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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61화 (61/70)
  • 61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은우를 보던 제이든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다칠만한 건 없는지 꼼꼼하게 보고 온 터라 안심했는데, 이번에는 이라가 없어졌다.

    의아한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정말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테이블에 앉아서 이라를 기다리며 커피를 든 채 은우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체력이 어마어마했다. 아이를 쫓아다니다 보니까 지치는 자신을 발견해 허탈하게 웃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은 커피를 마시려고 할 때였다. 아이가 하나 철퍼덕 넘어졌다.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보니, 은우였다.

    벌떡. 내팽개치듯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커피를 뒀다. 그는 커피가 쏟아진 줄도 모른 채로 은우에게 달려갔다.

    “으악!”

    그때 은우가 벌떡 일어나 저를 때린 해찬을 강하게 밀쳤다. 당연히 해찬이 넘어졌지만, 그의 눈에는 은우의 붉은 뺨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가 바득 갈렸지만, 앞서 모인 사람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제기랄.

    “너 지금 해찬이 밀쳤어?!”

    그때 어떤 여자가 대뜸 나와 은우에게 버럭 소리쳤다.

    “은우!”

    그가 불렀지만, 이미 해찬의 우렁찬 울음과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으어어엉! 으아아앙! 엄마아! 정은우가 나 밀었어!”

    “네가 먼저 나 때렸잖아.”

    은우는 울음을 참고 씩씩대며 해찬을 노려봤다. 짜증 섞인 얼굴로 거칠게 사람을 밀치고 은우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이 못 배워 먹은 게 진짜! 지금 누구 아들을!”

    여자의 두툼한 손이 아이에게 향하는 걸 보자마자, 그는 손을 뻗어 부러트릴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놀란 여자가 아파 신음했으나, 그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이를 때리려고, 이 손으로. 그냥 분질러 버릴까. 모자에 가려진 그의 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큰 손안으로 꽈악, 강한 힘이 더 들어갈 때였다.

    “으아아악! 우리 엄마 놔! 정은우 너 이씨! 아빠도 없는 게!”

    해찬이 겁을 잔뜩 먹은 채 소리쳤다. 이미 제이든의 모습에 기가 눌린 아이는 만만한 은우에게 버럭거렸다.

    “아니야!”

    그때 은우가 빽 소리쳤다. 힘을 준 아이의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여자에게 입을 열던 그는 순간 다리에서 느껴지는 작고 견고한 힘에 놀라서 시선을 내렸다.

    은우가 제이든의 단단한 다리를 꽉 잡은 채 소리쳤다.

    “내 아빠야!”

    “…….”

    “아빠, 아빠. 흐으윽, 해찬이가.”

    어느새 여자를 잡은 손도 잊어버렸다. 짐짝처럼 놓아버린 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저를 애절하게 올려다보는 은우를 바라봤다. 꽉 잡은 작디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으, 은우야.”

    그때 뒤에 있던 이라가 다급하게 사람들을 제치고 나왔다. 이라 역시 은우가 부른 호칭에 당황한 듯 제이든과 은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흐으으, 흐윽.”

    서럽게 우는 모습, 뚝뚝 떨어지는 닭똥 같은 눈물, 작은 손아귀로 꽉 쥐어 잡은 힘, 덜덜 떠는 손.

    ‘내 아빠야!’

    소리쳤던 은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다시 생생하게 들렸다. 그 짧은 순간에 넋이 나갔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러면 안 될 상황인 걸 알지만, 아이의 호칭에 들떠버렸다. 내내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라의 선택일 뿐이라고 그렇게…….

    아니었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올곧을 만큼 은우에게 향해 있었다. 그제야 뭔가 가슴속에 묵직함이 들어찼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이렇게도 지켜주고 싶은데. 왜 여태 몰랐을까.

    그가 익숙할 만큼 자연스럽게 은우를 품에 안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은 신기하게도 깔끔히 정리됐다.

    여전히 호칭에 당황한 이라가 은우를 품에 안은 그를 바라봤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가까이서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에 놀라 멈췄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가까이 있는 이라에게는 다 들렸다.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는 그의 심장박동이.

    그런 이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은우를 안은 채 아이를 살폈다. 동시에 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은우의 곳곳을 훑다가 멈칫, 했다.

    “너, 너 맞았어?!”

    그제야 놀란 이라가 두 손으로 은우의 양 볼을 잡았다. 맞은 듯 붉어진 여린 피부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이라가 휙 고개를 돌려 해찬과 그 여자를 바라봤다.

    “뭐! 해찬이 넘어진 거 안 보여?!”

    참자, 참아……. 아니, 참아야 하는 걸까. 이가 갈렸다.

    “방금 은우 때리려고 했죠.”

    “뭐? 무슨……. 그, 그건 그냥 너무 애가 못 됐으니까 혼내려고 한 거지!”

    뻔뻔한 여자의 말에 이성의 끈이 툭, 끊겼다.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거친 목소리가 성대를 긁으며 나왔다. 이미 직원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이라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부모가 얼마나 무능하면 맨날 애가 그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다녀요?! 집에서 맨날 그런 소리나 하나 보죠? 애 앞에서?! 누구네 부모는 이혼했다더라, 누구는 어쨌다더라! 뭐가 그리 잘났는데 당신이!”

    분노에 찬 이라의 모습에 여자뿐만 아니라 은우도 놀란 듯 바라봤다. 제이든은 그런 은우를 품으로 안아 토닥였다.

    “아무렇게나 손찌검이나 하고! 그것도 집안에서 배운 건가 보죠? 남편한테 맞고 사나 봐요? 애가 그런 것만 배우니까 친구나 때리죠!”

    “뭐, 뭐라고 했어?! 이 미친 게! 너 말 다 했어?!”

    “다 했겠냐! 누구는 등신 같아서 욕 못 하는 줄 알아? 어른이면 어른답게, 부모면 부모답게 해! 네 자식만 소중해? 나도 우리 아들 상처받는 꼴 더 못 봐!”

    강하게 소리친 이라가 살벌한 눈으로 여자를 노려봤다. 이를 꽉 문 모습에 여자의 얼굴이 황당하게 번지다 분노로 차올랐다. 휙 시선이 이라의 뒤에 있는 제이든에게로 향했다.

    “하, 아빠? 아이고, 동네 창피하네. 지 엄마가 돈 많은……!”

    “그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자를 향했다. 움찔, 놀란 건 여자뿐만 아니라 뒤에 함께 있던 같은 유치원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은우를 안고 남은 한 손으로 이라의 어깨를 감쌌다.

    “한 마디만 더 떠들면, 법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될 겁니다.”

    “지, 지금 협박해요?!”

    “당신들뿐만 아니라, 사진 찍은 모두가 알걸. 오늘 여기에서 아이 사진 한 장이라도 인터넷에 올라가는 순간 다 법적 책임 물어야 할 테니까.”

    모자에 그늘져 가려진 그의 시선이 이쪽에 몰린 이들을 한순간에 쓱 훑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다 보였다.

    “그쪽은 조만간에 연락 갈 거야.”

    그의 입매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웃음이 섬뜩해 여자는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모욕죄, 명예훼손. 들어는 봤겠지. 그리고 은우 얼굴도 책임져야지.”

    이라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 품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다시는 이런 짓은 봐줄 수가 없지.

    “지금 아, 아이들 다툰 걸로 이러는 거예요?! 하, 누가 이런 걸로 고소한다고!”

    “글쎄, 내가 하지 않을까.”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여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그는 이라와 은우를 안은 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저기요!”

    여자가 뒤에서 불렀지만, 무시한 채 걸었다. 이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제야 시선을 내린 그는 평소처럼 다정한 눈으로 이라를 바라봤다.

    “걱정 마.”

    “정말 고소할 건…… 아니겠죠?”

    “당신은 합의만 안 하면 돼.”

    “…….”

    생긋 웃고는 있지만 이라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열 받은 거다. 그리고 미세하지만,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라와 은우를 감싼 채 앞장서는 느낌이……, 전과 달랐다.

    사람이 없는 차까지 온 제이든은 아직도 훌쩍이는 은우를 뒷좌석에 태운 채 문을 닫지 않고 시선을 맞춰 허리를 낮췄다.

    “……흐읍.”

    꾹 눌러 참는 게 보였지만 은우는 여전히 붉은 뺨으로 훌쩍였다. 큰 손이 아이의 뺨에 조심히 닿았다.

    “형아아, 형아.”

    “응. 은우야.”

    훌쩍이던 은우는 눈치를 보듯 제이든과 그 뒤에 서 있는 이라를 보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흐으으윽, 그냥 형아가 은우 아빠 하면 안 돼요? 엄마아, 응? 안 돼?”

    서럽게 우는 모습에 이라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은우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자꾸 유치원에서 해찬이가 그래. 정민이랑 연수랑 또, 또, 혜림이도 수혁이도. 흐윽, 아빠는 맨날 못 봐. 아빠 아니야, 엄마, 나 아빠 싫어. 형아가 아빠 했으면 좋겠어. 응?”

    이제는 아예 칭얼거리는 모습에 이라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주저앉아 은우의 뺨을 매만졌다. 속상했다. 이런 말을 하게 만들 게 전부 제 탓이라서. 대답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목이 멨다. 이라도 꾹 울음을 참는데, 그때 옆에서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의 대답에 이라도 은우도 놀라 그를 바라봤다. 그는 확신이 가득한 짙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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