제이든은 피식 웃었다. 아, 이라한테도 말을 안 했었나.

    “내가 같이 살자고 했는데 호텔에만 있을 줄 알았어?”

    “그럼요?”

    “날 뭐로 보고…….”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에 오히려 더 황당했다. 그는 핸들을 돌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애초에 한 달 이상 머무를 계획도 없었고, 은우가 함께라면 그 시기를 더 빨리 당겨야지.”

    “……집을 보고 있었어요?”

    생각도 못 했다. 물론 호텔에만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집이라니. 이건 마치 꼭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라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자, 힐끗 그녀를 본 그는 다시 정면을 주시한 채 말했다.

    “급하게 알아보느라 취향은 고려하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원하는 취향이 있다면 말해 봐. 맞출게.”

    “……한국에서요?”

    이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

    “당신 계속 한국에 있어도 돼요?”

    “이제야 나와 그리는 미래를 말하는군.”

    그가 피식 웃었다. 이라는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내가 여태 말한 적이 없었나?

    제이든은 거의 다 온 듯 속도를 늦추며 대답했다.

    “물론 한국에만 있을 순 없어. 하지만 당신한테 미국에 가자고 강요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날 위해 가끔 오가 줄 순 있지?”

    “오가다뇨……? 우리 떨어져서 살아요?”

    이라의 눈이 커졌다. 그건 정말 예상하지 않았던 건데. 함께 살자 했다고 해도 그때는 그렇게 깊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이라니, 너무 멀잖아.

    놀란 듯한 말에 그는 차고에 부드럽게 차를 주차하고는 황당하게 웃었다.

    “떨어져서 산다니, 내 계획에 그런 건 없어.”

    아, 그건 아니었나.

    “계획은 있고요?”

    “이봐, 이라.”

    제이든은 제 눈썹을 찌푸리며 이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훅 가까워진 얼굴에 슬쩍 얼굴을 뒤로 뺀 이라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당신이 계획 없는 사람이란 말은 아니고요.”

    “수상해.”

    “아니라니까요.”

    “지켜볼 거야.”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괜히 눈을 피하는데 달칵,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그가 피식 웃으며 이라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버지도 오셨어. 두 시간 전에.”

    “정말요? 그럼 지금…….”

    은우가 수연과 로버트와 함께 있다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조합에 당황스러웠다.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으, 은우가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죠?”

    “아이인데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요. 아, 참. 오늘 둘이서 잘 지냈어요? 은우가 막 칭얼거리거나…….”

    “이라.”

    제이든이 손을 뻗어 이라의 허리를 감쌌다.

    “은우는 생각보다 당차고 씩씩한 어린이야. 무려 오늘은 보스를 처치했다고.”

    “……네?”

    “상당히 어려운 레벨이었어. 습득력이 그렇게 좋다니, 은우는 천재가 아닐까 싶어.”

    갑자기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한 얼굴로 그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은우가 나왔다. 아주, 아주 높은 위치에서.

    “엄마!”

    “헉.”

    해맑은 은우를 올려다보기도 전에 이라는 손으로 제 입을 텁 가렸다. 문을 열고 나온 건 로버트였다. 고로 은우는 로버트의 목말을 탄 상태였다.

    “꺄아아! 엄마랑 형아예요!”

    “이런 이런! 아무나 들일 수는 없지!”

    로버트……? 갑자기 시작된 상황극에 이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돌려 제이든을 바라보자, 그는 짧은 그사이 익숙해졌는지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해보시죠.”

    “으하하하! 이곳은 괴물들이 잔뜩 있는 곳이다! 형아랑 엄마는 은우한테 저녁 괴물 이름을 말해라!”

    저녁 괴물 이름……? 이라가 얼빠진 얼굴로 우뚝 서 있자, 제이든은 씨익 웃으며 은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은우는 로버트의 위에서 상체를 낮추며 그에게 귀를 내어줬다.

    “저녁 괴물의 이름은, 불고기야.”

    “우와! 형아 정답! 다음 엄마!”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은우의 모습에 이라는 로버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은우가 이렇게까지 해맑게 웃는 걸 본 게 언제였지. 놀란 이라가 더듬더듬 아이의 놀이에 맞추기 위해 대답했다.

    “부, 불고기?”

    “아니야! 땡, 엄마는 다른 걸 말해야 해! 힌트를 주지!”

    “으, 응.”

    “생일날 먹는 거야!”

    눈을 깜빡이던 이라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미역국?”

    “정답! 정답! 자, 이제 다들 용감한 전사야! 엄마랑 형아가 맞췄어요!”

    은우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하자, 로버트는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일부러 쿵쿵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이제 괴물은 없어졌다!”

    “없어졌다!”

    꺄르르 웃으며 소파로 내려온 은우가 로버트와 함께 방방거렸다. 현관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오던 이라가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경제 신문이나 방송, 미국에서 봤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엄격한 분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은우와 있는 로버트는 정말로 다정한 할아버지 같았다.

    “이라 왔구나?”

    “아, 사장님.”

    주방에 있던 수연이 나오며 활짝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손 씻고 와, 밥 먹자.”

    “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제이든과 함께 손을 씻고 나오자, 식탁에는 이미 로버트와 은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은우는 포도 주스랑 사과주스 중에 뭐가 좋아?”

    “포도요! 포도 주스!”

    다정하게 미소 짓는 수연의 질문에 은우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일하는 가정부가 은우의 앞에 포도 주스를 놓아주고, 수연은 이라와 제이든을 향해 식탁을 가리켰다.

    “어서 앉아. 퇴근하고 피곤하겠다.”

    “아, 아뇨…….”

    자리에 앉으면서 이라는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음식들을 바라봤다. 불고기와 미역국을 포함해 평소 보기 힘든 한식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놀란 이라의 모습을 보던 수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생일이었다며. 알았으면 미역국만 해서 보낼 게 아니라 밥을 차려줬지 싶어서.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래, 나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사 오는 건데 말이야. 축하해.”

    로버트까지 늦은 생일을 축하해 줬다. 믿을 수 없는 벅찬 상황에 이라는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다가 제 옆에 앉은 제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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