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63화 (63/70)

63화

“난…….”

이라의 눈이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더 크게 동요했다.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렴풋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라가 원하고, 자신도 원하면 언제든 은우와 함께할 거라고. 그녀가 얼마나 마음 쓰고 있었는지 저는 다 알지 못했던 거였다.

“걱정 마. 늘 당신 편이라는 말은 변함없으니까.”

“제이든, 이건 감정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동요하는 모습이었으나, 결국은 이라 역시도 확고했다. 그녀의 눈빛을 그대로 받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누구보다 이성적이야.”

“……너무, 너무 복잡해요.”

“알아. 근데 사실 아까 말이야.”

물끄러미 이라를 보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아까를 생각하는 건지 잠시 말이 없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냥 좋더라. 은우가 상처받아서 한 말인 거 알고 있는데도, 나한테 아빠라고 하는 말이 너무 좋았어. 그냥 이건 내 솔직한 심정이야.”

힐끗 이라를 보던 그가 손으로 마른세수 하듯 제 얼굴을 쓸었다.

“몰랐는데 내심 나도 속으로 바라고 있었나 봐. 당신도 당신이지만, 은우도 나와 많이 가까워졌잖아. 은우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은우의 행복……. 늘 저도 바라던 거였다. 그런데 자신 말고 다른 누가 은우의 행복을 바랐던 적이 있었나. 아이의 아빠도, 조부모도 진심으로 그랬던 적이 있을까.

“정말로…….”

함께할 수 있어요? 바라던 뒷말을 꺼내기 직전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은 말소리를 제외하곤 조용해서 문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제이든과 이라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열고 나오는 건 은우였다. 처음 보는 곳에 당황한 듯 훌쩍이며 나오던 은우는 둘의 모습에 안심한 듯 걸어왔다.

“엄마아.”

“응, 은우야.”

벌떡 일어난 이라가 은우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계속 울었던 건지 젖은 얼굴을 닦아주자, 은우는 빨간 코를 훌쩍이며 제이든을 바라봤다. 그 역시 은우와 눈을 맞추고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은우, 배고프지 않아?”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을까? 은우가 먹고 싶은 거 잔뜩 먹자.”

그가 씩 웃으면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은우가 안 울면, 은우 선물도 잔뜩 줄 건데.”

“선물……?”

촉촉하게 젖은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아이는 쉽게 상처받지만, 그만큼 또 쉽게 희망을 찾는다. 맑은 영혼들이니까.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까닥이자, 금세 이라의 품을 빠져나온 은우는 그에게로 향했다.

미국에서 사 왔던 선물을 호텔로 옮겨 놓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우는 은우를 달래긴 충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가 사준 선물로 풀장착을 한 은우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은 미소로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저녁을 먹으러 가서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큰 그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정말 친 부자처럼 함께 화장실을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고가의 옷을 입힌다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는데.

“잘 어울리네, 누구 아들인지.”

씨익 웃으며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일어났다. 타이밍 좋게 그의 눈을 피해 계산할 수 있었다. 꽤 가격대가 있는 곳이라서 각오한 만큼의 가격이 나왔다. 뭐, 은우도 그도 좋아했으니 됐다.

“엄마!”

잔뜩 신이 났으면서도 차분하게 제이든의 손을 잡고 테이블까지 걸어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엄마, 밥 먹고 또 형아네 가는 거야?”

“어?”

아까 갔던 호텔을 제이든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은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난감한 얼굴로 은우를 보다가 제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시선을 느낀 그가 자리에 은우를 앉히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렇게 놀까?”

“……하지만, 오늘은요?”

금세 시무룩해진 모습에 그가 웃으며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들어가야지. 은우가 늦게 들어가면 다들 걱정하시니까.”

“……싫은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인 은우가 힐끗 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도 너무 좋고, 제이든도 말할 것 없이 너무 좋았다.

“아빠…… 보기 싫어요. 엄마, 나 오늘 엄마랑 있을래. 응?”

투정하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이라보다도 함께 있던 시간이 많은 아빠에게 이렇게까지 애정을 못 받고, 정도 못 주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오늘 데려다주기로 약속했고, 내일은 주말이라고 해도 이라는 출근해야 했다.

“은우야, 그럼 엄마가 꼭 약속할게. 다음 주에도 보자.”

“……싫어어.”

“엄마도 은우랑 헤어지는 거 너무너무 아쉬운데,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게 놀려면 엄마도 출근해야 하니까. 응?”

“엄마는 출근하고, 은우는 형아랑 놀면 되잖아…….”

은우가 제이든의 손을 꼭 잡았다. 또래보다 성숙했던 은우가 이럴 때면 이라 역시 너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일로는 투정도 잘 부리지 않아 더 그랬다.

“우선, 우선 나갈까?”

이라가 다 먹은 테이블을 보고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환기 좀 하면서 얘기를 나누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은우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제이든도 짐을 챙겼다.

“아, 계산은 내가 했어요.”

“뭐?”

“당신이 못 하게 할까 봐 먼저 했어요.”

피식 웃은 이라는 은우를 데리고 먼저 나갔다. 지갑을 꺼내 들었던 제이든은 도로 넣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흐으윽, 흐으으!”

“은우야…….”

끅끅 서럽게 우는 모습에 이라가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전 시댁 근처에 주차하고, 은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제이든이 사서 줄 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던 은우는 집 앞으로 오니 다 녹아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서럽게 울었다.

“으아아앙, 으아아! 싫어어, 가기 싫어어! 끅!”

딸꾹질까지 하는 모습에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애초에 마음 같아서는 이라도 보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여덟 시가 넘었고,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물티슈랑 휴지 좀 사 올게.”

새로 산 옷과 신발이 아이스크림으로 범벅된 걸로 모자라,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제이든이 근처 편의점으로 간 후에도 은우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은우야, 응? 엄마랑 약속했잖아. 다음 주에도 보기로.”

“싫어, 싫어어! 끄윽, 흑!”

주저앉은 채 눈을 맞추고 있지만, 은우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한숨을 쉬며 더 달래보기로 하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당연히 제이든이라 생각했는데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라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일어나 뒤를 돌았다.

“연락도 안 되고, 올 시간 다 돼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지강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은우와 이라를 바라봤다. 엉엉 우는 걸로도 모자라 아이스크림까지 온몸에 묻히고 있으니 지강의 표정이 더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정은우, 왜 울어? 이게 뭐야, 집 가서 다 씻어야 하잖아.”

“은우랑 조금만 더 얘기할게.”

“얘기할 게 뭐가 있……. 뭐야? 무슨 옷이야?”

지강이 은우의 옷을 휙 당겼다. 악의 없는 손길이었지만, 놀란 은우는 동그란 눈으로 아까처럼 소리 내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뭐 하는 거야.”

탁. 그런 지강의 손을 쳐낸 이라가 끈적한 은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미 지강은 브랜드를 알아본 건지 은우의 옷차림을 보며 입꼬리를 삐뚤게 올렸다.

“데이트라도 했나 봐?”

“은우 들어. 말 예쁘게 해.”

“아, 그러시겠지. 애 옷을 아주…… 몇백은 그냥 썼겠네?”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이라는 은우를 제 뒤로 숨겼다. 그 모습이 못내 불편한 건지 지강이 인상을 쓰며 이라를 바라봤다.

“누가 보면 내가 친아빠 아닌 줄 알겠어?”

“친아빠가 뭐 그리 대단하니? 애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뒷말은 은우에게 안 들리게끔 이 악물고 작게 속삭였다. 지강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관심이 있으니까 데리고 살지.”

“다음 주에 은우 며칠 데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뭐? 하. 야, 한이라. 너야말로 나랑 얘기 좀 해. 너 진짜 그 자식이랑 무슨 사이야? 그 새끼랑 왜 내 아들을 데리고……!”

지강의 거친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나오다가 뚝 끊겼다. 그의 시선이 이라에게서 비스듬히 비껴갔다. 이상함에 뒤를 돌아보니 모자를 눌러 쓴 제이든이 있었다.

그는 지강을 봤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라의 뒤에 있는 은우의 앞에 주저앉았다. 우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사 온 물로 헹구고, 물티슈로 더 꼼꼼하게 아이스크림을 닦아줬다.

“흐으, 형아.”

제이든이 오자 그제야 울음을 터트린 은우가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소매에 묻은 아이스크림이 그에게도 묻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제이든은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 아들한테.”

지강이 이를 악물며 그를 내려다봤다. 제이든은 다정히 은우에게 미소 지어준 후에 일어났다. 무표정하게 돌아온 그의 모습에 지강이 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뭡니까? 뭐냐고.”

“그만해, 정지강.”

이라가 인상을 쓰며 두 남자 사이를 막았다. 힐끗 그런 이라를 본 제이든은 서늘한 시선으로 지강을 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둘이 뭐하겠다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건데! 왜 자꾸 볼 때마다 시비를 걸고, 은우한테 왜 그래?”

눈에 힘을 주고 지강을 노려봤다. 하는 짓 전부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이라를 보던 지강이 소리쳤다.

“은우 아빠는 나야! 저 자식이 아니라!”

“누가 뭐래?! 아빠 노릇이나 잘하라고 했잖아!”

지지 않고 이라도 소리치자, 지강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라의 손목을 탁 잡았다. 그리고는 제 쪽으로 당긴 채 눈으로는 제이든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잘 해보려고. 아빠 노릇도, 남편 노릇도.”

“……뭐?”

이라가 지강을 올려다보자, 지강은 이라를 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줬다.

“우리 다시 합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