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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9화 (49/70)
  • 49화

    “으으으! 한이라, 축하해!”

    팡! 팡!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죽에 귀가 얼얼했다. 윤진은 활짝 웃으며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고깔모자까지 쓴 채 케이크까지 들었다.

    “선배, 뭐해요?”

    얼떨떨하기도 하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전에 있던 팀 대신 새롭게 발령받은 곳으로 오니 윤진이 반겼다. 드라마에 가 있어야 할 사람이 왜 대체 예능에 있냐고.

    “왜 여기 있어요. 다른 선배들은요?”

    “좋아해 주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되냐?”

    척은 무슨. 팀이 있어야 할 곳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수북한 파일만 가득할 뿐, 그 삭막한 곳에서 윤진 혼자 파티였다. 물론 누군가가 함께 축하해 주거나 하는 상황 따위 바라지도 않았을뿐더러, 아직 이라를 껄끄러워하는 이들이 몇몇 있을 테니까.

    작은 홀케이크를 내려둔 윤진은 고깔모자를 벗으며 짠, 하는 듯이 양팔을 펼쳤다.

    “나 여기로 왔어. 너랑 같이하려고. 무려 단독 편성이라고.”

    “드라마는요?”

    윤진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내 드라마 관심 없는 티는 충분하거든? 종방이 언제였는데.”

    아. 요즘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챙겨볼 시간이 없었다. 이라가 미안한 듯 보자, 윤진은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됐고, 어때? 다시 돌아온 소감이. 오면서 건물이라도 한 대 차주지 그래? 매일매일 차다 보면 언젠가 무너지지 않겠냐?”

    “그럼 또다시 실업자가 되는 신세죠.”

    “나라에서 보조금 주겠지.”

    “퍽이나요. 근데 왜 다들 자리에 없어요?”

    “이쪽으로 온 애들 몇은 장소 협찬 때문에 나갔어. 우리 영화 봐야 해.”

    “무슨 영화요?”

    “개봉했잖아. 제이든 리 에반스가 쓴 시리즈물. 지금 전 세계로 흥행 중이다. 내일이 책 런칭이고.”

    “벌써요?”

    와, 시간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시차가 달라 제이든과 연락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독 바쁜지 거의 연락도 없었다. 서운해지려던 참에 이런 소식을 들으니 괜히 미안하네. 무척 바쁠 텐데.

    “에릭 나이틀리랑 로레인 왓슨은 내한해서 다른 일정 소화 중인가 봐. 우리 촬영은 다음 주.”

    “빠르네요.”

    “제이든에 주연 둘까지 편성으로 짤 기회가 흔하냐? 참, 애 좀 먹을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 바로 오케이 하더라? 좀 멋있다, 한이라?”

    윤진이 툭 어깨로 이라를 치며 킬킬 웃었다. 이라가 연결해 주자마자 윤진은 속전속결로 일을 끝냈다. 제이든 쪽에서도 이미 말을 끝냈던 건지 칼같이 승인했다. 나중에 그에게 듣기로는 그가 하도 방송을 하지 않으니 회사에서 달달 볶던 중이라 했나.

    어쨌거나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도 못 한 곳에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라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부를 돌아봤다. 수많은 파티션으로 나뉜 부서 모습에도 돌아온 게 실감이 나진 않았다. 하긴 이곳보단 밖에서 뛰는 일을 더 오래 했으니 익숙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마지막 일 년 정도나 회사에 붙어 있는 시간이 좀 많았다. 그것도 미미한 수치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딱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고.

    ***

    -그럼 꼭 엄마가 데리러 와, 은우. 알았지? 꼭이야. 약속해!

    수화기 너머로 확답을 받아내려는 아이의 목소리에 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엄마가 금방 은우 보러 갈게.”

    -그럼 그때 제이든 형아도 있어?

    종이를 넘기던 이라의 손이 멈췄다. 원룸에 제대로 된 책상도 없어 바닥에서 작은 식탁을 펴고 그곳에서 프로그램 관련 파일을 보던 중이었다. 잠시 당황한 이라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제이든 형이 너무 바빠.”

    -형아는 나 안 보고 싶어 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바빠서 그래. 엄마가 나중에 만나면 꼭 물어볼게. 은우 얼른 자야지.”

    -우웅…….

    아까까지만 해도 밝았던 아이가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마음이 아파도 확신할 수 없는 말로 약속할 순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조심해야 했다. 특히 지금처럼 화제의 중심일 땐 더더욱.

    -엄마 잘 자아.

    “응, 은우도 잘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끊긴 전화를 바라봤다. 미국에서 온 뒤로 은우를 볼 시간이 없었다. 원룸 한편에는 여전히 그가 사준 은우의 선물이 잔뜩 있었다. 빨리 주고 싶은데, 좋아할 텐데…….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원룸이라 유달리 크게 들린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천천히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 뭐지. 의심하며 숨을 죽이던 찰나에 다시 똑똑, 노크가 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 나야.”

    “제이든?!”

    그가 왜 여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불이 아예 나갔는지 복도는 캄캄했다. 열린 문 사이로 큰 체격이 훅 들어왔다.

    “뭐예요?”

    들어오는 그를 보며 한 걸음 물러난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 밤에, 그것도 그가 한국이라니. 공식적인 일정으로는 모레 아침에 도착이었다.

    “보고 싶어서.”

    그가 씨익 웃으며 제 뒤로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때와 같은 원룸은 많아진 짐 덕분에 더 비좁아 보였다.

    “드, 들어와요.”

    공간도 별로 없었지만 우선 그를 들였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작은 책상 위에 수북한 종이와 그 옆에 익숙한 쇼핑백들을 바라봤다. 로고를 보니 은우 것인데.

    “은우 안 만났어?”

    “네, 시간이 안 나서……. 그보다 어떻게 왔어요?”

    “당신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제이든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이라를 끌어안았다. 열두 시간의 비행에, 차로 이동한 시간까지. 잔뜩 지쳤다. 오는 길에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에 그녀를 더 빨리 보고 싶어 와버렸다.

    그의 품속에 완전히 갇힌 이라는 놀란 채 있다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말도 안 되게 황당했지만, 그만큼 너무 좋았다. 요즘 연락도 안 될 정도로 바쁘다더니.

    “런칭은 잘했어요?”

    그를 마주 안은 이라가 웃으며 묻자, 저를 안은 작은 목덜미에 더 코를 파묻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똑같아. 이 시간에 일 중이었나.”

    “아, 네. 자료 조사한 거 검토 중이었어요. 사전에 당신이랑 협의해야 할 것들도 있고, 질문도 걸러야 하고.”

    “마침 내가 필요했네.”

    그가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여전한 녹색 눈동자는 가득 이라를 품고 있었다. 이제는 한결 마음 편하게 그의 눈동자를 감상하던 이라가 힘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에요. 모레 미팅 있잖아요.”

    “아아.”

    그도 전해 들은 스케줄이었다. 사전에 통보도 안 하고 한국으로 온 것쯤이야 이제는 다 알고 있겠지만.

    “연락은 못 했어. 하도 연락이 많이 와서 꺼버렸거든.”

    “애도 아니고 왜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관계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한창 일하던 때가 떠올라 괜히 그가 괘씸했다. 그의 탄탄한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잡아 비틀자, 그가 괜히 악, 하며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어.]

    다급하게 이라에게 떨어져 나간 제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손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됐고요.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무턱대고 이리로 오면 어떡해요?”

    “그럼 내가 어디로 가. 당신이 여기 있는데.”

    당당한 그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러니까 진짜 남자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물론 여태 했던 행각들이 그러고도 남긴 했지만…….

    일 때문에 근래 머리가 너무 복잡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제 앞에 있는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정말 이래도 될까? 내가 사는 곳에 아무렇지 않게 그가 오고, 안아주는 그를 마주 안고, 일상을 보고하고, 잔소리하고, 또 함께 마주 보며 웃고.

    “이라.”

    저를 빤히 보며 생각에 잠긴 그녀를 불렀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머리는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이라의 턱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나 재워줘.”

    “……네?”

    잘난 얼굴에 정신 못 차리고 보고 있다가 훅 현실로 돌아왔다. 뭘 해줘?

    “ 그 좋은 집 두고 왜 여기서 자려고 해요?”

    “왜, 재워줘.”

    “당신 잘 곳도 없고, 보다시피 있는 것도 없어요.”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지만,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낮춰 짧게 입 맞췄다.

    “재워준다고?”

    “내가 언제요!”

    “고마워.”

    어깨를 으쓱인 그는 아까 이라가 앉았던 곳 옆에 털썩 앉았다.

    “일할 거 있으면 해.”

    “허.”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당신 그렇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일을 해요?”

    “왜 못해? 빨리해.”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앉을 곳을 가리켰다.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다가 퍼뜩 시간을 떠올렸다. 아, 정말. 내일까지 답을 줘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 진짜 일해요?”

    “응. 해. 기다릴게.”

    아무것도 없이 벽에 등을 기댄 그가 씩 웃었다. 무슨 꿍꿍이야 진짜. 힐끗 그를 본 이라는 서둘러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무섭게 집중하는 이라를 대놓고 구경하던 제이든의 시선이 제가 들어온 현관으로 향했다. 올라오는 내내 딱 한 층만 불이 켜졌다. 그마저도 깜빡거렸지만. 저 현관도 작정하고 부수려면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살아도 위험하지만, 이라 혼자 살기엔 더더욱 위험한 곳이었다. 그의 미간이 짐짓 구겨졌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날 때까지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 얌전히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체크가 끝나서야 허리를 쭉 폈다.

    “으으.”

    우두둑. 목과 허리에서 소리가 났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아까와 같이 그대로 그녀를 보던 녹색 눈동자가 미소를 지었다.

    “끝났어?”

    “대충은요.”

    바닥에 앉아 제대로 된 책상도 없이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을 테니 허리와 목이 아픈 건 당연했다. 제대로 몸을 누일 침대도 없었고.

    시간을 확인하던 이라가 진짜 자고 갈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같이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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