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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7화 (47/70)

47화

[더는 안 되십니다.]

탁.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익숙한 에이미였다. 로레인은 제 앞을 막아선 중년의 여성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당장 비켜요. 안에 제이디 있죠?]

로레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이어 쫓아온 경호원들이 곤란한 얼굴로 에이미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에이미. 막으려고 했지만, 입구에 차를 버려두고 걸어오는 바람에.]

[왓슨 씨.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은 뒤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네 명의 경호원이 로레인을 감싸자, 그녀는 풍성한 금발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

[어쩔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로레인은 휙 뒤를 돌았다. 어디서 온 건지 수연과 로버트가 편안한 복장으로 그녀보다도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더 안색이 파리해졌다. 서둘러 한 걸음씩 물러나자, 로버트과 수연이 로레인에게 더 다가갔다. 그들의 앞에 선 에이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입구에서 차를 버려두고, 개인 경호원을 대동해서 오셨습니다.]

[아아, 다들 걱정은 말게.]

로버트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미소로 로레인을 바라봤다. 어딘가 섬뜩한 미소였다. 녹색 눈동자라서 그럴까, 아니면 그와 닮은 외모 때문에 그럴까. 팔 전체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기서 돌려보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넘어가 줄 거니까.]

그의 말에 경호원의 표정이 사악 죽었다. 서로 눈치만 보던 그들은 서둘러 혹여나 로레인이 멋대로 들어갈까 봐 입구를 막아버렸다.

모두가 저를 적대하는 모습에 로레인은 놀라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수연의 모습에 애처롭게 매달렸다.

“제이디를 봐야 해요. 수연, 도와줘요.”

한국어가 는 건 로버트뿐만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로레인은 제이든과 헤어진 후에도 계속 한국어를 공부해,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수연에게 한국말로 전화해 설득을 부탁했다.

“로레인…….”

수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건물을 힐끗 바라봤다. 제이든만 이어도 당연히 안 됐겠지만, 이 상황에서 이라와 마주친다면 그건 정말 곤란했다. 아직 둘의 관계가 제대로 발전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흠을 내고 싶진 않았다.

“어서 돌아가. 여기 제이든 없어.”

“거짓말이에요. 그가 없을 리가 없어요. 대체 기사 속 여자는 누구예요? 수연은 알지 않아요?”

당연히 기사를 보고 왔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수연이 한숨을 내쉬며 로버트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냉철하게 로레인을 보고 있었다.

아이를 두 번이나 잃게 한 것도 모자라, 제이든을 거의 폐인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일로 제 아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니 로레인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제이든이 그녀를 다시 받아준다면 몰라도. 그럴 리 없겠지만.

“말도 안 돼요. 제이디에게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로레인은 당당했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늘 어디선가는 당당하게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여자를 만나지 않던 이유도 모른 채, 그럼에도 끝끝내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로버트. 빨리 로레인 보내요. 나는…….”

수연이 고개를 돌리며 건물 쪽을 바라보다 말꼬리를 흐렸다. 입구 쪽에서 이라와 제이든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산책이라도 나온 건지 가벼운 차림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수연의 시선과 행동이 멈춤에 따라 로버트와 로레인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레인의 하얀 얼굴에 더욱더 핏기가 가셨다.

기사 속에 나왔던 가냘프고 작은 동양의 여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흰 피부에 그것보다도 더 생기 있어 보이는 크고 짙은 이목구비가 잊히지 않던…….

그리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의 모습이었다. 녹아내릴 만큼 다정해서, 온 신경을 작은 여자에게 쏟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돼…….

[제이디…….]

흔들리는 음성에 여태 입구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제이든과 이라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와 풍성한 금발의 여자를 본 순간 이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 여자다. 로레인 왓슨.

[하.]

놀란 건 이라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놀랐기보다는 화가 난 얼굴로 로레인을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봤다.

이라를 보던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한 모습. 로레인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누구야? 누군데 제이디 옆에 있어?]

[경호원을 바꾸셔야겠네요.]

제이든의 시선은 곧장 로버트에게 향했다. 그는 각오했던 바인지 어깨를 으쓱였다.

[로렌. 너 때문에 또 아들한테 미움받게 생겼어.]

[……밥!]

로레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로버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수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그만 가지. 보면 알 텐데, 그 누구도 널 반기지 않아. 왓슨.]

로버트가 수연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라를 스쳐 지나가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수연은 참견할 수가 없어 한숨을 참으며 들어갔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채 멈춰 있었다. 이라는 여전히 놀란 채로 로레인을 바라봤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 여자가 맞았다. 그와 함께 있는 사진이 수없이 많던……. 예쁘긴 진짜 예쁘네.

잠시 우물쭈물 고민하던 이라가 조심스럽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혹시 나 들어갈까요? 할 얘기 있으면 둘이서…….”

“없어. 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고.”

제이든은 차갑게 로레인을 쳐다봤다. 로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투명한 눈물이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제이디, 설명해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으로 당신을 봤을 때만 해도 저런 여자는 없었어!]

더 다가오려는 듯 걸음을 옮겼지만, 경호원들은 빠르게 로레인을 막아섰다. 도저히 그들을 힘으로 떨쳐낼 수가 없는 듯 로레인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떻게 된 거야……. 흐으윽, 어떻게 된 거냐구.]

우는 모습 하나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라는 그저 멍하니 그런 로레인을 바라봤다. 같은 여자가 봐도 이렇게나 예쁜데, 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상상이 안 갔다. 이라는 힐끗 시선을 올려 제이든을 훔쳐봤다.

이렇게 예쁜 여자랑 살았던 그가, 아이까지 낳을 뻔했던 그가 정말 내가 눈에 들어올까. 외모는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What the……?”

죽을 만큼 무거운 침묵 속에 로레인의 울음을 가로질러 하나의 목소리가 더 들렸다. 이라가 로레인 뒤로 시선을 옮기자, 강한 햇볕을 지나 선글라스를 벗으며 들어오는 에릭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유독 그의 금빛 머리가 더 찬란하게 느껴졌다. 에릭은 이곳에 찾아온 로레인을 보며 기겁했다. 그리고는 그 앞에 함께 서 있는 이라와 제이든을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오마이갓. 로렌, 대체 여기서 왜 울고 있어?]

[흐으윽, 리키. 제발, 설명해줘. 제이디 옆에 있는 저 여자가 누군지. 이럴 순 없어.]

[네가 더 이럴 순 없어. 딱 봐도 모르겠어? 다정한 커플의 모습이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로레인이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에릭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제이디가 이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 상처 주려고 그러는 게 분명해. 나 이제 반성 많이 했어. 정말이야, 믿어줘. 제이디, 제발.]

마지막에는 떨어져 있는 제이든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에릭은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라와 함께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건만.]

안 그래도 에릭 역시 기사를 접한 뒤에 찾아온 거였다. 마침 일정도 비어있고. 그런데…….

[제이디. 로렌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이라에게는 잘 설명하는 게 좋겠어.]

[고마워.]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제이든은 이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몸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보던 에릭은 자기를 버려두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며 애처롭게 우는 로레인을 내려다봤다.

[오, 로렌. 이게 무슨 추태야. 정신 차려. 아무리 로버트의 저택이라지만, 이곳도 보는 눈이 많다고.]

[흐으윽, 이건 아니야. 이럴 순 없잖아.]

[완전 맛이 갔군.]

에릭이 고개를 저으며 로레인의 팔을 붙잡아 고정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며 한탄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 온 거야? 그보다 너 저녁에 스케줄 있지 않아? 우리 내한 일정 있는 거 모르진 않지? 네 스케줄로 내 시간까지 변동 있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에릭은 그대로 로레인을 잡고 밖을 향해 걸었다. 그때 여전히 차분히 서 있던 에이미가 입을 열었다.

[모시고 가시면 왓슨 씨의 차는 따로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입구에 찌그러진 쿠키처럼 박혀 있는 포르쉐가 로렌 건가?]

[……그럴 겁니다.]

[오, 신이시여.]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 난 그저 이라와 재밌는 수다를 떨려고 왔을 뿐인데.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고.

에릭은 우는 로레인을 끌고 나가면서 머릿속으로는 기사 속 사진을 떠올렸다. 아이를 업고 있는 제이든과 그 옆에 있는 이라. 에릭의 입가가 스윽 하늘로 향했다.

혹시 이라의 아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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