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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3화 (43/70)
  • 43화

    아, 안 되는데. 코앞에 놓인 그의 녹색 눈동자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그때처럼 그녀가 거절해도 괜찮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때도 이랬어.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호감을 느끼고, 키스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와는 할 거 다 한 사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니 심장이 튀어 나갈 듯이 뛰었다. 혹여 그에게 들릴까 싶어 멀어지고 싶었지만, 거절의 의사로 보일까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런. 거절해야 하는 게 맞잖아. 수많은 생각이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녀가 십 년 내내 그리워했던 그 추억을 그는 오늘 다시 똑같이 만들어줬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영향력이 클지 모르는 추억으로.

    두근두근. 너무 빨리 뛰는 심장과 온몸에서 튀어 오르는 맥박이 체온을 훅 올렸다. 좋은 향기와 함께 훅 다가온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리고 그걸…… 어떻게 거절해.

    “……둘 다 할래요.”

    이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소를 품은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따듯한 체온이 입술에서 느껴졌다. 지분거리는 입술에 결국 이라 역시 두 눈을 감아버렸다.

    목뒤로 타고 올라왔던 그의 큰 손이 목덜미는 천천히 쓸어내렸다. 몸에 있는 솜털이 모조리 오소소 일어나듯 소름이 끼쳤다. 목에서 턱으로 부드럽게 쓸던 그가 고개를 비틀어 더 파고들며 엄지로 그녀의 턱을 지그시 눌러 입을 벌렸다.

    십 년 전보다, 함께 하룻밤을 보냈던 그날보다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키스였다.

    농밀하게 들어온 말캉한 그의 혀가 이라의 입속을 가득 채웠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휘어 삼키고 느릿하게 핥아 올리며 쉴 틈을 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입술이 부딪히는 끈적한 소리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안전벨트를 풀고 더 가까이 다가온 그는 그녀의 안전벨트도 손쉽게 풀어버렸다.

    “하아, 잠깐만요. 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시 떨어졌던 입술을 다시 부딪쳐왔다. 자유로워진 몸이 더 가까이 붙고, 여유로워진 한 손은 그녀의 허리선에 머물렀다. 그때와는 달랐다. 확연히 달랐다.

    키스 하나로도 사람의 혼을 빼버렸다. 정신없이 그의 키스에 응하던 이라가 눈이 풀리고 저도 모르게 어느새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집요하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가벼워지고 어느새 상의 안으로 들어온 손은 그녀의 부드러운 맨살을 쓰다듬었다.

    엉겨 붙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이라에게 남아 있었다. 스르륵 올라간 눈꺼풀 안으로 동공이 풀린 이라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하듯 가볍게 입술을 여러 번 맞췄다.

    “나한테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말이야.”

    깜빡깜빡. 여러 번 눈을 깜빡이던 이라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

    홀렸다. 완전히 놀아났어.

    “읏.”

    황급히 그를 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어두운 와중에도 가까이서 보이는 그의 입술은 흔적이 가득했다. 화르륵 타오른 얼굴을 황급히 가리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아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밀려난 척해 주는 그가 가볍게 웃었다. 이라가 힐끗 그런 그를 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자꾸 이러기예요?”

    “좋았잖아.”

    그건 맞지. 젠장. 이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제이든은 가볍게 웃으며 핸들에 기대 이라를 바라봤다.

    어쩌자고 그와 키스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다며 다가오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데 그 입에 맛있는 거나 넣어주고 싶네.”

    그가 미소 지으며 다시 몸을 가까이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시트 쪽으로 물러나며 몸을 웅크리는데, 그는 피식 웃으며 안전벨트를 달칵 채웠다.

    “밥 먹으러 가자.”

    그리고는 별일 없던 사람처럼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보여줬던 풍경은 여전히 멋있었지만 이제 이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와 잤고, 그리고 다시 키스도 했다. 다가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을 땐 언제고, 다쳤다고 미국에 와 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채 몇 시간도 안 돼 수락해 미국까지 날아왔다.

    누가 봐도 그에게 미쳐 있는 상황이었다. 아, 그래. 인정해, 인정한다고. 그런 것 따위는 이미 인정하고도 남았다. 그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감정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뻥 뚫리는 배기음 사이로 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신데렐라라도 되기를 바라는 거냐고, 한이라. 네가 양심이 있으면 만나질 말아야지. 그리고 이젠 은우도 있잖아.

    아주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서 그를 만난다고 쳤다. 그냥 돈 많은 일반인도 아닌 그가, 이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이라를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건 정말 그에게 못 할 짓이 아닌가? 기대는 것도 정도껏 이지 그를 깎아내리면서까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이라, 한이라.”

    “……네, 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그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언제 도착한 건지 그가 운전석에서 이라를 부르고 있었다.

    “내리자.”

    씩 웃으며 내리는 그를 보고 이라 역시 따라 내리려는데 직원 하나가 그녀의 문을 열어줬다.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내리자, 직원은 가볍게 미소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올라가면서도 이라는 주변을 훑어봤다. 당연히 그를 알아봤겠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하겠지?

    생각이 복잡해 코앞에 있는 계단을 못 봤다. 그대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그가 뒤에서 허리 채 안았다.

    탁-

    [이라, 정신 좀 차려.]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가 놓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허공에 잠시 떠 있던 이라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고마워요.”

    “또 후회하는 중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는 미소 짓지 않은 얼굴로 이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순간 마음이 따끔 아팠다.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해서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도 상처받고 있었구나.

    “앉아.”

    의자를 빼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며 앉았다.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건너편에 자리했다.

    메뉴를 고르고 직원이 와 주문할 때까지 그는 저녁 메뉴에 대해서 말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런 그를 보던 이라가 고개를 돌려 창 아래로 보이는 야경을 바라봤다.

    “예쁘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오늘 온종일 그가 보여줬던 것들은 눈에 담고 또 담아도 부족한 것들이었다. 휴대폰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던 건지 허공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태 아무런 말 없던 그가 눈이 마주치자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 당신이 제대로 허락하기 전까지는 멋대로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

    그가 웃으며 물이 든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니까 인상 좀 풀어줘.”

    아. 나도 모르게. 이라가 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는 됐다는 듯이 그저 와인 잔에 든 물을 한 모금 넘길 뿐이었다.

    ***

    “와아…….”

    종일 밖에 있다가 드디어 들어왔다. 중앙 홀에서 수연과 로버트를 만났지만, 이라는 간단히 인사말을 주고받을 체력만 간신히 남았을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메이드 몇 명이 쇼핑백을 방으로 갖다줬다. 수북한 것들을 보며 하하, 웃던 이라는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으, 체력 진짜.”

    끙끙거리며 침대 옆에 뒀던 휴대폰을 들었다.

    “아, 충전기.”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손에 있던 휴대폰이 탁 켜졌다. 의아해서 바라보니 완충된 채였다.

    “어라?”

    내 거 맞나? 충전한 기억이 없는데.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인가 해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들어와요.”

    달칵. 문이 열리며 들어온 건 제이든이 아니라 에이미였다. 단정한 차림의 그녀는 한 걸음 들어와 이라를 바라봤다.

    “아.”

    [하루 즐겁게 잘 보내셨습니까?]

    [아, 네. 즐거웠어요.]

    하하, 어색하게 웃자 에이미는 이라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바라봤다.

    [휴대폰 배터리가 없는 것 같길래 충전시켜 놨습니다.]

    에이미가 휴대폰을 충전시켜줬다는 말인가? 이라가 눈을 깜빡이다가 옅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 짐들은 따로 정리해 둘까요? 저녁은 드셨다고 하시던데, 샤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응? 금붕어가 뻐금거리듯 이라는 멍청하게 에이미를 바라봤다. 나 이렇게 영어를 못하다니. 알아들은 게 겨우 몇 단어여서 뭐라고 하는지 몰랐다. 어색하게 웃자, 에이미는 잠시 조용히 서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번역기를 챙겨 들고 다니겠습니다. 에반스 씨에게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가볍게 웃은 에이미가 나가자, 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홀로 남은 방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영어 공부를 다시 해야지…….”

    다시 흐물흐물해지며 침대로 누운 이라가 휴대폰을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짐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까는 몰랐는데 휴대폰에 알림이 수십 개였다. 전화, 문자, 카톡까지 포함해서 가지각색으로 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는데, 마침 윤진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다짜고짜 윤진이 소리쳤다.

    -미국은 또 언제 간 거야?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놀란 이라가 되묻자, 기가 찬다는 듯 윤진이 코웃음 쳤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안다, 너랑 제이든 리 에반스 미국에 있는 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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