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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8화 (48/70)
  • 48화

    “제이든, 저기 제이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가는 그의 냉정한 모습에 이라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이미 입구에 있던 로레인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온 상태였다.

    탁. 그제야 걸음을 멈춘 그는 앞만 본 채 미동도 없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사과했다.

    “미안.”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사과해요.”

    “하아, 미안해.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인상을 쓴 그의 모습에 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마지막에 서러울 정도로 우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짓을 벌였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난 괜찮은데, 저기…….”

    힐끗 뒤쪽을 바라봤다. 이미 보이진 않았지만, 방향은 아까 그곳이었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많이 울던데.”

    조심스러운 말에 제이든이 인상을 확 굳혔다.

    “농담해?”

    “……아뇨?”

    “그러면 그때 술 취해서 내 말을 다 잊어버린 거야?”

    “그것도 아닌데요.”

    “그럼 내가 로렌한테 가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거든요!”

    왜 말이 죄다 그렇게 돼? 이라가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럼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그게……. 당신 만나겠다고 온 거잖아요. 저렇게 우는데 얘기라도 들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당신은 날 좋아하면 더 욕심 좀 부려. 서운해지려고 하니까.”

    “네?!”

    놀라서 바라보자, 그는 아직 말이 안 끝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기로 했잖아. 내 마음 강요 안 한다고 했지, 당신 마음 숨기라고는 안 했어.”

    “그게 무슨 억지예요? 그리고 지금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 왜 없어? 난 당신 전남편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허.”

    하다 하다 이제는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기야? 한 번도 지강에 대해서 얘기 꺼낸 적 없던 그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니 황당하면서 웃기기까지 했다. 첫 만남이야 어쨌거나 그들의 사이가 좋을 수는 없겠지만.

    “왜 그래요, 갑자기?”

    “나한테 푹 빠졌으면서 관심 없는 척하는 게 꽤 마음에 안 들어서.”

    “……애도 아니고. 우리 은우도 당신처럼 투정 안 해요.”

    “나만 당신한테 온몸이 달았지. 이제는 하다 하다 애 취급이라니.”

    그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평소에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빨랐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놀라 바라보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울든 말든. 아주 유혹이라도 하고 있으면 날 밀어 넣겠어.”

    “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진짜 한마디 했다고 자꾸 이럴 거예요? 그리고!”

    이 남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같은 여자가 봐도 더럽게 예쁘던데, 저 얼굴로 유혹하는데 누가 밀어 넣어요?!”

    “그래. 그래서 그렇게 예쁘다는 사람한테 가라는 거야? 불안하지도 않아?”

    “내가 왜 불안해요. 저런 여자 마다하고도 내가 좋다는데!”

    말하다 보니 어느새 씩씩거렸다. 이건 싸우는 것도 아니고 서른 넘은 남녀가 대체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 건지. 이라가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노려보자, 그의 입가가 잠시 꿈틀거렸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봤다. 이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야 평생을 예쁜 여자들 속에서만 살았을 텐데 그래도 내가 좋다면서요. 근데 내가 왜 불안해요. 괜히 당신이 찝찝하고 마음이 불편할까 봐 가라고 했던 거예요. 나 때문에 못 갔으면 어쩌나 해서요.”

    “……안 찝찝하고 안 불편해.”

    “알았어요. 가지 마요. 당신도 내 말 이해했어요?”

    “응.”

    고개까지 착실히 끄덕이는 모습에 이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서른여섯 먹은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은우한테 쓰는 방법이 먹히다니.

    “왜 웃어?”

    이라의 웃음에 그의 입가에도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투덕거릴 땐 언제고 다시 다가온 그는 자연스럽게 이라의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간지러워요.”

    “왜 웃냐고.”

    “당신 귀여워서요.”

    피식 웃음을 터트리니, 잠시 멈칫했던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의아해서 그를 올려다보니,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라의 입가에는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 아, 진짜 귀여워.

    “나 좀 봐요.”

    “응.”

    “그러면서 안 보잖아요.”

    “볼 거야.”

    자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아는지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큭큭 웃던 이라가 그의 옆구리를 두 팔로 감싸듯 안았다.

    “그런데요. 로레인이라는 여자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요.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너무 예뻐서.”

    슬그머니 몸을 붙여오는 이라를 보며 그가 평소와는 달리 살짝 긴장한 듯 몸이 굳었다. 괜히 탄탄한 그의 품으로 들어오니 더 기대고 싶어졌다.

    억지로 누르고 숨겨야 할 땐 몰랐는데, 다 터놓으니 오히려 편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 여전히 걱정할 건 태산이었지만, 당장 그에게 향하는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불안하진 않은데, 살짝 의아하긴 해요. 저렇게 예쁜 여자만 본 당신이 내가 보일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가 힐끗 이라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평소보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의 눈은 거짓 하나 없이 맑고 진지했다.

    “누가 봐도 당신이 더 예뻐.”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이라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황당한 이 짧은 미국 여행이 그녀에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오길 잘했어.

    ***

    짧은 미국 여행은 끝났다. 비행시간까지 합한다면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미국에 간 뒤 거의 바로 기사가 터졌기 때문에 어딜 나가거나 움직이지도 못했다. 덕분에 꼼짝없이 집에서 그에게 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진 카페 출근길을 걸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발걸음이 무거웠다. 꽤 좋고 재밌었는데, 그만둬야 할 때가 왔다. 어쩌다 보니까 그와 제 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일에 복귀해야 하니까 이 일을 더 할 수가 없었다.

    제이든은 할 일이 남아 미국에 남았지만, 며칠 내로 공식적인 스케줄로 내한할 예정이었다. 아침에 그와 통화하면서 카페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을 땐, 그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쉽다.”

    어느새 입구가 가까워졌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수연과는 그래도 미국에서 꽤 많이 친해졌다. 내내 말을 놓지 않던 수연이 마지막쯤에는 이라야, 하고 부를 정도로 더 친밀해졌으니까.

    “역시 빠르네.”

    “아, 오셨어요?”

    수연이 익숙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품 안에 안고 왔던 화분 하나를 근처에 장식했다.

    “웬 화분이에요?”

    “내가 집에서 기르던 건데 너무 예뻐서. 카페도 식물로 꾸며두면 괜찮겠더라고.”

    몇 번 더 방향을 손보던 수연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커피 드릴까요?”

    “음, 같이 한잔할까? 아직 손님 오려면 시간 좀 남았지?”

    힐끗 시간을 확인한 수연이 방긋 웃었다.

    “나는 따듯한 라떼.”

    “네, 금방 해 드릴게요.”

    수연이 주문한 따듯한 라떼 한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든 이라는 괜히 그가 생각나 제 것에는 좀 더 진하게 샷을 추가했다.

    음료 두 잔을 들고 수연이 앉아 있는 창가 쪽 테이블로 향했다.

    “여기요.”

    “응, 이라도 여기 앉아.”

    커피를 들고 앉은 이라는 빨대 없이 유리잔을 들어 마셨다. 평소 마시던 것보다 진하긴 한데 향이 좋아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잠시 커피 향을 음미하던 이라는 바깥으로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라의 조용한 부름에 수연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로 바라봤다. 아쉬움에 잠시 고민하며 텀을 두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카페 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머그잔을 들던 수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놀란 듯한 시선에 이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 다시 복직할 것 같거든요. 오래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드리게 돼서 너무 죄송해요.”

    “복직? 어머. 그럼 좋은 일이네!”

    수연이 잔을 내려두고는 활짝 웃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어서 놀라 눈을 깜빡이자, 수연은 누구보다도 크게 기뻐했다.

    “그런 이유라면 대환영이지. 일은 잘 풀린 거야? 안 그래도 걱정 많이 했었는데.”

    “네, 이제 복직해서 바로 잡으려고요. 도와준다는 선배가 있어요.”

    “너무 다행이다. 참, 제이든은 알아? 좋아하겠네.”

    “아, 미국에서 얘기했어요. 사실은 같이 사진 찍힌 것 때문에 다시 제가 필요해졌나 봐요. 이것도 다 제이든 덕분이죠…….”

    하하. 옅은 미소를 짓자, 수연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제이든 덕분이야? 이라가 잘한 거지.”

    “아.”

    “카페 일은 괜찮아. 이라처럼 좋은 알바생은 없겠지만, 그래도 구하면 되는 거고. 나도 이라가 오해 풀고 당당해졌으면 좋겠어.”

    어쩐지 응원해 주는 수연의 미소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응원해 주는 어른을 가져본 적이 아주 먼 옛날이어서 그런가. 문득 잊고 지내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씁쓸하게 웃던 이라는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 월급은 안 주셔도 돼요. 일도 적게 했고 이번에 티켓값에 미국 가면서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요.”

    그것뿐이랴. 한국 돌아오면서 짐이 거의 다섯 배는 더 됐다. 작은 원룸에 가득한 쇼핑백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라 자신 것에 은우 것까지, 이미 받은 월급까지 반납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수연의 생각은 다른 듯 단호했다.

    “해야 할 건 당연히 하는 거고. 그것보다도 잊지 않았지?”

    “네?”

    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수연은 기대에 찬 듯 해맑게 웃었다.

    “은우 보여준다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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