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탁. 전 내용을 다 들은 녹음기를 끄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런 거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했던 건가. 아니, 애초에 이거 때문에 이라가.
“골랐어요?”
막 가운을 두른 채 나온 이라는 말랑말랑해진 얼굴을 그의 옆으로 쓱 내밀었다. 소파 뒤에서 배시시 웃으며 보자, 서늘하게 식어 있던 그의 표정이 아까처럼 다정하게 온기를 품었다.
“글쎄. 종류가 너무 많더라고.”
“그쵸? 웬만해서 다 배달이 되거든요. 음, 햄버거 같은 거 좋아해요? 아니면…….”
메뉴를 곰곰이 생각하는 이라는 입술까지 삐죽 내밀고 있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 터라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릭이 내일 방송국 간다고 했나.”
“아, 맞아요. 사전 인터뷰가 있어서 촬영하거든요.”
“나도 가도 돼?”
“갑자기요? 되긴 하는데…….”
에릭만 오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로레인도 함께 촬영이었다. 이라가 슬쩍 그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자, 그는 알고 있었는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친구 응원차 가는 거야.”
“……알았어요. 딱히 내가 말린다고 듣진 않을 거 같으니까.”
“당신 말은 들어.”
그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이라에게 입 맞췄다. 쪽쪽 거리던 그가 아예 본격적으로 고개를 틀자, 이라가 휙 뒤로 물러나며 그의 입을 손으로 폭 감쌌다.
“배고파요.”
“아아, 알겠어.”
씨익 웃은 그가 손을 올려 다시 목덜미를 감쌌다. 그에게 끌려가는 상체에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배고프다니까.
***
[이라!]
에릭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촬영장에서 대기 중이었던 이라가 함께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제이디에게 듣긴 했지만, 여기가 이라 직장이라니. 미국에선 그렇게 헤어져서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기쁜 미소가 얼굴에 둥둥 떠다녔다.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우선 이라는 어색하게 미소로 무마했다. 지금 에릭의 행동에 이곳에 있는 스태프 시선이 확 몰렸다. 더 이상 관심받는 건 사양이라고.
[제이디는 대기실에 있던데, 같이 오자니까 됐대. 혹시 싸운 거야?]
이라를 배려해 천천히 말해주는 에릭이었지만, 어느 정도 간신히 알아들을 뿐이었다. 대기실에 있게 한 건 이라였다. 저번처럼 남들 다 있는 데서 아는 척하면 정말 곤란했으니까.
[음, 저쪽이요.]
대답 대신 에릭을 기다리는 스태프를 가리켰다.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영어 실력 탓이었다. 다행히 에릭이 한 번에 알아듣고는 방긋 웃었다.
[내 멋진 모습도 기대하라고.]
[그러죠.]
고개를 끄덕인 이라가 웃자, 에릭이 인터뷰 좌석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붙는 여러 스태프가 바쁘게 움직였다. 촬영은 무난하게 될 것 같았다. 인터뷰어도 미리 기다리다가 에릭과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홍보가 주목적이었으니 포스터와 스틸 컷이 촬영장에 준비돼 있었다. 다른 문제 없이 순탄하게 될 것 같아 안심하던 찰나, 막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무리가 보였다. 시선을 옮기려던 이라는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고는 그대로 멈췄다.
에릭과 같은 파란 눈동자지만, 그처럼 따스함과 장난기는 없었다. 처음 마주친 파란 눈동자에는 놀라움, 당혹감이 물들었고 그다음에는 분노, 언짢음, 그리고 서글픔이 보였다.
[왓슨 씨, 저쪽으로…….]
함께 온 매니저가 이라에게 시선을 멈춘 로레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이라를 바라본 채 그대로 멈춰있던 터라 주변인 모두가 그 시선을 따라 이라를 바라봤다.
촬영 시작 전이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라와 로레인 주변만 고요한 듯했다. 시선을 피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자 로레인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제 옆의 누군가에게 뭐라 말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이라의 어깨를 톡톡 쳤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 로레인의 근처에 있던 사람이었다.
“조금 이따가 촬영이 끝나고 왓슨 씨의 대기실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국계 미국인인 직원의 정중한 말에 이라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로레인과 내가 할 말이 있을까.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
“죄송합니다만, 사적으로…….”
“촬영에 대해 피디님과 할 얘기도 있으시답니다.”
“그렇다면 메인 피디님 불러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휙 틀었다. 빠른 걸음으로 세트장을 나왔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야겠지만, 복잡한 기분에 에릭의 대기실로 향했다. 제이든이 거기 있을 테니까.
대기실 앞으로 도착해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였다. 안에서 여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칫했던 이라가 똑똑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어? 한 피디님.”
“아, 작가님.”
이번 영화 홍보 담당 작가였다. 단발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작가는 오늘따라 차분한 원피스에 단화를 신어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왜 꾸몄나 했더니 제이든과 에릭 때문이었군.
작가는 이라의 등장에 어리둥절하다가 제이든 쪽을 보고는 다시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귀까지 새빨개진 걸 보아선 아까까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것 같았다. 내가 들어와서 망친 건가. 슬쩍 제이든을 바라보니, 그는 평소처럼 이라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촬영 아직 시작 시각 아닌데.”
작가가 의아하게 이라의 방문을 물었다. 눈을 깜빡이던 이라가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빈 대기실에 말소리가 들리길래요. 혹시나 해서…….”
“아, 제이든 씨가 혼자 계셔서요. 촬영 얘기 좀 나누고 있었어요.”
방긋 웃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작가니까 그럴 수 있지. 근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건데. 뚱한 얼굴로 둘을 보던 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이라.”
그의 부름에 이라가 휙 작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정정했다.
“……피디님.”
“네, 무슨 일이시죠.”
대답하자, 제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촬영장에 가 보고 싶은데 안내 좀 해주세요.”
“그건 제가…….”
“아, 감사합니다. 마침 궁금했었는데 작가님 덕분에 해결됐어요.”
제이든은 미소 짓고서는 미련 없이 이라에게 다가왔다. 얼떨결에 밖으로 밀려나자, 함께 나온 그는 등 뒤로 문을 탁 닫았다. 쓱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는 고개를 내려 작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
“아주 다정하던데요.”
슬쩍 그를 노려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해?”
“촬영장이나 가요.”
먼저 성큼성큼 걷지만, 뒤에서 그가 웃는 게 다 들렸다. 젠장. 그렇게 웃어줄 건 뭐야. 속으로 투덜거렸다. 촬영장까지 보는 눈이 많아 둘 다 따로 사적인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등장에 다시 시선이 몰렸다. 슬쩍 자리를 피하자, 타이밍 좋게 에릭이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멀리서 준비 중이던 로레인도 흔들리는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봤다. 물론 그는 로레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이상한 구도에 멀찍이 떨어진 이라가 그들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할리우드라 이거지. 전 여친이랑 비즈니스도 가능하시고 말이야.”
홀로 중얼거리며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짜증 나. 아까 그 작가랑 화기애애했던 것도 신경 쓰이고, 남들 다 보는 데도 저렇게 제이든만 빤히 쳐다보는 로레인도 싫었다.
그것뿐인가? 방송국에 그가 온 뒤로 아주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난리가 났다. 외근 나갔던 사람들까지 기어들어 올 정도니 말 다했지. 심지어 국장까지 그를 보러 왔었다. 로버트의 아들이니 좋게 보여 나쁠 게 없어서겠지만.
뚱한 채 있으니 에릭과 로레인의 사전 인터뷰가 시작됐다. 저 멀리서 제이든이 이라를 보고 있었지만, 오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낸 덕분에 그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에릭과 로레인의 인터뷰를 보며 어느새 이라도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 쉬는 시간을 알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다시 촬영장이 부산스러워졌을 때 누군가가 이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아, 메인 피디님 불러드리겠습니다.”
아까 그 사람이었다. 이라가 윤진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앞선 직원이 간곡히 부탁했다.
“몇 분이면 됩니다. 시간 좀 내주세요.”
하아. 대놓고 한숨을 내쉰 이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시선을 돌려 제이든을 찾았으나, 그 짧은 사이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에릭은 저기 있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직원이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었다. 어차피 쉬는 시간은 짧았다. 인상을 풀지 않은 채 직원을 따라가자, 로레인이 배정받은 그녀의 대기실에 도착했다. 문까지 열어줘 이라가 무표정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많던 직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대기실에는 로레인만 있었다.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외모였다. 스타일링한 머리와 화장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드디어 보네요.”
차분한 한국어에 이라는 파란 그녀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한국어는 입안을 쓰게 하기 충분했다. 외국인인 그녀가 이렇게까지 한국어를 잘하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아니까.
“시간이 없으니 바로 말할게요. 정말 그와 만나는 게 맞나요? 제이디와 정말, 정말로 진심인 건가요? 그가 당신한테 진심이에요?”
“……제가 대답해 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대답이 됐는지 로레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진심일 리가 없잖아……. 제이디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데.”
“과거형 아닌가요.”
차갑게 던진 말에 로레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우리 둘 사이를 아는 척 말아요! 당신 지금 제이디를 이용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 아이도 있잖아요!”
움찔. 저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로레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등 뒤로 손을 숨긴 채 바라봤다. 로레인은 이를 악물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에게 남의 아이를 키우라고 할 건 아니겠죠? 그가 자기 아이를 얼마나 원하는데. 나는 그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예요.”
감히 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