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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55화 (55/70)
  • 55화

    “미친 거죠, 정말?”

    퇴근하고 호텔로 돌아온 이라는 매섭게 제이든을 노려봤다. 아까 그 복도에 윤진만 있던 걸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어떡할 거예요! 선배도 알아버렸잖아요!”

    젠장. 음흉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윤진이 떠올랐다. 이미 SNS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실제인 것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프로그램 홍보는 미친 듯이 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랑 연애하면서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어. 애초에 난리라며.”

    그가 아무렇지 않게 으쓱였다. 이라와 윤진의 대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든도 연락을 받았다. 한국뿐이 아니라 이미 미국에서도 그들의 열애설로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라고.

    이라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에 퍼졌다. 예쁜 얼굴 때문에 오히려 미국에선 긍정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로레인과의 열애설에도 제이든이 아깝다는 말이 많았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한국 반응은 조금 달랐다. 우선 이라가 유부녀에 애까지 있다는 게 타격이 컸다. 그 외로 아직 배소라와의 사건 때문에 이라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아, 배소라.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아무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선 안 올릴 것 같았다. 영상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건가, 아니라면 이쪽에서 폭로할 배짱이 없다고 보는 걸까.

    급격히 어두워진 이라의 얼굴을 보고 오해한 제이든이 그녀에게 시선을 맞춰 허리를 숙였다.

    “기분 많이 상했어?”

    “네?”

    아. 이라는 제 얼굴을 스윽 만졌다.

    “아뇨, 다른 일 때문에. 어쨌든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어요. 너무 일찍 알아버려서 그런 거죠. 큰 소리 내서 미안해요. 막상 생각하면 당신 탓도 아닌데.”

    작게 웃어버린 이라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그가 쓱 시간을 확인했다.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선 아마도 그의 뜻대로 되겠지.

    뭐든 좋았다. 이라가 제 이름을 팔아먹든, 제 얼굴로 더 자극적인 기사를 써 내려가든. 아니, 오히려 그는 그걸 더 바랐다. 그렇게 큰 이슈로 이라의 이미지를 바꿀 수야 있다면 이득이 아니던가.

    뒷 공작한 걸 이라에게 들킨다면 오늘처럼 한 소리 듣겠지만, 나름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더 가까워진 것 같으니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화장실 안은 물소리로 가득했다. 그 역시 바깥 화장실로 가 씻고 나오니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라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해?”

    그가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이라의 옆에 털썩 앉았다. 큰 수건을 둘러 하체만 가린 그가 피식 웃었다.

    “이러니까 집에서 마주쳤던 거 생각나지 않아?”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면 그게 얼마나 죄송할 일이던가. 하하, 웃던 이라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사라지고 걱정이 깃들었다.

    힐끗 그녀를 보던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오늘 새벽까지는 이라는 잠들지 못하겠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가만히 있었다.

    “안 졸려요?”

    “당신 안 잘 거 같길래.”

    “아, 나는 일이 좀 남아서요. 이따 자정 즈음 선배랑 할 연락도 있고…….”

    끝까지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지 이라는 흐린 표정으로 무마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소파에 편히 기댔다.

    “기다릴게. 같이 자.”

    “피곤하지 않아요?”

    “안 피곤해.”

    그가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언제 봐도 저 녹색 눈동자는 참 예쁘단 말이야. 물끄러미 그를 보던 이라가 오늘 방송국에서 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방송국 작가분 말이에요.”

    슬쩍 말문을 꺼내며 제이든을 바라보자, 그는 별 반응 없이 시선을 들었다. 이라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말을 이었다.

    “친해지셨나 봐요.”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만 해도 작가랍시고 그에게 말 건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여자?”

    성별을 추리기 위한 질문에 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게도 설명을 덧붙여줬다.

    “대기실, 단발…….”

    아. 생각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배소라 스케줄과 대기실을 알려줬던, 그리고…….

    “나 좋아하는?”

    “고, 고백받았어요?”

    고작 오늘 만났는데? 놀란 이라의 모습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고? 이라의 황당한 시선이 제이든에게 향했다. 고백도 안 받았으면서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아. 이라의 눈빛에 생각을 다 읽은 듯 그는 당연한 듯 말했다.

    “누가 봐도 나 좋아하던데. 당신이 보기엔 안 그래?”

    “물론 그랬죠. 관심을 그렇게나 표현했…….”

    이라의 표정이 잠시 오묘하게 변했다.

    “아무리 사람이 그렇게 관심을 표현한다고 해도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어요? 자기를 좋아하는지 확신도 없는데.”

    “경험에서 비롯된 거지.”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이라의 황당한 얼굴에 그는 다시 한번 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그런 시선을 가진 여자들은 날 좋아하던데.”

    “당신……, 꽤 뻔뻔하네요.”

    “뻔뻔? 그저 자기 직관이 뚜렷한 거야. 나 잘생겼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에게서 제일 먼저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외적인 요소, 즉 외모고 말이야.”

    그렇게 본인에 대해서 잘 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황당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 저렇게 잘생겼는데 여태 자기가 잘생긴 걸 몰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가식인 걸 안다. 주위에서 얼마나 찬양을 해댔겠어. 그래도 그렇지.

    “너무 당당하니까 할 말이 없네요.”

    “근본으로 돌아가 질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No야. 난 그 단발머리 작가 이름도 몰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난 까먹은 것뿐이에요.”

    “그렇다고 해두지.”

    그는 이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냐는 듯 이라를 힐끔 바라보며 씩 웃었다. 대답은 얻었으나, 왠지 다른 찜찜함이 남았다. 뭐가 저리 자기 직관이 뚜렷하고 잘났대, 참나.

    그와 실없는 대화를 하다 보니까 안 좋았던 감정이 조금 흐려졌다. 곧 있으면 자정인데. 뭐, 사실 상관없었나. 시선을 떨군 이라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문질렀다. 오늘 또 그와 함께 이슈가 됐으니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배소라에게 영상이 꽤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던 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행동에 그가 의아한 듯 그녀를 올려다봤다.

    “제이든.”

    “응.”

    “나 사고 쳐도 돼요?”

    이라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그런 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무슨 사고냐고 안 물어봐요? 당신 이름 팔리는 건데.”

    “뭐든.”

    “이상한 사람이야.”

    “당신 한정이면 늘 그래 줄 수 있지.”

    어깨를 으쓱인 그가 눈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당신이 오늘 밤 편히 잠들 수만 있다면.”

    그의 말에 남아 있던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터뜨려 버리자. 이 안 좋은 감정들을 더는 쌓아 두고 싶지 않았다. 환하게 웃은 이라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러 가요. 오늘은 푹 잘래요. 피곤해.”

    희고 가는 손을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그 작은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일어났다.

    “잘 생각했어.”

    그가 이라를 당겨 품에 안았다. 맞추기라도 한 듯 쏙 들어오는 여체가 만족스러웠다. 그의 단단한 품에 안긴 이라 역시 걱정 없이 미소 지었다.

    ***

    “저것들 단체로 미쳤네.”

    윤진이 휴게실 창밖으로 밑을 바라봤다. 따듯한 커피를 쥐고 있던 이라가 윤진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방송국 앞에는 배소라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 때문이었다.

    자정 전, 배소라의 매니저의 연락이 왔었다. 이미 잠든 이라는 못 봤고, 아침에 일어나 확인하니 사정사정하는 말뿐이었다. 결국, 출근 시간에 영상을 올렸고, 영상은 순식간에 온갖 곳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대부분이 이라의 편이었다. 일각에서는 공인을 상대로 잔인하다는 비판도 일어났지만, 묻히기 일쑤였다. 당연히 제이든의 이름도 함께 거론됐다. 오후가 되자, 저렇게 방송국으로 팬들이 몰려왔다.

    “저것들 저녁까지 있진 않겠지? 내 차 타고 퇴근해.”

    “데리러 온대요…….”

    힘없이 창밖을 보며 말하는 이라의 말에 윤진이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랬지 참. 야, 이라야.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이것도 복 아니야?”

    “뭐가요?”

    창에 기대 힐끗 윤진을 바라봤다. 윤진은 평소처럼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 원래 이러냐고 한탄하던 때가 불과 몇 개월 전이야. 이제 꽃길 아니겠어? 세상 제일 잘난 남자 꿰찼잖아, 너.”

    윤진이 장난스럽게 이라의 어깨를 툭 밀쳤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이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더 고생이죠.”

    “너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구만. 이번에 인터뷰 때문에 조사하다가 알게 됐는데, 제이든 리 에반스 성격 엄청 무심하다며. 그래서 로레인 왓슨하고 만날 때도…….”

    윤진이 아차 싶어 이라의 눈치를 봤다. 이라가 별 반응이 없자 윤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생각을 못 했네. 방송국에서도 마주쳤잖아.”

    “미국에서도 마주쳤어요. 이미 끝난 거 두고 뭐 어쩌겠어요. 난 괜찮아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배소라 일이 뜻밖으로 좋은 수확물을 걷었고, 이제 오해가 풀려 복직도 당당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하나였다.

    ‘남의 아이를 그에게 키우라고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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