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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52화 (52/70)
  • 52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찢어지듯 날카로운 음성이 대기실을 울렸다. 거울 앞에 앉아 있던 배소라의 얼굴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그 뒤에 차분히 서 있던 이라가 표정 변화 없이 배소라를 바라봤다.

    “말 그대로예요. 저희 쪽에서 그때 배우님과 제가 찍힌 영상이 있습니다. 지저분하게 영상 폭로보다는 배우님께서 직접 오해라고 그때 일 해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하. 오빠, 내 대기실에 아무나 들여도 돼? 일 이렇게 할 거야?”

    배소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에는 자신의 매니저에게로 향했다. 남자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라를 바라봤다. 하아. 남한테 피해 주는 거 딱 질색인데.

    “그럼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몸을 돌렸다. 제이든 미팅이 당겨진 덕분에 시간이 촉박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대기실을 나가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배소라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어떻게 여기 있죠? 잘렸다고 들었는데.”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물끄러미 바닥을 응시하던 시선을 올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여전히 기고만장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삐딱하게 이라를 보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배우님 때문에 직장까지 잘렸으니까, 괜히 이런 일까지 언급하면서 이미지 더 망치지 마시고 해명해 주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여기 있냐고요. 한이라 씨.”

    “저는 할 말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뒤를 돌기 직전 배소라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 제이든 리 에반스 카드 들고 복직했다는 말이 맞나 보네?”

    “…….”

    “저기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요? 사진 보니까 그쪽 맞는 것 같던데.”

    암암리에 말이 퍼져나가는 건 알고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까지 일 줄이야. 어차피 며칠 후면 전부가 알게 되는 거라 딱히 극비는 아니었지만.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일 아니니까 이번 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나 협박해요?”

    “네.”

    피식 비웃던 배소라의 말에 단정하게 대답했다. 순간 이라를 보는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변했지만, 이라는 변함없는 얼굴로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영상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얼마나 피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상 터지면 배우님께 피해가 가는 건 확실하겠죠. 그 전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배소라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제는 진짜 나가고 싶어서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그런 이라를 붙잡았다.

    “얼마 원해요?”

    “……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마주 보자, 배소라는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얼마 원하냐고요. 그때 합의금이 얼마였지, 오빠?”

    짜증 섞인 배소라의 말에 매니저가 깜짝 놀라 이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 삼천.”

    “육천 줄게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배소라는 자기가 무슨 인심이라도 쓴 마냥 이라를 바라봤다.

    “그때 상핸지 뭔지 그냥 폭행으로 처리하고 합의금도 확 줄여준 거잖아요. 전치 몇 주가 나왔는데. 내가 일반인도 아니고.”

    “……삼천, 육천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쉽게 부르시네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대기실 들어온 순간부터 녹음이 되고 있었다. 혹시 몰라 틀어놨었는데.

    “이봐요. 금액이 마음에 안 들어? 일억은 받아 가야겠어?”

    “돈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결국 돈 때문인 거잖아요. 자존심 세우기는. 아, 알았으니까 내 매니저한테 번호랑 계좌나 남기고 나가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이며 아예 몸까지 돌렸다. 생각 짧고 예의 없는 것쯤이야 예전에 촬영할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꾹 눌러 참던 이라가 저를 보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매니저를 한 번 보고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

    “내일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해명 올리세요. 기사로 확인할 테니까. 내일 자정까지 없으면 영상 올리겠습니다.”

    휙 몸을 돌려 대기실을 나왔다. 뒤에서 찢어지는 음성으로 배소라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잘 들리진 않았다. 복도를 빠르게 걷는데 뒤로 다급한 발걸음이 들렸다. 뒤돌아보니, 매니저가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하, 한 피디님! 한 피디님, 잠시만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 매니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소라가 성격이……. 아, 정말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사과는 매니저님이 아니라 배우님께서 하셔야죠.”

    “한 피디님, 이번에 소라 새 드라마 나오거든요. 사전 제작이라 이미 다 끝내고 오늘 홍보 영상인데, 뭐 하나라도 걸리면 진짜 큰일 납니다.”

    “해명 안 올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아뇨! 올립니다. 올려요. 영상은 진짜 안 돼요. 대신 드라마 끝나고 휴식기 들어갈 때…….”

    “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떨궜던 이라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매니저를 바라봤다.

    “내일 자정입니다.”

    휙 몸을 돌렸다. 매니저가 몇 번 더 이라를 불렀지만 무시한 채 부서가 있는 층으로 돌아왔다. 곧장 아무도 없는 자료실로 들어간 후 문을 탁 닫았다.

    “…….”

    꾹꾹 눌러 참던 분노로 치가 떨렸다. 꽉 말아쥔 하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계속 꾹꾹 참는데, 눈가는 이미 벌게졌다.

    “하아…….”

    살면서 억울한 일 겪는 거 한두 번도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막 성인이 됐을 때, 엄마 같지도 않은 여자한테 할아버지 재산 다 빼앗겼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그땐 그저…….

    “어렸으니까…….”

    그런데 서른 먹은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달라진 게 없네. 힘없고 능력 없고.

    “하아.”

    몸에 힘을 탁 풀었다. 문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순응할 건 해야지. 분노를 삭이고 기댔던 몸을 바로 하니 자료실 문이 달칵 열렸다. 들어오던 직원이 안에 있는 이라를 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찾을 게 있어서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괜히 어색하게 웃은 이라는 그럼 이만,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자료실을 나와 사무실 향하는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서 윤진이 보였다. 외근하고 들어오는 모양인지 사람들과 함께였다.

    “어? 한이라. 퇴근 안 했어?”

    윤진이 알은체하며 다가오자, 옆에 있는 사람들도 어색하게 이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팀이지만 이라보다 연차가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있었다. 이라 역시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한 후 윤진을 바라봤다.

    “이제 하려고요.”

    “그래? 아, 먼저 들어가. 얘는 어제부터 퇴근을 안 하던 중이라.”

    윤진의 말에 슬쩍 서로 눈치 보던 팀원들이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진이 다시 물었다.

    “배소라 하고는 얘기 잘 됐어? 지랄하지 않든?”

    “하죠. 어쩌겠어요,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그년 언젠가 한 방 크게 먹을 거다. 여튼 너 빨리 들어가. 내일 일정 빡빡한데 쉬어야지. 아, 밥은 먹었어? 밥 사줄 테니까 먹고 들어가.”

    “괜찮아요. 선배 회의 있잖아요.”

    그리고 내내 제이든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윤진에게 인사한 후 간단히 짐을 챙겼다. 에코백에 이것저것 넣고 휴대폰을 바라봤다. 몇 분 전 제이든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도착했어. 천천히 내려와.>

    단조롭기 그지없는 문자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아까 전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숨이 차오르도록 뛰었다.

    “하아, 하아.”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익숙한 고급 세단이 보였다. 그 역시 이라를 봤는지 그녀의 앞으로 이동해 왔다. 앞에 정차한 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탁 닫았다.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술이 먼저 덮쳤다.

    익숙한 듯 목덜미를 쓰는 큰 손에 기대 입맞춤에 응했다. 그에게서 나는 시원한 향에 내내 쌓였던 피곤이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지분거리던 입술을 살짝 뗀 그가 이라를 보며, 녹색 눈동자가 가늘게 보이게 눈을 떴다.

    “야근이라더니, 다음 날 점심에 퇴근하는 게 어디 있어.”

    “별수 있나요.”

    씨익 웃은 이라가 방금까지 맞붙어 있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점심 먹었어요?”

    “아니. 당신이랑 먹으려고.”

    “얼른 가요. 나 우선 씻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아쉬운 듯 바라보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호텔까지 차로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머리 감고 간단히 씻긴 했지만, 찝찝함은 여전했다. 운전하는 그를 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슬쩍 확인했다. 은우에게서도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룸서비스로 시켜 먹을까?”

    어느새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다시 에코백 안에 넣었다.

    “좋아요. 배달도 있고요.”

    “배달? 아아. 잘 안 해 봐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시킬게요.”

    주차한 차에서 내리면서 방긋 웃었다. 이라의 손에 들린 무거운 에코백을 한 손으로 받아든 그가 의아한 듯 바라봤다.

    “되게 많이 들었네. 가방 사줬잖아.”

    “그 비싼 거에 어떻게 이런 거 담아요.”

    전용 엘리베이터로 룸까지 한 번에 올라간 이라가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좀 씻고 올게요. 참.”

    휴대폰에서 배달 앱을 켜서 그에게 건넸다.

    “좀 보고 있어요. 난 다 좋아요.”

    “응.”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던 그가 소파에 편히 앉았다. 종류별로 편히 되어 있는 앱을 보며 신기해서 피식 웃는데, 그녀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온 듯 띠롱 울렸다.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음식점을 보느라 잘못 터치가 돼 문자가 열렸다.

    <한 피디님, 배소라 배우 매니저입니다. 오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해명 글을 올리는 건 회사와도 협의해야 하는 문제고, 당장 시간이 촉박합니다. 대신 먼저 저희가 성의를…….>

    길게 온 연락에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배소라? 이라 때문에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나오면 물어봐야겠다 싶어 연락을 다 읽지 않고 끄려는데 열려 있던 다른 앱이 켜졌다.

    “이런.”

    녹음기였는데 재생 버튼을 잘못 눌렀다. 정지 버튼을 누르려다가 녹음 중간 부분이 터치가 됐다.

    -육천 줄게요. 그때 상핸지 뭔지 그냥 폭행으로 처리하고 합의금도 확 줄여준 거잖아요. 전치 몇 주가 나왔는데. 내가 일반인도 아니고.

    -……삼천, 육천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쉽게 부르시네요.

    -이봐요. 금액이 마음에 안 들어? 일억은 받아 가야겠어?

    -돈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결국 돈 때문인 거잖아요. 자존심 세우기는. 아, 알았으니까 내 매니저한테 번호랑 계좌나…….

    그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게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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