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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58화 (58/70)
  • 58화

    “……윽.”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오자 그제야 참던 감정이 팡, 폭발했다. 방송국 로비가 온통 뿌옇게 보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으.”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벽면에 기댔다. 힘이 탁 풀려버렸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참으며 고개를 떨궜다. 아직도 심장이 쾅쾅 울려댔다.

    “으으, 으읍.”

    참고 참았던 입술 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 한 방울 내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은 이라는 힘겹게 손잡이를 잡은 채 신음했다.

    괴로워서 온몸이 달달 떨렸다. 두 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곧 있으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릴 텐데, 일어나야 하는데…….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층수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다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줘 일어나려던 찰나에 문 앞에 서 있던 윤진과 눈이 마주쳤다.

    휴대폰을 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윤진은 순간 이라를 보고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윤진이 이라를 잡아 일으켰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선배.”

    힘겹게 윤진을 부르자 그제야 울먹이듯 목소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선배에.”

    “어, 왜. 왜 그래, 이라야. 우선 내리자.”

    이라를 데리고 다시 휴게실로 들어간 윤진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이라를 바라봤다. 테이블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어깨가 힘없이 처져 있었다.

    “누가 왔는데? 아니면 혹시 로비에서 배소라 팬들 만났어?”

    “……선배 알죠.”

    “어?”

    “나 고아인 거.”

    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참느라 충혈된 눈이 힘겹게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엄마래요. 나 고안데, 엄마래요.”

    “…….”

    “미치겠다, 진짜.”

    하하, 웃음을 터트린 이라는 손을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속이 답답했다. 근래 연달아 일이 터지고 오늘 그 정점을 찍었는데, 하필이면 또 하필이면 오늘.

    “자기 딸이 뭐, 아파서 어쩌라고. 죽든 말든 내가 뭔 상관인데……. 하, 진짜. 돈 달래요, 나한테. 버린 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제 딸 아프다고 돈 달래요.”

    “뭐? 아니, 그런 미친…….”

    윤진이 놀라 입을 벌렸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웃기지 않아요? 아아, 진짜 웃겨.”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이라의 표정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이라가 천천히 말했다.

    “욕해주고 왔는데. 꺼지라고, 죽으라고 그렇게 뱉어내고 왔는데.”

    “…….”

    “근데 속이 안 시원해요. 왜 이렇게 불편하죠?”

    지친 눈으로 크게 한숨을 뱉어낸 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 진짜 속상해.”

    “이라야…….”

    “진짜, 진짜 흐으윽……. 아, 속상해.”

    결국 눈물이 후드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인 이라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잘게 떨리는 여린 어깨를 안쓰러운 얼굴로 보던 윤진이 천천히 토닥였다.

    ***

    달칵. 문을 열었다. 퇴근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호텔로 온 이라는 충혈된 눈으로 들어갔다. 하도 정신이 없어 보이니까 윤진이 억지로 퇴근시킨 결과였다.

    다른 객실과 다르게 넓어서 그런가? 한눈에 내부가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연락은 안 했는데, 혹시 어디 나간 걸까. 오랜만에 울어서 그런지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윤진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따듯하고 넓은 그의 품에 안겨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유난히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 오늘만큼은…….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가던 이라의 걸음이 멈췄다. 말소리가 들렸다. 부엌 쪽인데.

    [하, 어렵네.]

    제이든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지? 힘없는 걸음으로 그가 있는 쪽으로 걷는데 순간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살살…….”

    뭐를…….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한 걸음만 더 옮기면 그가 있을 텐데, 대체……. 이라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누구지, 누구 목소리지.

    쿵쿵쿵쿵.

    너무 빨리 뛰는 심장에 오히려 귀가 먹먹해졌다. 들어가도 될지 말지, 발은 이미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때였다. 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 어렵지 않죠?”

    [젠장. 아니라고.]

    이게 무슨. 이상함을 느낀 이라가 한 걸음을 성큼 움직였다. 동시에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이러면 완벽한 계란말이 완성!

    “유튜……!”

    영상 소리였어? 너무 놀라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부엌 입구에서 우뚝 섰다. 동시에 조리대 앞에 있던 제이든이 소리 없이 툭 튀어나온 이라를 보고는 순간 굳었다.

    “……Oh my god! you scared me. 하아, 이라. 언제 왔어.”

    “……뭐해요?”

    너무 놀라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젠장, 하마터면 욕부터 할 뻔했다.

    진정하는 그를 보던 이라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리대 앞에는 무언가가 잔뜩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볼에 담긴 밥과 잘 준비된 김밥 재료, 그리고 잘 말린 김밥이 먹기 좋게 썰려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그가 들고 있던 계란 물과 그 앞에 놓인 태블릿PC는 아직도 주저리주저리 계란말이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서둘러 영상부터 정지시킨 제이든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놀라게 해 죽일 셈이었……. 뭐야.”

    순간 얼굴이 확 굳어진 그가 성큼성큼 이라에게 다가왔다. 영문 몰라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손이 이라의 턱을 부드럽게 감싼 뒤 올렸다.

    “왜 울었어.”

    “아.”

    그제야 충혈되고 부은 눈이 생각났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잡혀버린 뒤여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 봐야 했다.

    그는 굳은 인상으로 이라를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배소라 때문이야?”

    “……네?”

    “걔 때문에 오늘 또……!”

    “아, 아니에요. 그건 잘 해결됐어요.”

    손을 올려 그의 손목을 잡은 이라가 한숨과 함께 옅게 웃었다.

    “그러는 당신은 뭐 하고 있었어요? 김밥은 갑자기 왜 만들어요?”

    “그거야 당신 해 주고 싶어서.”

    그의 손을 잡은 채 내리고 그가 만 김밥을 바라봤다. 모양도 예뻤고 냄새도 좋았다. 그 옆에는 망쳐 스크램블 에그인지 계란말이인지 모를 뭉치도 있었다. 저거 때문에 쉽게 만드는 영상을 보고 있었던 거구나.

    “깜짝 놀랐어요. 여자 목소리 들려서.”

    “여자?”

    그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라를 바라봤다. 이라는 피식 웃으며 태블릿PC를 가리켰다.

    “바람피우는 줄.”

    “…….”

    너무 황당해 할 말이 없는지 그가 말없이 바라보자, 이라는 괜히 어색하게 웃음으로 무마했다.

    “이거 진짜 당신이 다 만들었어요?”

    이라가 자꾸 요리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모습에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제이든이 그녀를 가볍게 휙 안아버렸다.

    “으아!”

    놀라 그의 목에 팔을 감자, 그는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함께 웃으며 일어났던 곳에 이라를 내려둔 그가 다시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울린 게 누구야, 이라.”

    “…….”

    빤히 그를 바라보던 이라는 대답 대신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이라를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몇 분간 그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를 듣던 이라가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제 등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에 서글프게 웃었다.

    “제이든.”

    “응.”

    다정한 목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이런 힘든 날이 올 때 이렇게 품에 안겨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늘 방송국에…….”

    막상 말을 하려니 목이 멨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 아까 그렇게 울었는데 달래주는 그를 보니 또 울음이 터졌다.

    작게 흐느끼는 여린 몸에 그의 표정은 더 굳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라는 더욱 세게 그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방송국에, 날 낳은 여자가…….”

    “…….”

    “엄마가 왔어요.”

    제이든의 눈이 커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떼어놓으려던 손에 힘을 풀었다.

    “자기 딸이 아프대요. 남편도 죽었고, 돈도 없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돈 달라고 십 년 만에 와서.”

    엄마라고? 그가 기억하는 이라에겐 엄마가 없었다. 고아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미안해요.”

    그때 사과하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숙인 이라를 바라봤다. 천천히 그를 안았던 손에 힘을 풀고 고개를 든 이라는 눈물로 젖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알더라고요. 모를 수가 없겠지. 지금 나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나보고 당신 얘기도 하더라고요. 배우 만나지 않냐고, 돈 달라고. 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에 당신이 그런 취급 당했던 거예요.”

    “이라.”

    “그래서 미안해요. 그런 말 들을 이유 없는데, 당신은.”

    이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봤자 눈물로 잔뜩 젖어버린 주제에.

    “상관없어. 그건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어.”

    젖은 뺨을 부드럽게 닦으며 그가 짧게 입술을 찍었다. 그리고는 촉촉한 이라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속상하면 그냥 울어. 참지 않아도 돼.”

    “…….”

    이라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따듯한 그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울컥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결국,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이라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으, 으읏. 으어어엉!”

    그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흐, 흐어어엉!’

    ‘아. 이런, 젠장. 정말 죄송합니다. 휴대폰은 물어 줄게요.’

    버려지고 두 번째로 크게 울어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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