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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4화 (64/70)
  • 64화

    순간 머리가 멍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손목에 가해지는 힘과 분노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현실을 다시 깨우쳤다.

    “……너 내가 쉽니?”

    개새끼. 붙잡힌 손을 벌레라도 털어내는 듯 강하게 쳐냈다.

    타악-

    “제정신이면 네가 이렇게 쉽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없지.”

    “너도 이혼 원한 거 아니었잖아!”

    “수십, 수백 번은 더 원했어!”

    아파트 입구가 이라의 목소리로 울렸다. 해가 진 터라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이쪽을 힐끗거렸다. 근데 이제 그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만 안 만났어도 나 이따위로 안 살았어! 근데 내가 이혼을 안 원해?! 병신도 아니고 그걸 몰라? 은우 때문이잖아! 은우 아빠 없는 애 만들기 싫어서, 흠집 있는 애 만들기 싫어서!”

    “……하. 뭐, 그래서 새 아빠라도 찾아주겠다는 거냐?”

    지강의 눈이 아니꼬운 시선을 담고 제이든을 바라봤다. 어느새 은우를 품에 안은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배알이 뒤틀렸다.

    “정신 차려 한이라. 저 잘나디잘난 남자가 남의 애 데리고 살아줄 것 같아? 제 새끼도 아닌데 언제까지 저렇게 품에 안아줄 줄 알고?”

    지강이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비웃었다.

    “아니면 너 은우 버리고 저 남자한테 눈멀어서 살라고?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은데?! 내가 은우 아빠고! 내 아이 낳은 게 너야, 한이라!”

    짜악-

    지강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너무 힘을 줘 두 눈이 충혈될 정도로 아팠다. 그럼에도 이라는 매섭게 지강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아.”

    손을 올려 입매를 가렸다. 너무 화가 나 손이 덜덜 떨렸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은우를 바라봤다.

    “…….”

    언제부터인지 은우는 제이든의 넓은 품에 안겨 그의 손에 의해 귀도 눈도 가려져 있었다. 이라가 휙 고개를 돌리며 쓰러질 것 같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지강을 노려봤다.

    손톱에 긁힌 건지 맞은 부위에서는 붉은 선혈이 보였다. 이라가 이를 악물고 노려봤지만, 지강은 여전히 삐뚤어진 웃음으로 이라와 제이든을 바라봤다.

    “남자라곤 나 하나뿐이던 한이라가 많이 변했네.”

    “글쎄.”

    이라가 움찔 놀랐다. 여태 가만히 있던 제이든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품에 은우를 안은 채 피식 웃은 그는 지강을 내려다봤다.

    “이라의 처음은 다 나였던 걸로 기억하거든.”

    “……뭐?”

    “인생에 루저 하나를 지운다면, 이라에게 남자는 나 하나뿐이지. 전에도, 앞으로도 쭉.”

    제이든은 막고 있던 은우의 귀를 큰 손으로 덮은 채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아이한테 정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더더욱 이라가 너 따위한테 볼일은 없을 거야.”

    “씨발, 지금, 지금 무슨!”

    “둘 다 내가 데리고 살 거라는 말이야.”

    “……뭐?”

    얼빠진 지강의 말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잘난 건 너도 잘 알고 있는 듯하고.”

    그는 노골적으로 지강을 비웃었다. 그에겐 자존심만 남은 남자의 최후를 박살 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네가 주는 삶보다는 월등히 나은 삶을 살게 할 거니까. 이라도, 은우도.”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이라고!”

    “언제까지 당신 아들일지 모르는 일이지.”

    “정은우!”

    지강이 악을 쓰며 은우를 불렀다. 귀를 막았어도 들리는 큰 소리에 은우가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여유로웠던 제이든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애한테 소리치지 마.”

    이라가 은우를 보지 못하게 지강을 막으며 노려봤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지강이 다시 입을 열던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이건이었다. 집에 있다가 나온 건지 편한 복장의 이건과 그 뒤로 미란이 함께 있었다. 나오던 이건은 지강과 이라, 그리고 제이든과 그의 품에 안긴 은우를 보며 멈칫했다.

    “왜 애 안 데리고 오나 했더니…… 지금 이게 무슨.”

    미란 역시 마주 보는 구도에 황당한지 놀라 다가오다가 지강을 보며 굳었다.

    “너, 너 맞았니?!”

    빽 소리치며 미란이 지강의 얼굴을 잡았다. 붉게 자국난 걸로도 모자라 피까지 났다. 미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라를 노려봤다.

    “너야?! 네가 감히 우리 아들을 때려?! 이 근본도 없는 년이!”

    “조용히 해!”

    이라한테 난리 치려던 미란을 막은 목소리는 이건이었다. 놀라 굳어 있던 이건이 저벅저벅 다가와 중간에 섰다. 그의 시선은 이라와 그녀의 뒤에 선 제이든에게 돌아갔다.

    이미 여러 소식을 통해 알고 있었다. 확실한 건지는 몰라도 찍힌 사진을 봤을 땐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당신 지금 날 왜 말려?! 발랑 까진 쟤를 봐! 우리 지강이 때려 놓은 것도 모자라서 남자까지 데리고 내 손자를 만나?!”

    “지금 밤이야. 목소리 낮춰.”

    “여보!”

    미란이 빽 소리쳤다. 이건은 굳은 얼굴로 미란과 지강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이라를 바라봤다. 이건의 등장에 이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죄송해요.”

    “잘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이건의 눈이 제이든에게 향했다. 모자에 가려졌지만, 키가 큰 덕분에 그의 녹색 눈동자가 여실히 보였다. 확실히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도 이미지가 강렬했고 그만큼 잘생겼다.

    “인사할 사이는 아닌 것 같지만, 이라 전 시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은우 할애비 되고요.”

    이건의 소개에 미란이 얼굴을 확 굳혔다.

    “당신 지금 뭐 해!”

    “제이든 리 에반스입니다. 이라 애인입니다.”

    미란의 말을 무시한 채 대답하는 그의 말에 미란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봤다. 전에 이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맞고 지냈다는. 제이든의 눈에 시퍼런 분노가 돌았다.

    “그래요. 무슨 소란인진 모르겠지만.”

    “아버지!”

    이건의 말을 가로챈 건 지강이었다. 이를 악문 지강은 한 걸음 이라에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은우 데려가세요.”

    이건의 폭탄선언에 지강과 미란 뿐만 아니라 이라까지 놀란 채 굳었다. 이건은 이라와 제이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미란과 지강을 바라봤다.

    “아버지!”

    “여보!”

    소리치는 둘의 모습에도 이건은 단호했다.

    “둘 다 입 다물고 있어.”

    이건은 고개를 돌려 제이든 품에 안긴 은우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제이든은 은우 눈과 귀를 가렸던 손을 풀었다. 그제야 겁을 잔뜩 먹은 은우가 이건을 마주 봤다. 아이의 고개가 돌아가자마자 이건은 없었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우야.”

    “흐으, 흐윽. 끅, 할, 할부지.”

    이건의 모습에 안심한 듯하면서 뒤에 있는 미란과 지강의 모습에 은우는 겁에 질려 제이든의 옷깃을 꼭 붙들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이건은 시선을 올려 제이든과 이라를 보며 말했다.

    “내 손주고, 이라도 내 친딸처럼 아꼈지만.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겠지.”

    “……아버님.”

    “좋은 사람 만나서 지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으면 된 거다. 그럼 된 거야.”

    이건이 손을 뻗어 이라의 손을 잡았다. 투박한 그의 손이 이라의 손을 천천히 토닥였다.

    “미안하다. 이라야. 아가, 미안해.”

    “……저, 저는.”

    “내 손주도 너도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서야. 사랑받을 수 있게 잘 키울 것 같구나.”

    어느새 이건은 다시 제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에겐 거짓됨이 보이지 않았다. 올곧고 확고한 눈. 불도저 같으면서도 때론 무방비하게 두 사람을 보듬어주겠지, 분명히.

    “은우 낳고도 지강이 저 자식 정신 못 차린 것도, 회사 일 바빠서 집에서 이라 너 힘든 거 알면서도 못 도와준 것도 다 내 탓이다.”

    “…….”

    “용서해 달란 말은 안 해. 가끔 우리 은우가 보고 싶을 때, 그때만 보여주면 돼.”

    이건의 말에 미란이 얼굴을 구기며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 미쳤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버지, 은우 제 아들이에요! 예?!”

    지강까지 난리가 났지만, 이건은 단호했다.

    “은우 집에서 많이 힘들었어. 자격 없는 아빠랑 조부모 밑에서, 사랑도 풍족하게 못 받았어. 이라한테 가야 해. 이라가 키워야 해.”

    “아버지! 아니야, 무슨 소리야! 한이라, 안 돼!”

    “법적인 절차는 다들 감정도 머리도 식히고 나서 하자. 은우 친권 포기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아버지, 미치셨어요?!”

    지강이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내내 담담했던 이건이 여태 숨기고 있던 분노어린 눈으로 지강을 강하게 바라봤다. 그 눈빛에 지강이 움찔 떨었다.

    “친권 포기 안 하면 네 인생 그날로 끝이야. 그 나이 먹고서 부모 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어딜 감히 부모가 되겠다고 말해.”

    “……아, 아버지.”

    “들어가. 당신도 한마디도 하지 마. 토 다는 순간 이혼이니까. 다들 은우 볼 자격 없어.”

    이건의 엄포에 미란도 입만 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내 참고만 있던 이건이 터진 거다. 이라는 멍하니 이건을 바라봤다.

    “가끔, 은우 얼굴만 보여다오.”

    언제 그랬냐는 듯 이라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은 이건이 이라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이라 너도, 꼭 행복해라.”

    “……아버님.”

    “그러면 된다.”

    미소 지은 이건은 제이든을 바라보고는 짧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씁쓸한 눈으로 은우에게 시선을 돌리고서는 작게 손은 흔들었다.

    “다음에 은우 맛있는 거 사줄게.”

    “하, 할부지…….”

    “울지 말고. 할아버지랑 통화도 자주 하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이건은 됐다는 듯 아무 말도 못 하는 지강과 미란을 끌고 들어갔다.

    한순간 폭풍이 휘몰아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라는 천천히 몸을 돌려 제이든과 은우를 바라봤다.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이건 몰랐는데. 둘을 보는 이라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이제 행복만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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