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56화 (56/70)

56화

당당히 복직할 수 있었으니, 이라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은우를 데리고 오는 거. 그 외에 그녀가 바라는 건 없었다.

제이든이 은우를 예뻐하고 좋아하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은우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확신도 없었다. 그가 은우를 예뻐하는 건지, 이라의 아들이니까 함께 봐주는 건지.

결국 후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것들 치우라고 말 좀 하고 와야겠다.”

쯧, 혀를 내두른 윤진이 창밖을 보다가 휴게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이라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가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배소라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입장문이라도 내야 하겠지. 다 터진 지금이야 증거가 될까 이라에게 쉽게 연락조차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을까. 사실 막상 이런 상황이 놓이니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라의 일로 제이든과 은우까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됐으니.

“하아.”

지이잉.

한숨을 내뱉는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혹시 제이든인가 해서 재빨리 확인했으나, 발신인을 보고선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지강이였다.

“……왜.”

-너 지금 어디야?

지강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회사지, 어디긴 어디야.”

귀찮다는 듯 대답했던 이라가 순간 불안에 휩싸여 늘어졌던 몸을 휙 바로 했다.

“왜? 은우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문제냐?

“뭔데?”

-기사 뭐야. 이거 다 뭐냐고!

이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수화기 너머 높은 언성을 지른 지강은 씩씩거리는 게 다 들릴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친구 놈들이 하도 난리길래 봤더니……, 하! 제이든 리 에반스? 그때 봤던 외국인이 배우였냐?

“그딴 말이나 할 거면 끊어. 은우 일 빼고는 연락하지 말랬잖아.”

-야, 한이라!

지강이 버럭 소리쳤다.

-너 미쳤어? 어디에 정신이 빠진 건데! 배소라 일도 오해면 오해라고 나한테 먼저 말해줬어야지. 그랬으면 다른 사람 입에서 듣기 전에 알았을 거 아니야. 그런 것도 말 못 해주냐?!

하. 짧게 숨을 뱉은 이라가 고개를 떨궜다. 뭐 비슷한 시기였다. 이혼하고, 사건이 터지고, 정직당하고, 아이를 빼앗기고, 끝내 직장까지 잘렸던. 그 시기의 지강은 늘 최악이었던 와중 더 최악이었다.

“네가 언제 궁금은 했니?”

-내가 언제……! 하, 우선 좀 만나. 만나서 얘기해.

“내가 말했지. 은우 빼면 우리 사이에 남은 거 없다고.”

-너 그래서 그 새끼 만난다고? 정신 차리고 살아. 그 새끼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어. 너한테 진심일 것 같아? 끝내 너만 상처받는다고, 이라야.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 함부로 지껄이지 마.”

-형님 소리라도 해줘? 너랑 어울리기나 하겠어? 지금 너 이용당하는 거잖아. 갖고 노는 거라고. 왜 그런 자식한테 휘둘려! 애먼 곳에서 그런 취급 받냐고!

그래, 이런 남자였던 거지. 아주 잠깐은 지강도 좋은 사람일 거라 착각했던 적도 있었다. 세상을 다 맡겨도 무섭지 않다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아이를 가진 게 너무 무서워서. 이 사람이라도 믿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런데 결국 이 꼴이었다. 이라 따위는 그에게 짧은 유흥거리일 거로 생각하는. 놀랍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깨닫고, 또 깨달을 뿐이지.

“조만간 시간 내서 은우 하원 내가 할게. 늦지 않게 데려다줄 테니까 네 부모님한테도 그렇게 설명해.”

-뭐? 야……!

뚝.

끊기 무섭게 다시 지강의 번호가 떴으나 연락을 무시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이라가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휴게실을 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경고라도 하라는 거잖아요. 저러다 사람 하나 잡겠네!”

복도에서 윤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통화 중인 건지 씩씩대며 열 내고 있었다. 늘 능청스럽게 굴어도 저렇게 한결같이 이라 편인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은우를 가졌을 때도 윤진의 도움을 꽤 많이 받기도 했고. 그래서 윤진은 지강을 병적으로 싫어하지만.

“아이씨! 무능한 새끼들!”

전화를 끊었는지 휴대폰에 대고 쌍욕을 내뱉어내던 윤진이 후, 하며 숨을 골랐다. 여튼 저 불같은 성격 말릴 수가 없다니까. 피식 웃은 이라가 다가갔다.

“안 치워 준대요?”

“아, 몰라. 내가 퇴근 전까지 내버려 두면 진짜 뒤엎는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선배가 그래서 별명이 깡배예요.”

“웬 깡배? 깡패도 아니고?”

“깡패 배윤진 줄임말이라던데요. 몰랐어요? 대학교 때부터 있던 수식언데.”

“미친, 첫 유포자가 누구야.”

“알게 뭐예요.”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윤진은 황당하게 바라봤다. 사무실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윤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로비에 누가 너 찾아왔다던데?”

“누가요?”

설마 제이든……, 은 아닐 테고. 그가 미쳤다고 로비에서 이라를 찾진 않을 테니까. 누구지, 방금 지강과 전화했으니 그도 아니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몰라 어떤 여자라던데. 좀 나이 있는?”

나이가 있는 여자라고는…….

“혹시.”

“왜 누군데?”

수연인가. 하지만 연락도 없이 수연이 대뜸 찾아올 리도 없을 텐데. 혹시 기사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거나 해서 그런가. 뭐지, 대체.

곰곰이 생각하던 이라가 우선 로비로 내려가 보려고 몸을 틀었을 때였다. 윤진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야, 이라야.”

“우선 나 내려갔다 올게요. 잘못 찾아온 걸 수도 있고…….”

“배소라 인스타에 사과문 올라왔다.”

멈칫. 이라가 다시 몸을 돌리자, 윤진은 제 휴대폰 화면을 이라를 향해 보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검은 사진과 함께 긴 글이 작성된 게시물 하나가 보였다.

“다 사실이 맞고 죄송하다고 자숙한다고 하는 글인데?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갑자기요?”

적어도 바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는 이번 녹음 파일까지 공개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너무나 빨리 인정해 버리니 오히려 이쪽에서 얼떨떨했다.

“너 반응 엄청 좋아. 댓글 다 막아 놨는데 이미 다른 곳으로 다 퍼져서 죄다 배소라 욕이고, 사전 제작 드라마 측에서도 사실 확인 중이라고 하다가 말 바꾼 것 같더라. 와 제작진 얘네 죽어나겠다. 나 같으면 배소라 때려죽이고 싶을 거야.”

“정말 사과문 맞아요?”

믿을 수가 없어 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긴 입장문이었지만, 어쨌거나 맞았다.

“소속사도 인정했네. 얘 대표 골머리 좀 앓겠네. 어려서 생각 없이 한 짓에 네가 그렇게 크게 다칠 줄이나 알았겠어?”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였다. 고등학교 때 데뷔한 배소라는 외모에 맞게 늘 귀엽고 앙증맞은 역만 맡던 배우 중 하나였다.

“이제 우리 웃대가리님들도 좀 앓겠네? 아, 꼬시다.”

큭큭 웃던 윤진은 배소라 욕으로 가득한 댓글 창을 더 구경했다. 꿀꺽. 이라 역시 사람들 반응을 보기 위해 댓글 창을 꾹 눌렀다.

두근두근두근. 몇 개월 전 미친 듯이 이라의 욕으로 도배됐던 댓글 창이 생각났다. 기사고 뭐고 죄다 그녀에게 돌과 칼을 던지고 꽂았다. 그때가 떠오르자 식은땀이 죽 흘렀다.

“…….”

첫 댓글은 배소라 욕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도, 그다음에도. 중간마다 이라의 이름도 나왔다. 대부분 응원하는 댓글이었다. 꽉 조여들었던 심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하아.”

긴장이 풀려 휴대폰을 보던 손을 탁 내렸다. 옆에서 안 그런 척하면서 이라를 보고 있던 건지 윤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꽤 나쁘지 않지?”

“……관심 없을 줄 알았어요.”

“뭐, 네 남자 덕분이 크긴 하다만.”

윤진이 씩 웃었다.

“그래도 너 욕했던 사람들 죄다 배소라 욕하잖아. 그거면 됐지. 하나하나 다 사과받을 순 없어도 오해는 이렇게 크게 풀렸으니까. 오늘 퇴근하면 감사의 키스라도 진하게 해주던가.”

“……하여튼 진지가 3초를 안 넘겨요.”

씨익 웃은 윤진은 이라의 어깨를 툭 쳤다. 거의 퍼억 소리가 나게끔 쳐서 반쯤 몸이 밀렸다.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자, 윤진은 엘리베이터를 힐끗 가리켰다.

“내려갔다 오기나 해. 배소라 입장문 떴으니 팬들도 슬슬 가겠다, 쪽팔려서라도.”

“사실 계란 맞을까 봐 조금 두렵긴 했네요.”

“계란만 맞으면 다행일까 봐.”

윤진의 끔찍한 말에 이라는 치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사양이었다.

“갔다 올게요.”

“빨리 와, 바쁘다.”

“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가면서도 댓글 몇 개를 더 찾아봤다. 제이든에게 연락은 없었지만, 그도 대충 상황을 들었겠지. 진짜 고맙다고 오늘 키스라도 해 줘야 하나. 마음 같아선 잔뜩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데. 배시시 웃던 이라는 로비에 도착해 내렸다.

“와, 빠르네.”

몇 분이나 됐다고 그 난리를 치던 팬들은 꽁무니도 안 보였다. 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나온 이라가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사원증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연락받고 내려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한이라 피디님 어머님께서 일 층 카페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방향을 안내해주는 직원을 따라 천천히 고개가 움직였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쿵, 쿵, 쿵.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던 심장이 저 멀리 보이는 인형의 모습에 바닥으로 쾅 떨어졌다.

‘너니?’

‘네가 성인이 될 동안 살라고 내버려 뒀던 거야. 이 집에서 나가는 게 예의다.’

속이 뒤틀렸다. 안에 든 모든 걸 게워내고 싶었다.

다시…… 만날 줄이야. 한여진,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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