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59화 (59/70)

59화

“안 그래도 되는데…….”

푹신한 침대를 의자 삼고 프레임을 등받이 삼아 앉은 이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다가 지쳐서 달래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잠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허리와 아랫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깨 보니까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어쩐지 평소에는 잘 참던 것들이 팡팡 터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감정 기복이 엉망인 이유가 여기 있었네.

“원래 이렇게 심해?”

그는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히 걸터앉으며 이라를 바라봤다. 품에서 끙끙거리는 이라를 봤을 땐 이미 식은땀 범벅이었다. 생리통을 이렇게 앓다니, 그로선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땐 이래요.”

그가 급히 사 온 찜질팩을 배 위에 얹은 채 끙, 거렸다. 남들은 애 낳으면 생리통이 없어진다던데, 이라는 반대였다. 아이를 낳은 이후에 더 심해졌으니까.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이라의 말에 제이든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지. 근래 안 좋은 일이 좋은 일보다 더 많이 있었을 텐데.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뭐든 해줄게.”

“정말 괜찮아요. 죽을병도 아니고 고작 생리통에 너무 과보호네요.”

하하, 작게 웃는 이라였지만, 그녀를 보는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울다 지쳐 잠든 이라가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깨는 걸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 약도 사 왔어. 무슨 약이 들지 몰라서 그냥 다 사 오긴 했는데.”

“네?”

그가 일어나 방을 나가며 하는 말에 이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무언가를 잔뜩 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트레이 위에 아까 그가 준비했던 김밥과 망친 계란말이, 미역국과 물, 약까지 바리바리 챙겨왔다. 정말 약이 한 보따리였다.

“약국에 있는 진통제를 다 쓸어온 거예요……?”

“말도 마. 이렇게 앓는 여자는 처음 보니까.”

무릎 위로 트레이를 올리는 그를 보며 이라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만났던 여자들은 생리통이 없었나 보죠?”

쳇. 괜히 시선을 휙 돌리자, 그는 피식 웃으며 김밥 하나를 먹기 좋게 젓가락으로 들었다.

“글쎄. 물어보진 않아서 모르겠는데.”

“네?”

“자. 아주 맛있진 않아도 맛없진 않았어.”

그가 얼빠진 이라의 입에 김밥 하나를 쏙 넣었다.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인 야채 김밥이었다. 재료 하나하나가 신선해 씹는 맛도 좋았고, 간도 딱 맞았다. 우물거리며 그를 보던 이라는 꿀꺽 삼키고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 많이 만났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애인끼리 물을 말이 아니지 않나, 보통.”

그는 다시 김밥 하나를 더 들었다. 잘 받아먹은 이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래도 여친 생리통을 모르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것도 없어. 오래 만난 사람도 적고, 생리통을 알 정도로 가까웠던 적도 없고.”

“……애인이랑 안 가까워요?”

동그래진 이라의 큰 눈을 보던 그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애인이랄 게 맞긴 하나 싶었다. 그의 기준에선 명목상 애인이었지 거의 파트너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나마 애인 구실을 했던 건 로레인이겠지만, 그녀와도 그 흔한 데이트조차 거의 없었으니.

“하나 확실한 건 밖에서 밥 먹은 횟수가 가장 많은 건 당신이라는 거지.”

“……말도 안 돼요.”

이라의 머릿속엔 로레인이 바로 떠올랐다. 며칠 전 울며불며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라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확신했다.

“내가 당신 전 여친을 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가늘게 뜬 눈을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로렌을 말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사실이야. 제일 오래 만났다고는 해도 그때는 나도 로렌도 바쁠 시기였으니까.”

“그래도 밖에서 밥을 안 먹었어요? 말도 안 돼.”

“한 달에 일주일 보기가 힘들었어. 성향 차이도 있어서 노는 방식도 달랐고.”

로레인은 파티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시끄러운 건 질색인 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십 년 전에도 지금도 이라와는 사람이 많은 곳에 다니는 걸 꺼리지 않았다. 로레인은 연예인이라 시선을 더 받긴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했지. 그냥 언제든 헤어져도 상관없는 관계라고 생각했거든.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아이까지 생겼었는데,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럼 두 번 다 실수였다는 건가? 이라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그런 시선을 받으며 한숨과 비슷하게 웃었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지나간 여자 얘기 꺼내는 바보가 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당신이 궁금하다니까.”

어차피 로레인에 관한 거라면 이라가 거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 없었기에 말해준 거였고.

“로렌이 정말 지겹도록 쫓아다녔어. 가볍게 만나고 말아도 됐지만, 로렌과는 일 때문에 엮여서 내키지 않았거든. 뭐, 만난 이후에도 당연히…….”

그가 언뜻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계획은 없었고.”

애초에 아이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서 남들과는 달리 더 쉽게 여길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생겼고,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두 번째는 상실감에 계획했던 건 맞아.”

“아, 미안해요. 거기까진 생각 못했어요.”

또 상처를 건드린 걸까 쓱,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제이든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이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혹시 은우는 볼 수 없을까.”

“은우요?”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도 많이 샀으니까 줘야 하기도 하고, 그냥 좀…… 보고 싶네.”

“아.”

하긴 슬슬 은우를 만날 때가 됐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일만 마무리되면 은우와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만나자고 하니 의외였다.

“그, 저. 제이든.”

“응.”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정말 혹시나.”

“그래.”

그가 웃으며 보자, 이라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불편하진 않아요……? 당연히 나야 내 아들이고, 보고 싶고, 데리고 있고 싶지만.”

괜히 말을 꺼낸 걸까. 사실 꼭 나눠야 하는 대화라고는 생각하지만, 시기가 너무 이른 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 그는 나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그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지…….

흔들리는 이라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무릎 위로 트레이를 옮겼다. 따듯한 미역국을 앞에 놓고 이라의 손에 숟가락까지 쥐여줬다.

“이라. 나는 당신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네?”

얼떨결에 숟가락을 잡은 이라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잠시 허공에서 맞부딪친 시선을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사정을 생각해야 하는 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이래서, 조건이 이래서. 그런 거 다 말고.”

“…….”

“그냥 나만 봐주고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

그는 손을 뻗어 이라의 위에 놓인 트레이를 잡아 고정했다. 흔들림 없이 고정된 트레이 위에는 그녀를 위한 그의 마음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당신의 미래를 나와 함께 의논해 가길 바라. 그 미래에 내가 있을 거니까.”

“……제이든.”

“그건 은우도 마찬가지잖아. 당신 옆에 나와 은우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원래부터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의 말처럼 정말 당연한 것처럼. 이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말이 과분해서, 너무 벅차서.

제이든은 그런 이라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 많고 걱정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황당할 정도로 무모한 이라도 알고 있었다. 그때의 패기 어린 그녀의 성격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거니까.

“은우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의견을 낼 수는 없지만, 하나만큼은 당신이 알아야 해.”

“무슨…….”

“은우는 나한테도 소중해.”

그의 눈에는 확고함이 담겼다.

“그러니까 불편해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하고자 한다면 난 언제든 당신 편이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도 이라가 짐작하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트레이를 잡았던 그가 한 손을 들어 수저를 든 이라의 손을 잡았다.

“미역국, 한국은 생일날 먹는 거잖아.”

“그쵸…….”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국그릇으로 내리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표 미역국이야. 아침에 받아 왔어. 이미 미역 한 봉지 버렸거든.”

“뭐예요. 사장님 힘드시게 굳이 이럴 거 없는데.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요. 김밥도 갑자기 하고…….”

이라가 피식 웃으며 미역국을 한 입 떠먹었다.

“맛있어요. 아, 김밥도 맛있고.”

“계란말이는 어렵더라.”

“맛은 똑같겠죠, 뭐. 모양은 흐트러졌어도.”

배시시 웃는 얼굴에 그가 손을 올려 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먹기 좋게 한 상 차려주고 싶었어. 한국인은 정이라며.”

“……오늘 힘들었는데, 당신 덕분에 힘이 나요. 이런 맛있는 밥도 해 주고.”

생긋 웃는 얼굴에 제이든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생일 밥이잖아.”

숟가락을 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라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자기 생일도 모르고.”

놀란 이라가 벌어지는 입술을 멈추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던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미역국, 먹기 좋게 썰린 김밥, 서툰 그의 계란말이.

그리고 오늘 내 생일.

“이라?”

툭. 말랐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라 떨어졌다. 뚝뚝 눈물을 떨구던 이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우는 모습에 당황한 그의 모습이 역력했다.

“왜, 왜, 뭐. 내가 뭐 실수했어?”

답지 않게 너무 당황한 모습에 이라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생일 밥 처음 먹어요…….”

미소 짓는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안쓰러운 얼굴로 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론 매년 내가 축하해 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