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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50화 (50/70)
  • 50화

    뭐라고? 이라가 눈을 깜빡이자, 제이든은 담담하게 말했다.

    “같이 살자.”

    “……동거하자고요?”

    “응.”

    “우리 사귀지도 않는데요?”

    이라가 눈을 깜빡이자, 그가 잠시 멈춰 있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안 사귀지. 사귀어 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같이 살 수 있잖아.”

    무슨 억지야 이게.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황당해서 이게 맞나 싶었다.

    “뭐예요, 진짜. 장난치지 마요.”

    “진심이야. 당신한테 소중한 집이겠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거 싫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혼자 살게 된 지 몇 개월 안 됐지만, 가끔 어디 사는지 모를 술 취한 사람이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같이 살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면 얼른 가요. 당신 덮을 만큼 큰 이불도 없고, 줄 옷도 없어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일어나자, 그가 일어나는 이라의 손을 당겼다. 휘청이며 넘어진 이라의 엉덩이에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진심이야. 덧붙이자면 내가 이렇게 매달리는데 왜 안 받아줘.”

    “……강요 안 한다면서요.”

    “내 인내심의 한계를 보는 게 취미야? 그리고 강요 아니고 질문이야.”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잠시 그와 마주 보던 이라는 힘없이 시선을 내렸다.

    “당신한테 의지하면서 살아갈까 봐 그래요.”

    이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 살면서 누군가한테 딱 한 번 의지해 봤어요.”

    다시 시선을 올린 이라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십 년 전 당신요. 하루였어도 나한텐 처음이었어요. 그 후로도 쭉 홀로 버티면서 살았는데, 다시 당신이 이렇게 있으니까.”

    아등바등 붙잡고 있지 않아도, 편히 나를 받쳐주니까. 손바닥이 찢기고 부르틀 정도로 붙잡고 있던 언제 끊어질 줄 모르는 썩은 밧줄을 놓아버릴까 봐.

    “난 늘 혼자서도 잘 살았는데, 다시 당신이 주는 안락에 의지하며 살아가면.”

    언젠가 그 안락이 지겨움으로 사라지면, 그때에서는 썩은 밧줄조차 잡지 못할 테니까. 그대로 추락해 산산이 부서져 버릴 테니까.

    “우리의 감정이 식은 뒤에 난 무너져요.”

    옅은 미소를 지은 이라가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사랑은 짧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불안정했다. 사랑이 주는 순간의 기쁨은 크지만, 그만큼 도박이었다.

    내내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식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낮고 굵은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하게 아팠다. 딱히 다른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막상 들으니 아프네.

    “무려 십 년이야. 고작 하루 만난 널 십 년을 그리워했어. 그래, 십 년 내내 당신 생각으로 미쳐 있지 않았던 건 맞아. 근데 난 그리웠어. 당신이 많은 밤 꿈에 나올 정도로.”

    “……그건.”

    “식을 거야. 그러나 그 속도는 아주 느리겠지.”

    쿵쿵. 점점 박동이 거세지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게 제 것인지, 기대 있는 탄탄한 그의 가슴에서 들리는 건지 몰랐다. 어쩌면 둘 다 똑같은 박동으로 나란히 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곤란했다. 무척이나 곤란했는데, 늘 그랬듯이 어쩔 수가 없었다. 추락할 걸 알아도 기꺼이 그를 믿고 손을 놓을 만큼, 그가 좋았다.

    “확실히 해요.”

    이라가 단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무 잘 알고 있겠지만, 나한테 일곱 살 먹은 아들 있어요. 우리 은우는 어떤 상황에서든 내 아들이에요.”

    “당신한테 은우가 있다는 거 다시 만나고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배제한 적도 없고.”

    “은우한테 상처를 줄 수 없어요. 그런…… 그런 상황은 만들지 마요, 우리.”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도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거라도 은우에게 상처 주는 방향이 된다면, 이라는 기꺼이 은우만을 위할 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각오한 이라의 눈은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줬다. 적어도 거짓되게 숨기고 피하지 않는, 도망치지 않고서 똑바로 보여주는 그녀의 마음 하나면 됐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네.”

    제발.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이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만나는 거, 비밀이에요. 지켜요.”

    “……확답은 못 해.”

    “안 돼요, 진짜!”

    이라가 그의 위로 올라탄 채 어깨를 붙잡았다. 제이든과 사귄다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난리가 날까. 지금도 그 사진 하나로 이 난리가 났는데.

    “방송국 가서도 절대 티 내지 마요. 안 그래도 미치겠어요. 다들 나랑 껄끄러워서 말은 잘 안 하지만 당신 얘기 묻고 싶은 게 말하지 않아도 들릴 정도라고요. 눈빛들이 아주……!”

    와다다 쏘아대는 이라의 입술을 그가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이 상황에 키스해 버리니 어이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힘을 풀었다. 못 말린다, 정말.

    한창 입술을 지분거리던 그가 얇은 이라의 허리를 만지며 손을 내렸다. 봉긋한 엉덩이를 만지던 그가 입술을 떼며 가까이서 속삭이듯 말했다.

    “침대가 필요한데.”

    “……하아, 네?”

    “바닥에서 하면 불편하거든.”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평소보다 더 관능적이었다. 이미 입맞춤으로 정신을 한 번 빼놓은 덕분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엔 불가능했다. 가까이서 대놓고 유혹하는 이 녹색 눈동자에 이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모르겠다, 이젠.

    ***

    부스럭. 커튼 뒤로 희미한 빛에 제이든이 눈꺼풀을 스르륵 올렸다. 잠시 초점이 나갔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 위로 부드러운 침구가 덮여 있었다. 그가 옆자리를 보고선 잠이 덜 깬 얼굴로 느릿하게 피식 웃었다.

    “재빠르네.”

    이미 옆은 빈자리였다. 저녁에 바로 이라를 데리고 자주 이용하는 호텔로 갔다. 자주 이용했던 VIP 실 장기 계약서를 바로 작성하고 일시불로 한 달 치 금액을 결제했다. 호텔은 당장 올 곳이 없었으니 왔을 뿐이고, 한 달 안에 그녀와 함께 살 집을 구입할 거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였다. 이라가 살던 원룸보다 호텔이 그녀의 회사와 더 가까웠다. 어제 오며 걸어서 30분도 안 걸린다던 이라의 말이 생각났다.

    “……카드를 줄 걸 그랬네.”

    아니지. 이라가 면허가 있던가. 어쩐지 개운한 몸을 끌고 샤워하고 나온 그가 휴대폰을 봤다. 어제 이라를 닦달해 당장 필요한 짐만 챙겨 나오게 했다. 그 대부분이 일에 관련된 거였지만.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켜니 연락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연락은 가볍게 무시한 채 이라에게 전화했다.

    “…….”

    한참을 가던 연결음이 뚝 끊기고 안내 음성이 나왔다. 매우 바쁜가. 괜히 미안해졌다. 새벽 내내 붙잡고 있던 게 생각나서.

    지이잉.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담당 매니저 제니퍼였다. 그녀와는 그가 데뷔한 이후로 쭉 함께 일하고 있었다. 뭐, 어제까진 기분이 그다지 별로였는데, 지금은 괜찮았다. 오히려 꽤 좋은 편이었다. 어젯밤에 꽤 수확이 쏠쏠했으니까.

    대놓고 흔들리고 있는 건 알았지만, 어제는 정말로 그녀의 옆자리를 정식으로 허락받았다. 그가 힐끗 빈 침대를 바라봤다. 함께 지내는 것 역시도.

    그가 꽤 기분 좋은 듯 전화를 받았다.

    [그래. 제니.]

    -[이제야 전화가 되는군요.]

    체념한 듯한 제니퍼의 목소리에 제이든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거실로 나갔다. 넓은 VIP 실은 햇살이 아주 잘 들어왔다. 층수도 높은 덕분에 뻥 뚫린 도심이 다 보였고.

    [난 한국에 아주 잘 도착했어.]

    -[그래요. 저희도 이제 막 도착했거든요. 누가 연락을 아주 곱게 갈아드실 동안 말이죠.]

    [그거참 다행이네.]

    그가 씩 웃었다. 좀 출출하네. 이라는 아침을 먹었을까. 방송국에 가도 되려나, 어제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가 아, 하며 말했다.

    [스케줄 말이야. 당길 수 있나.]

    -[오, 제발. 왜 그러십니까? 대체 무슨 스케줄이요?]

    [미팅이랬나.]

    -[내일이에요. 빨리 해치우고 싶은 건 알겠지만, 고작 하루도 더 못 기다려 주시는 겁니까?]

    [그래도 잠깐 관계자를 만나는 건 괜찮지 않나.]

    -[무슨 속셈이에요, 제이디.]

    [속셈이라니. 그저 함께 일할 사람들을 미리 보자는 거지.]

    -[함께 일하다뇨. 인터뷰 포함 촬영은 고작 하루고, 영화 홍보 영상까지 2주도 안 되는 일정이에요.]

    [어쨌거나, 점심이나 하면서 말하면 좋겠네. 조율해서 연락해줘. 아, 그리고 한국에 아파트 한 채 살 거야. 그건 한 달 줄게. 이만 끊어.]

    -[네? 진심……!]

    뚝.

    전화를 끊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5년을 들볶였는데 이 정도는 약과지. 꽤 너그러운 처사라고.

    그리고 정확히 이십 분 뒤에 제니퍼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바뀐 시간과 장소까지 들은 후에 그는 장소가 일식집이라는 말에 나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 분 뒤, 이라에게 전화가 왔다.

    “응.”

    -당신이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그가 웃었다.

    “어디야? 울리는데?”

    -비상계단이에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이죠? 당신이 지금 우리 불렀죠?

    “아침은 먹었어? 일찍 나갔더라.”

    -진짜 이럴 거예요?

    다급한 이라의 목소리에 그는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조금 이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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