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생했던 게 무서울 만큼 로버트는 곧장 수연과 제이든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그가 살던 저택으로 둘을 데려간 후 그는 완벽하리만큼 모든 걸 퍼주었다.
“5년을 공부했으니까 못할 리가 없지.”
“……날 찾을 거라 확신했어요?”
“일만 아니었다면 더 빨리 찾았어. 약혼도 멋대로 깨버린 후에 당신을 찾아 미쳐있으니까, 부모님께서 물려받을 때까진 절대 안 된다고 하셨거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찾았어.”
로버트는 익숙하게 제이든을 안고 수연을 바라봤다. 발육이 좋아 네 살 이후에는 수연이 안고 다니기도 버거웠는데, 로버트는 그런 제이든을 한쪽 팔로도 능숙하고 편하게 안았다.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제이든은 비싸고 귀한 것들만 입고 먹었다. 아이에게 쥐어지는 모든 것이 새것이고, 또래보다 항상 좋고 많았다. 그럴수록 수연은 죄책감에 더 숨이 막혔다.
어느 날은 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우는 그녀를 로버트가 깨웠다. 그 새벽에 수연은 힘들었던 과거의 잘못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진지하게 듣던 로버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 다독여줬다. 그리고 한참을 괜찮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일 년이 무섭게 제이든은 쑥쑥 컸다. 또래보다 성숙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온 거라 그런지 수연보다는 훨씬 적응을 잘했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해질 9살 무렵이었다.
“못 살겠어요, 돌아갈래요.”
퇴근하고 돌아온 로버트는 넥타이를 풀다 말고 멈췄다. 잘못 들은 것처럼 다시 수연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침대에 앉은 채 그를 바라봤다.
“한국으로 갈래요. 제이든이랑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너무 그리워요. 나 여기서 못 살겠어요.”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로버트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슈트도 제대로 벗지 못한 그가 다가와 그녀의 무릎 아래로 자세를 낮춰 올려다봤다.
“내가 무슨 잘못 했어? 아니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수연, 갑자기 왜…….”
“같은 인종도 없고, 한국말 통하는 사람도 없고, 인종 차별도 지긋지긋해요. 영어도 매일 버거워요. 난 한국이 좋아요. 우리 말 통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여긴 너무 외롭고, 흐으윽.”
결국 울음을 터트리자, 로버트는 크게 당황해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점점 수연의 기분이 다운되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빠 그녀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겠다니.
“수연, 미안해. 우선 울지 말고…….”
“싫어요, 다 싫어요. 흐으윽.”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모습에 로버트는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여전히 당황한 채 수연을 내려다보며 다시 그녀의 앞에 앉았다.
“제이든은 이제 이곳 생활에 적응했어. 물론 아이의 의견도 들어볼 거지만…….”
“나도 잘 키울 수 있어요. 한국 가면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고, 흐윽, 다시 일하면…….”
“무슨 소리야?”
로버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당신 나랑 완전히 헤어지겠다는 말인 거야? 이혼하겠다고?”
그가 손을 뻗어 수연의 골반을 붙잡은 채 올려다봤다.
“그건 절대 안 돼. 이혼이나 연을 끊는 건 절대 안 돼. 당신이 한국이 그립다면 거기서 사는 것 정도는…….”
젠장.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달 정도 함께 한국에 있을 수야 있겠지만, 평생 한국에서 같이 살 수는 없었다. 제이든 역시 국적이 이곳이었고, 수연도 영주권을 갖고 있었다.
“수연, 나 좀 봐.”
“흑.”
“당신이 한국에 돌아가도 일하는 일은 절대 없어. 집도 돈도 다 내가 해 줄 거야. 당신 고생 안 시킬 거라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당신과 평생 떨어져서는 못 살아. 한국에도 내가 가겠지만, 알다시피 자주 못 갈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보고 있으니 결국 그가 졌다. 이 말 역시 얼마나 참고 또 참다가 한 말일까. 얼마나 수없이 많은 밤을 고민했을까.
“반년에 한 번은 이곳으로 와 줘. 한국은 내가 시간 날 때마다 가겠지만, 당신도…… 꼭 와 줘. 그 조건으로 당신 한국 보내는 거니까.”
결국은 수연이 싫다고 거절해도 어쩔 수 없이 그는 보내줬겠지만. 쓰린 마음을 달래며 그는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수연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결정이 난 후 제이든에게도 물어봤다. 그는 당연히 수연을 따라갈 거라 말했지만, 이미 그의 모든 생활은 이곳에 있었다. 친구도 학교도 집도 추억도. 다시 어린 아들을 품에서 떨어트린다는 생각에 괴로웠으나, 수연은 제이든은 이곳에 남겨뒀다.
그렇게 4년간 있었던 단란한 가족의 형태를 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
“당시에 나는 학교로, 아버지는 일로 한국에 자주 못 갔어. 어린 내가 오가기도 쉽지 않았고, 그 사이 어머니는 한국에 다시 정착하셨지. 그게 이렇게 오래 지속된 거고.”
이라는 너무 놀랐다. 생긴 것만 보면 수연은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란 것 같았다. 근데 5년간 홀로 그를 키우고 또 먼 타지로 가 적응하려고 애쓰고, 결국 다시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니.
“……대단하신 것 같아요.”
조용히 중얼거린 이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은우 가진 거 알았을 때 혼자 키우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거든요.”
“여러모로 대단하고, 존경해.”
수연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늘 그녀를 이해했다.
“그래서 십 년 전 당신이 홀로 타지에서 우니까 어머니 생각이 났어.”
“아.”
“처음에 도와줬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지. 다음은 그냥 내가 당신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고.”
말하다 보니까 조금 이상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찾아 그렇게 고생했는데, 저 역시 그런 상황 아니던가. 심지어 자기는 두 배의 시간이었고,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고 있으니.
그가 쓴웃음을 짓자, 이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브런치는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밖을 구경 중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이만 나갈까.”
“아, 네.”
그를 따라 일어선 이라는 마지막으로 밖을 바라보며 눈에 담았다.
“휴대폰을 가져올 걸 그랬어요. 사진이라도 찍는 건데.”
“휴대폰 안 가져왔어?”
“어제 충전을 못 해서 방전됐어요. 쓸모없어서 두고 왔고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제이든이 힐끗 해변을 보며 말했다.
“다시 보러 오면 되지. 뭐가 문제야.”
어서 나가자는 듯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잠시 큰 눈으로 그를 보던 이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떨궜다.
***
“혹시 돈 쓰는 게 취미예요?”
이라가 경악하며 그를 바라봤다. 밥 먹더니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명품 거리를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는 있었다. 와 본 적도 있었다. 그게 십 년 전에다, 너무 많이 바뀌어 있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설명이겠지만.
이곳저곳 가게를 돌던 그는 늘어나는 쇼핑백은 신경도 안 썼다. 그중에 절반 이상이 이라 것이기에 문제였지만.
“자, 잠깐만요.”
“이것 봐. 이거 어때?”
말리는 이라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걸친 그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운동화가 있었다, 아주 작은 사이즈로.
“은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사이즈가 얼마나 되지? 손바닥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그는 큰 제 손바닥을 보더니 가볍게 직원을 불렀다. 여러 사이즈를 주문하는 것 같은 모양에 이라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지금 은우 신발 사는 거예요?”
“응, 선물. 생각해 보니까 인사도 못 하고 왔잖아.”
“무슨 선물을 이런 곳에서……!”
“내가 은우에게 주는 거니까 당신이 중간에서 막지 말지?”
“하, 내가 은우 엄마잖아요.”
“그래. 엄마지, 은우가 아니잖아.”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직원이 가져온 쇼핑백을 보고는 결제했다.
“뭘 이렇게 많이…….”
“남자아이는 쑥쑥 큰다던데. 생각해 보면 나도 클 때는 운동화를 몇 번 신지도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이걸 다 샀다고요?”
“사이즈 별로 산 것뿐이야.”
그는 지나가다 동네 문방구에서 껌을 맛별로 샀다는 것보다도 별거 아닌 양 말했다.
[아, 저것도.]
카드를 받기 전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모자를 가리켰다. 역시 아이가 쓸 법한 크기였다. 직원은 재빠르게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쇼핑백 하나를 챙겨 나왔다. 그것까지 결제를 마치고서야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데이트라고 쓰고 쇼핑이라 읽는 하루였다. 해가 질 즈음엔 그와 함께 익숙한 전경이 보이는 곳으로 왔다.
“와, 여기!”
이라가 놀라 고개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와 왔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첫 키스를 했던…….
“와.”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이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좋아할 줄 알았어.”
“설마 다음 코스는 그때 그 레스토랑인가요?”
눈을 빛내며 묻자, 그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저녁이 그곳은 맞지만, 우리에겐 중간에 한 단계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네? 무슨…….”
이라가 의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겼다. 훅 다가온 그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거리에 놓였다.
‘키스해도 되나?’
“키스해도 되나?”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도 되고.’
“저녁을 먹으러 가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