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게 무슨 일이냐?”
윤진이 이라를 힐끗 바라보며 웃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라는 이를 바득 갈며 챙겨온 서류를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그래도 너랑 아는 사이라니까 이렇게 부른 거 아니겠어?”
윽. 제이든 진짜! 팍팍 거칠게 서류 검토를 끝낸 이라가 후, 하며 숨을 뱉었다. 원래라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담당 PD인 윤진과 작가만 왔어도 될 일에 굳이 이라가 온 이유는 오직 윤진 때문이었다.
제이든이 따로 불렀으니 당연히 이라도 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 때문에 끌려 나왔다.
“나 바쁜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라가 눈을 찢어 윤진을 노려보자,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배소라 스케줄 알잖아. 오히려 잘 된 거 아니야? 배소라 내일 방송국 오는데, 미팅 당겨져서 오히려 시간 확보됐잖아.”
“그러니까요. 확보되면 좋은 건데, 왜 여기에 날 데리고 와요.”
“왔는데 투덜거리지 말고…….”
키득키득 웃던 윤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의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외국인 하나가 보였다. 이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아는 얼굴에 어색하게 웃었다. 제니퍼였다.
제니퍼가 문을 열었고, 제이든이 먼저 들어왔다. 분명 아침에 자는 얼굴을 보고 나온 참이었는데, 곱게 차려입은 그는 또 달랐다.
“안녕하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락받은 배윤진 피디입니다.”
아까와는 달리 장난기 쏙 뺀 윤진이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갔다. 윤진이 웃으며 제이든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들어오며 이라에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뒤늦게 윤진을 보며 짧게 악수를 했다.
“제이든 리 에반스입니다. 이쪽은 제 매니저 제니퍼 브라운 실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니퍼 브라운입니다.]
윤진과 제니퍼를 보던 제이든이 자리에 앉으며 이라를 힐끗 바라봤다. 제니퍼와 알은체하며 앉던 이라 역시 제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짧은 시간에 그를 노려봤던 이라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다.
괜히 웃음이 터질 뻔했던 제이든은 윤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사에서 한국어가 능통한 직원이 매니저와 동행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있으니 같이 오진 않았는데, 다른 일정은 매니저와 그 직원이 함께 있으니 의사소통엔 불편함 없이 될 겁니다.”
생각보다도 한국어를 너무 잘해 놀랐다. 아무리 영상을 뒤져봐도 제이든이 한국어를 하는 영상은 거의 없었다. 가끔 한국에 대해 고유명사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없었는데, 막상 들으니까 한국인처럼 위화감이 없었다.
그런데 저 얼굴은 위화감이 너무 심했다. 카메라가 절대 담아내지 못한 얼굴이다. 가끔 서양 배우를 보면 전성기가 지났을 때 많이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혼혈이라 그런지 전성기 미모를 그대로 유지 중이었다.
“그럼 식사하시면서 이야기 천천히 나눌까요?”
윤진이 웃으며 제이든과 제니퍼를 번갈아 봤다. 제니퍼가 웃으며 대답하는 동안, 제이든은 이라를 바라봤다. 예의 차려 하는 인사조차 없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침은 먹었어? 빈속은 아니겠지.”
그가 대각선에 앉은 이라를 향해 말하자, 윤진과 제니퍼의 시선이 이라에게 쿡 박혔다. 그냥 하나의 장식품처럼 가만히 있겠다 다짐했던 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저 남자가!
당황해 둘의 눈치를 살폈다. 티 내지 말라니까, 정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준비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드시고 싶으신 걸로 주문하시면 됩니다.”
“난 당신 먹는 거.”
“…….”
하. 제이든의 시선을 쳐낸 후 힐끗 윤진을 바라봤다. 제니퍼야 알고 있어 놀라진 않겠지만, 윤진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는지 윤진의 눈이 흥미로 가득 찼다.
누가 봐도 연인이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라한테 시선을 못 떼는 게 느껴졌는데, 저렇게까지 티를 내다니. 사진 찍힌 것보다도 더 다정하고 은밀한 사이 같았다.
“큼.”
목을 가다듬은 이라가 서둘러 직원을 불러 주문했다. 차례로 식사가 나오는 걸 보며 윤진에게 준비한 파일을 넘겼다.
“따로 언급하고 싶으신 것들이나 정보 있으시면 저희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대본은 잡지 않을 건데, 사전 인터뷰는 진행하고 본격적인 촬영 들어가게 될 거예요.”
윤진의 말을 제이든이 제니퍼에게 전했다. 원래라면 반대 상황이 익숙했을 테지만, 둘이 일한 시간이 길어 그런가 서로 주고받는 게 당연한 듯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저희 쪽에서는 사생활 문제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걸로 하죠.]
제니퍼가 태블릿PC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제이든을 바라봤다.
[작품 얘기만 하고, 왓슨 씨에 대해서는 역할 외의 질문은 받지 않기로 협의하는 걸로 하죠.]
미리 회사와 얘기된 내용이었다. 제니퍼의 말을 알아들은 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도 최대한 사생활 언급은 없을 겁니다. 다만, 기본적인 취미나 공백기 동안 있었던 일화 등을 여쭙고 싶은데 그건 괜찮을까요?”
제이든은 옆에서 받아적는 이라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던 윤진의 목소리에 이라가 더 바짝 집중했다. 조금 전에 애피타이저로 나온 죽이 식고 있었다. 다음 질문을 생각하며 준비 중이었는데, 대뜸 낮은 목소리가 윤진의 말을 갈랐다.
“식사부터 먼저 하죠.”
그가 숟가락을 들자, 윤진과 제니퍼가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 역시 끊긴 흐름에 펜 대신 수저를 들었다.
영어가 되는 윤진과 제니퍼가 어느 정도 소통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이라 역시 집중하며 죽을 떠먹었다. 향긋하게 퍼지는 전복죽의 식감에 잠시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한 입씩 그녀의 몫의 음식이 비워지는 걸 보며 제이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미안해요. 야근이에요.”
-언제 끝나는데?
힐끗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오후 8시가 넘었다. 실제로 일 때문에 바쁜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일도 겹쳐 퇴근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원래 출퇴근이 정해지지 않은 게 일상이었지만.
“음, 잘 모르겠어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소곤소곤 속삭이던 이라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목소리가 들릴만한 위치에 사람은 없었다. 괜히 다른 소문에 휩싸이면 좋지 않았다. 아직은 쉬쉬하고 있지만, 관계자를 비롯한 방송국 사람들이 제이든 캐스팅을 암암리에 알고 있으니까.
-끝날 때 연락해. 데리러 갈게.
“덕분에 가까워졌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위험하잖아.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 그런 그의 말에 이라가 휴대폰을 잡은 채 물끄러미 파일이 가득한 테이블을 바라봤다.
당연했던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라는 취업한 이후로 내내 이렇게 지냈다. 밤낮없이 일했고, 남들 자는 시간에 숨죽여 집에 들어가 혹여 물소리 때문에 깰까 편히 씻지도 못하고 옷가지만 챙겨 나왔다.
다른 직원들은 집에 가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씻고만 왔다고 투덜거릴 때, 십 분도 맘 편히 머물지 못했던 이라는 입을 꾹 다물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은우의 얼굴만 한참을 봤으니까.
-꼭 전화해. 새벽이라도.
그는 이라가 평생을 모르고 자라왔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줬다. 너무 멀리 있어 생각도 못 했던 것들을 마치 익숙하게 누렸던 사람처럼…….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이라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알았어요.”
그와 통화를 마치자 타이밍 좋게 소회의실로 윤진이 들어왔다. 피곤한 듯 점심때와는 달리 대충 짧게 머리를 묶은 윤진은 이라의 옆에 털썩 앉았다.
“어때, 생각은 끝났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직접 보고 말하려고요.”
“뭘 또 유예기간까지 줘? 그냥 영상 터뜨리자니까.”
“그것도 생각은 해 봤죠. 근데 배소라가 그때처럼 직접 자기 인스타에 사과문이든 반성문이든 오해라고 올려주는 걸로 끝날 것 같아서요.”
윤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이라는 침착했다. 윤진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성질냈다.
“그걸로 뭐가 돼? 너 이거로 분이 풀려? 완전 끌어내리자고 할 땐 언제고!”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짓밟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현실이 그럴 수가 없었다.
“영상을 터뜨리면 배소라한테 피해는 가겠죠. 근데 그것도 잠깐일 것 같아요. 어쨌거나 식었든 안 식었든 실수로 커피를 쏟은 건 내가 맞으니까요.”
“그걸 거짓으로 자기가 당한 것처럼 꾸몄잖아?”
“영상 터뜨리면 며칠 뜨겁고 말 거예요. 배소라가 끝까지 인정 안 하면 또 그럴 수밖에 없죠. 인정해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니까요. 지금 기사 때문에 어차피 내 얼굴 다시 다 팔렸으니까 사과문 하나로도 이슈는 충분히 될 것 같아요. 회사에서도 찝찝한 거 없이 내 오해 풀리는 거고, 그거면 됐어요.”
“너……. 하, 이 답답이.”
윤진이 성질을 내며 휙 고개를 돌렸지만 더는 뭐라 태클 걸지 않았다. 이라는 그때 올라왔던 기사 몇 개를 스크랩한 파일을 바라봤다.
지금 제이든과 함께 얼굴이 팔린 이상, 더 자극적인 이야기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은우 역시 휴대폰을 사용할 줄 아니까 어디서든 이라의 기사를 볼 수 있기도 했고. 우선 지금은 오해만 바로잡으면 된다.
절대 배소라를 용서한 건 아니다. 그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상은……. 최후의 수단으로 보류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