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불구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절대 너는 넘볼 수 없어, 라는 저 눈빛을 당장에라도 깔아뭉개버리고 싶었다. 또다시 참아야만 하는 감정이 쌓였다.
“그래서 어쩌란 거죠.”
일부러 더 티 내고 싶지 않아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로레인은 주먹을 꽉 쥔 채 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로레인보다 이라가 더 배우 같았다.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숨기는 연기를 잘했으니까.
“그렇게 소중했던 아이를 죽인 건, 그쪽 아니던가요?”
“하.”
독한 말에 로레인의 눈이 커졌다. 이라는 지지 않고 파란 눈동자를 서늘하게 바라봤다.
“당신이 그 남자아이를 가졌던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없으니까. 두 번이나 그의 아이를 죽인 건 당신이잖아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꾸 그 남자를 찾아오나요?”
“……지금 나한테. 나, 나의 아이기도 했어요. 분명 그와 날 아주 많이 닮았을 아이였다고요!”
버럭 소리치는 로레인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로레인은 입을 앙다문 채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가 또다시 매섭게 이라를 노려봤다. 분을 삭이고 있던 건지 어느새 로레인의 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번졌다.
“나는 제이디 밖에 없어요.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흐으윽.”
참지 못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독기가 잔뜩 올라 쏘아댈 땐 언제고 서글프게 눈물을 터뜨리는 로레인은 한없이 미약해 보였다. 마른 어깨가 잘게 떨릴 정도로 서럽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제발 헤어져 줘요. 제발, 제발…….”
“하.”
한탄과도 같이 숨이 터져 나왔다.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멋대로 불러서 자기감정 다 쏟아 내놓고 울어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흐으윽, 흐읍. 당신은 아이가 있잖아요. 분명 그 아이 아빠도 있겠죠. 그건 제이디가 아니에요. 남의 아이를 그에게 키우라고 할 거예요? 그가, 그가 떠나보낸 자기 아이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알 수 없었다. 표현하지 않았어도 아이 이야기하던 그의 눈빛은 너무나 애절했으니까. 시간이 흘렀으나 조금도 그 그리움이 가시지 않아 보였으니까.
눈물을 참기 위해 꾹꾹 눌러 참는 게 보였으나 소용은 없었다. 로레인은 이라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울었다. 어렴풋이 느끼긴 했었다. 정말 악한 여자는 아닐 거라고. 했던 모든 일 중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는 거였다. 그 사랑이 어긋난 방법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그 사람한테 내 아들 키워달라고 할 생각 없어요.”
느릿하게 열린 이라의 입술과 견고한 시선은 올곧게 로레인을 향했다. 로레인은 그런 그녀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이건 우리 문제지, 당신이 이래라저래라할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이 알아야 할 건 딱 하나예요.”
주먹을 꽉 쥐었다. 새하얗게 질린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건 등 뒤에 가려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건, 바로 본인이라는 거.”
“…….”
허망한 눈빛이 닿았으나, 이라는 망설임 따윈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거 같네요. 로레인 왓슨 씨.”
동공이 부산스럽게 떨렸다. 차분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가려면 촉박하겠네요. 부디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떠는 로레인을 홀로 남겨둔 채 대기실을 나왔다. 탁, 온몸에 힘이 풀렸다. 모든 기운이 다 쓸려나간 것 같았다. 대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이라를 바라봤지만,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
“아씨, 대표님은 뭐라는데?”
“잘 달래 보라셔.”
“연락은 받아? 여기 있을 거 아니야, 불러와!”
소라의 짜증에 매니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게, 안 그래도 오늘 촬영 있다고 해서 갔는데 안 보이더라고.”
“다시 가서 찾아봐!”
“우선 알겠어, 내가…….”
똑똑.
언성이 더 높아질 찰나에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터라 매니저는 힐끗 눈치를 살피고는 서둘러 문으로 다가갔다. 누가 오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달칵, 문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허억!”
문밖에 있는 이의 모습에 너무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매니저의 반응에 소라가 인상을 쓴 채 휙 뒤돌았다가, 매니저와 비슷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제, 제이든 리…….”
“그쪽이 배소라?”
“네, 네?”
제이든은 반쯤 열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대기실은 매니저와 여자 둘뿐이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쓰윽 매니저를 내려다봤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까 제게 와 종알거리던 작가에게 물어보길 잘했다. 안 그래도 어떡하면 따로 만날 수 있나 고민했는데, 그에게 정신이 팔려 아무 정보나 조잘대준 덕분에 오늘 바로 만날 수 있었다.
탁. 등 뒤로 문을 닫은 제이든이 한 걸음 더 들어갔다. 넓게 느껴졌던 대기실에 키가 큰 그가 들어오자 이곳이 그리 넓어 보이진 않았다.
“어, 어떻게…….”
너무 놀란 와중에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짙은 화장 안으로 여자의 피부가 붉게 타올랐다. 그의 시선이 잠시 여자를 뜯어봤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생긴 상이 이라와는 정반대였으나, 표독스러움까지 감추진 못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한다면 이라가 배우를 했어야 맞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뜯어 봐도 이라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여잔데.
“말하는 걸 들으니 돈 좀 꽤 있는 사람인가 본데.”
다짜고짜 이 남자가 무슨 말이지? 소라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외국에서 초청되는 파티에 갔을 때도 보지 못한 남자였다. 웬만한 거물급 외국 배우한테 물어봐도 쉽게 못 만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친분을 쌓기 위해 웃거나 할 정신은 없었다. 그가 보이는 건 적대감과 하찮음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쉽게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남자가 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자가 풍기는 위압감에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벽에 기댄 채 여자와 매니저를 내리깔아봤다.
“별건 아니고, 내 여자한테 무례하게 군 거에 대해 조언하러 왔어.”
“…….”
한이라.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떠오르는 얼굴은 딱 하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방송국 내에서 파다했다. 그냥 지인이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지금 그가 보이는 행동은 그 마음을 완벽히 부쉈다.
“이라보다 어리더라고.”
자신보다 이라가 여섯 살 어렸으니, 이라보다 어리다는 건 그와 꽤 차이가 났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애 코 묻은 돈이 몇 푼이든 관심은 없는데 말이야.”
목소리만으로도 힘겨워 보이던 녹음 내용이 떠올랐다. 이라는 이곳에서 홀로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겠지. 고작, 운이 좋아 그녀보다 돈 조금 더 번 걸로 세상 다 가진 듯 구는 저 꼬맹이 때문에.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이라 앞에서 입 놀렸다간, 그 코 묻은 돈도 못 만지게 될 줄 알아.”
딸꾹.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해 본 채, 너무 놀란 탓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의 얼굴엔 또렷하게 조소가 담겼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제이든은 여자와 매니저를 느릿하게 번갈아 보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이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영화의 스틸 컷 같다고 감탄했을 수도 있었다.
“해명문은 올리지 마.”
“……왜, 왜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오히려 빨리 올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하는 말은 정반대였다.
바들바들 떠는 여자애가 조금 딱하기도 했다. 이라를 보며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을 테니까. 저 아래까지 굴러떨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지.
“말라면, 마.”
낮고 굵은 그의 목소리 뒤로 이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굳은 듯 멈춘 둘을 본 그는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 웃었다.
“궁금하면 올려 보고.”
할 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대기실을 나갔다.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까지 그는 여유롭기만 했다. 탁, 등 뒤로 닫히는 소리에 짙은 만족감이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제부터 속이 짜증 나도록 뒤집혔는데 잠잠해졌다. 늘 잠잠했던 그의 파괴욕이 종일 들끓었는데 이제야 살 것같이 후련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에릭의 대기실로 가는데, 저 멀리서 이라가 보였다. 그녀는 선배라는 사람과 함께였다. 이름이 뭐랬더라, 배…… 뭐였는데. 아무렴 중요하지 않아 이라를 부르려던 순간, 가까워진 그녀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진짜요?!”
복도가 울릴 만큼 소리친 건 이라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의 소리라면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이라의 목소리라 그는 한층 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찌라시요? 트위터예요?”
“난리 났어.”
윤진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제 휴대폰을 보며 무언가를 읽는 듯 입을 열었다.
“제이든 리 에반스가 한이라 피디한테 푹 빠져서 전 세계적으로 다 거절한 인터뷰를 한다고, 그것도 한국에서. 몇몇 사람들은 네 정보까지 알더구만. 아들까지 있는 이혼녀인데도 그가 아이까지 키우겠다고 할 정도로 빠져 있다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더만. 진짜야?”
윤진이 힐끗 보며 묻자, 이라가 화들짝 놀라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진짜겠어요?! 아씨, 우리 은우 이름이나 사진은 없죠? 하, 진짜.”
“근데 진짜 아니야? 저번에 보니까…….”
윤진의 뒷말을 끊은 건 제이든이었다. 두 여자 뒤에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다가와 씨익 웃는 얼굴로.
“이라, 인터뷰라도 했어? 하나도 틀린 말이 없네. 대단한데.”
“으악!”
제이든의 목소리에 윤진이 버럭 소리치며 물러났다. 이라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봤다. 두 여자의 반응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