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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57화 (57/70)
  • 57화

    눈앞의 풍경이 한 번 뒤엎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순간 아찔할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껴 다급히 데스크를 잡고 버텼다.

    “어머, 피디님 괜찮으세요?”

    직원이 놀라 이라를 보며 벌떡 일어났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후. 흔들리는 시선을 바로 한 후에 천천히 카페로 걸어갔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땅이 움푹움푹 패는 기분이 들었다.

    희끗희끗 보이는 흰 머리와 테이블 위에 포개어 놓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있는 두 손은 이라가 알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하기야, 십 년 만이지.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여진은 아직 이라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가는 사람들 소음에 섞여 몇 걸음 더 떨어져 뒷모습을 보던 이라가 고개를 떨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까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은 제이든 뿐만이 아니네. 이 상황이 어이도 없고 황당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온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엄마라고 소개하며 나를 불렀을까.

    “……?”

    그때 시선을 느낀 여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선 뒤에 서 있는 이라와 한 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정적이 흘렀다. 분명 카페 내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라도 여진도 먼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십 년은 긴 세월이었지만, 막상 다시 보니 절실히 느껴졌다. 그와 다시 만났을 땐 이 정도로 세월을 느끼진 못했는데. 다시 만난 엄마라는 이 여자는 많이 늙어 있었다. 지쳐 보이기도 했고.

    “왔으면 앉아.”

    뒤늦게 입을 연 건 여진이었다. 고개를 다시 돌려 자세를 바로 했다. 이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빈 앞자리에 앉았다.

    얄팍하게 올라간 눈꼬리와 도톰하고 모양 좋은 입술, 정갈한 눈썹과 풍성한 속눈썹까지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지금은 많이 상해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왔으니까 마실 거 시켜야겠다.”

    저 멀리 카페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기는 모습에 이라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마주 보고 목구멍으로 뭐 넘길 사이 아니잖아요.”

    “…….”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요.”

    테이블 밑에 가려져 무릎 위로 올라온 두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날 선 이라의 말에도 여진은 차분히 반응하지 않았다. 자꾸만 저 여자와 내가 닮은 점을 발견하는 게 역겹도록 싫었다.

    “유명해졌더라. 여러모로.”

    “본론. 시간 아까워요.”

    잠시 입을 다물었던 여진의 입술 틈으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네 동생이 아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 같아서는 카페가 떠나도록 웃어주고 싶기도 했고, 또다시 엿 같은 상황을 겪는 내 인생에 울어주고 싶기도 하고.

    빤히 여진을 보던 이라의 입가가 삐뚤게 비틀어졌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은 얼굴이었다.

    “동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알잖아. 동생 있는 거.”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는 인간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죄책감도 없니?”

    여진의 지친 눈에 힘이 실렸다. 대체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말없이 바라봤다.

    “우리 유라 멀쩡히 살아 있던 제 외할아버지도 못 보고 자랐어. 너 때문에, 너 하나 키우겠다고 그래서.”

    “…….”

    “없는 형편에도 너 성인 될 때까지 그 집 내어주고 있던 터라 우리 다 힘들게 살았다. 유라 어릴 때부터 건강한 너와 달리 몸이 계속 아팠어. 그러다가 제 아빠도 사고로 삼 년 전에 떠나면서 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정신병이 있나. 정말 어디가 미친 건가. 순간 속에서부터 화가 들끓었다. 음료를 시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일지도. 있었다면 저 여자 얼굴로 붓는 게 아니라 컵을 집어 던졌을 테니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진을 보던 이라가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잘난 얼굴이 그렇게 상했던 건가. 제 남편 죽어 떠나고, 끔찍이 여기던 자식이 아파서? 첫 자식은 그렇게 버려버렸으면서.

    “딱 한 번, 기다린 적 있죠.”

    이라의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던 내내. 일 초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데, 그 뿌연 시야로 조문객 사이사이를 뒤져가며 당신 기다렸어.”

    입 안을 꽉 깨물었다. 툭, 하고 터져 입안 가득 피가 고였다. 목구멍으로 씁쓸한 피가 넘어가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심장이, 온몸이 너무 아파서.

    “그래도 아버지잖아. 어쨌거나 자기 아버지잖아. 오겠지, 와서 뭘 하든 오겠지. 발인하던 날까지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인 여자를 기다렸어. 그러다가 당신을 본 게 언젠 줄 알아? ……재산 상속 날이었어.”

    “……나는.”

    “할아버지한테 당신은 그러면 안 됐어. 버림받은 손녀가 눈에 밟혀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는데, 하나뿐인 딸이라고는 남자한테 눈 돌아가서!”

    언성이 높아진 덕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둘을 힐끗거렸다. 그런데도 이라는 멈추지 않고 여진을 노려봤다.

    “근데 뭐? 뭐라고 지껄였어?”

    “너…….”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 자식새끼가 아파 뒤지든 말든 어쩌라고 날 찾아와!”

    허억, 허억. 가슴이 뜨거웠다. 분노로 이가 갈리고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 이라를 앞에 두고서도 여진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볼 뿐 자리를 뜨지도, 맞서 소리치지도 않았다.

    “꺼져. 자기 아버지 죽을 땐 오지도 않더니……, 고작 지 새끼 아프다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리를 뜨려고 테이블을 짚는 순간, 여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돈 좀 줘.”

    여진은 그대로 이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돈 벌었을 거 아니야. PD라며? 보니까 유명하던데. PD 돈도 많이 번다며.”

    고작 이런 사람이 날 낳았나. 아아, 그래서 내 인생이 이따위였던가. 그래서 할아버지가 그리 허망하게 돌아가신 건가. 이런 여자가 딸이고, 이런 내가 손녀라서.

    “그리고 너 그 외국 배우랑 사귄다며. 돈 많을 거 아니야. 그래, 앞으로 너한테 이렇게 안 올 테니까 돈 좀 줘. 유라 약값으로 남편 사망보험금도 거의…….”

    “하하. 아하하하……!”

    이라는 그대로 손을 올려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끅끅 웃음을 터트리던 그녀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마구 웃었다.

    그래, 이번 일이 꽤 이슈가 되긴 했나 보지. 목적은 아마 제이든이었겠지. 아마 이 여자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을 테다. 배소라 사건이 있을 때부터. 그땐 안 좋은 쪽이었으니 연락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겠지.

    어떻게 지금은 왜 이렇게 우스울 수가.

    “……너 지금 왜 웃어?”

    여진이 입술을 꾹 깨물며 이라를 바라봤다. 약간 풀어진 자세였던 이라는 치켜든 턱을 내리지 않은 상태로 눈을 깔아 여진을 바라봤다.

    “여태 나아질 방법이 없어서 호구처럼 살았던 것뿐이지, 내가 정말 멍청한 등신으로 보였어?”

    “뭐, 뭐?”

    “동생? 웃기는 소리. 당신 팔자야. 아버지 죽이고, 남편 죽어 먼저 떠나보내고, 그 끔찍한 네 자식새끼마저 아프게 만든 거 다 업보고 벌이야.”

    고개를 바로 한 이라는 번뜩이는 눈으로 여진을 노려봤다.

    “돈? 십 원 한 장도 못 줘. 이따위로 찾아와서 구걸할 시간에 몸이나 팔아 봐, 남자한테 환장했잖아.”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여진이 눈을 크게 뜨며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이라는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되지? 또 애 배면 귀찮게 버려야 할 거 아니야.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 따위 그냥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는 것도 귀찮잖아.”

    날카로운 말은 갈고 닦여 칼이 돼 이라의 심장을 짓이겼다. 스스로 뱉은 말이 상처로 온전히 돌아왔지만, 그따위 상처 모른 척 더 날카롭게 말을 갈았다.

    “당신이 처박아 버린 새끼한테 구질구질하게 구걸하지 마.”

    차갑게 식은 눈으로 한 번 쳐다본 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그때 여진이 악을 지르며 일어선 이라를 올려다봤다.

    “너도 아이 있다며!”

    “…….”

    “너도 엄마니까 알 거 아니야! 넌 자식 안 버렸으니까 더 잘 알 거 아니야.”

    입구 쪽을 바라본 채 멈췄다. 여진은 그런 이라를 올려다보며 사정했다.

    “내 새끼 아픈데 눈 안 돌아갈 엄마가 어디 있어? 당장 내 새끼 죽게 생겼는데 구걸 안 할 엄마가 어디 있어!”

    은우. 우리 은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차게 식은 채 앞만 보던 이라의 눈이 슬픔으로 일렁였다.

    “……알지.”

    처음으로 긍정적인 이라의 반응에 여진의 표정에 희망이 들어섰다.

    “그래, 알잖아! 너라도 이럴 거잖…….”

    “근데 나도 당신 새끼잖아.”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이라는 앉은 여진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찬 바닥에 내팽개친 새끼라도, 그래도…… 나 낳을 때 아팠을 거 아니야.”

    “…….”

    “나도 당신 배 아파 낳은 딸이야. 그런 딸 인생 짓밟아 놓고서…… 엄마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애 도와달라는 건 아니잖아.”

    여진의 표정이 허망함으로 번졌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불쌍했는데. 아버지랑 딸 버리고 얼마나 잘 살겠다고 그랬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힘이 다 빠진 채 허망하게 이라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진을 내려보던 이라가 천천히 흐린 미소를 지었다.

    “매일 빌게.”

    “…….”

    “당신도 혼자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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