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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0화 (40/70)

40화

[밥이요? 이름이 밥이에요?]

[애칭이지. 이름을 줄인.]

“밥? 라이스?”

[응? 뭐라고? 미안, 이해를 못 해서.]

[아, 그러니까 라이스……. 한국어로 발음이…….]

엉뚱한 수연의 말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로버트의 미소에 수연 역시 함박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가게 밖에서 만나기로 한 뒤로, 종종 그는 수연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와 이렇게 따로 만난 것도 벌써 일곱 번째였다.

“나 한국어 열심히 해요.”

“와.”

[어때? 덜 어색해지지 않았어?]

[곧잘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틈날 때마다 한국어를 연습해 수연에게 들려줬다. 그와 대화하며 수연 역시 영어가 확확 느는 게 느껴졌고.

일이 끝나면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했지만, 몇 번 대타를 부탁하다가 결국 그만뒀다. 솔직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모한 짓이긴 했지만, 당장 그와 만나는 게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 많이 늦었네. 당신 내일 출근해야 하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매우 바쁘지 않아요?]

그가 사업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묻고 듣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아직은 너무나 컸다. 그건 로버트도 마찬가지인지 수연에게 묻고 싶은 건 많아도 역시나 다 묻지 못했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워.]

처음 로버트를 만난 후로 두 달이 지났다. 듣기로는 그의 한국 출장은 석 달이었다.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가 아쉬웠지만, 그는 출장까지 온 사람이었고 수연 역시 제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요.]

수연이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자, 로버트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눈빛을 바라봤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보는 검은 눈동자는 더없이 영롱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진해서 오히려 더 빠져 보고 싶은 눈동자였다.

“오늘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천천히 그러나 정확한 그의 발음에 수연의 눈이 커졌다. 검은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이 뜻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리지도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의 작은 머리가 끄덕임을 표현했다.

***

“으, 피곤해.”

눈을 비비며 가게로 나온 수연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거의 보름째 늘 밤에는 그와 함께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좋은 호텔에 좋은 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에는 서로의 미소를 보며 잠에서 깨어나 출근 준비를 한 후 헤어졌다.

아르바이트 하나를 관뒀는데도 오히려 돈은 쌓였다. 로버트는 절대 수연의 지갑이 열리게 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그가 해결했다. 그리고 종종 사다 주는 간식이며 먹을 것들은 그를 만나지 않을 때도 수연을 배부르게 했다.

“오늘도 그분 예약이네.”

“정말요?”

수연이 피곤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예약자 명부를 바라봤다. 진짜였다. 만나기 시작한 뒤로는 이곳에 올 때는 늘 알려줬었는데. 어쩐 일이지? 너무 바빠서 까먹었나.

“근데 늘 드시던 거랑은 다른 메뉴네. 와인도 함께 골라달라고 했나 봐.”

“와인이요?”

어쩐 일이지. 그는 수연과 있어도 늘 바빠 보였다. 그녀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지만, 가끔 오는 일 전화나 다른 일거리에 미간이 자주 찌푸려졌다.

의아함에도 수연은 일을 시작했다. 그의 예약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시계를 힐끔거리는 횟수가 무척이나 늘어났지만.

[어서 오세요. 예약자 성함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때 입구에서 들린 직원의 말에 수연이 서둘러 치우던 테이블에서 시선을 돌렸다. 힐끗 바라보자, 그일 줄 알았는데 어떤 외국인 여자였다. 수연보다 십 센티는 훌쩍 커 보이는 것도 모자라 높은 힐까지 신고 있던 여자는 화려한 금발을 풍성하게 어깨 위로 내린 채였다.

[에반스.]

짧은 그 말에 수연의 귀가 쫑긋해졌다. 뭐라고?

[아, 에반스 씨 일행이시군요. 나머지 분들은 늦게 오시나요?]

직원이 익숙하게 응대하며 여자를 데리고 귀빈실 쪽으로 들어갔다. 수연은 여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시간과 예약자까지 그가 맞는데…….

“수연아. 물부터 준비해 줘. 참, 일행 수 다시 확인도 부탁해. 까먹었어, 미안.”

“아, 네. 제가 여쭤볼게요.”

직원 하나가 주방으로 휙 들어가며 손님이 오신 걸 알렸다. 물을 챙겨 든 수연은 여자가 들어간 귀빈실 안으로 노크 후 들어갔다.

[아직이요. 오죽하면 내가 왔겠어요? 두 달을 더 있겠다니, 그게 말이 돼요?]

[시, 실례합니다.]

여자는 통화 중이었다. 꽤 거친 음성으로 통화하던 여자는 테이블 위로 물을 놓는 수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우선 오라고 통보는 했어요. 당연히 그의 비서한테 물어봐서 근처로 잡았어요. 방해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밥이 자주 오는 곳이라니까.]

밥? 수연의 시선이 휙 들렸다.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별 고민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더니 수연을 바라봤다.

[뭐야. 왜?]

[아, 아닙니다.]

[너, 밥을 알아?]

여자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수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여자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쁜 티를 냈다.

[여기 밥이 자주 오는 곳이잖아. 얼굴 정도는 알겠지?]

[그, 그런데 왜요?]

늘 다정하고 천천히 말해주는 그의 말만 듣다가, 센 억양이 섞인 여자의 말을 들으니 알아듣기가 벅찼다. 더듬거리는 수연의 모습에 여자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뭐야, 이 얼빠진 건. 왜냐니, 그딴 걸 나한테 왜 물어? 당연한 거잖아. 내가 그의 약혼녀니까.]

Fiancee. 피앙세. 그 단어 하나만큼은 잔인하도록 귀에 쿡 박혔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그의 약혼녀라는 거잖아.

[저, 정말요? 로버트의 약혼녀예요?]

[이봐, 학교도 졸업 안 한 애송이 같은 게 그새 로버트한테 꼬리 친 거야? 고작 이런 레스토랑 직원이? 아니면 네가 사장이니?]

예의 없는 하대와 막말에도 수연은 귀가 먹먹해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말도 안 돼.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그가, 그렇게 다정했던 그가 약혼녀를 두고 나를 만났다고?

[수연?]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표정도 제대로 고치지 못한 수연이 뒤돌았다. 이제 막 들어오던 로버트는 수연과 함께 있는 여자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밥, 드디어 당신 얼굴을 보네. 내가 이렇게 이 작은 나라까지 와야겠어?]

[무슨 상황이냐고 묻잖아. 수연, 얼굴이 왜 그래?]

[뭐야. 설마 했더니 정말 여자라도 생긴 거야?]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로버트가 이를 바득 갈며 여자를 노려봤다. 처음으로 그가 열받은 모습을 보는 게 놀라웠지만, 이미 앞서 한 차례 받았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수연을 살피기 바빴지만, 뒤에 여자는 나불거리기 더 바빴다.

[오케이. 노는 건 알겠어. 이달 안으로 정리해. 당장 다음 달에 결혼인데 뭐 하는 거야?]

[오해하잖아.]

[오해가 뭐가 있어? 이 반지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는데!]

여자의 왼손에는 떡하니 알이 큰 반지가 자리했다. 수연의 눈에 그것이 들어온 이후 로버트의 손을 자연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손 어느 곳에도 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없었던 것 같기도……. 그럼 그는 정말 나를 속이려고 작정했던 건가…….

[수연, 수연. 정신 좀 차려 봐. 당신 괜찮아? 911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안색이 안 좋아.]

[시, 식사 맛있게…….]

서둘러 말을 뱉어낸 수연이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로버트가 다급하게 붙잡았지만 탁, 거칠게 손을 쳐냈다. 쳐내고서도 당황스러워 멈칫했으나, 수연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어머, 수연아 너 왜 그래?”

“저, 저…….”

“너 어디 안 좋아?”

“저 죄송한데, 오늘 좀 몸이…….”

핏기 하나 없이 질린 모습에 당황한 직원 언니 하나가 서둘러 매니저를 불렀다. 수연의 상태를 확인한 매니저가 조퇴를 허락하자, 재빨리 유니폼을 갈아입은 수연은 그를 마주치기 전에 가게를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복잡했던 머리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지.

“아…….”

또르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천천히 집 쪽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주룩주룩 비가 오듯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흐으윽. 흐어어엉!”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었지만, 수연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걸을 뿐이었다.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다. 내 사람이 생겼다고 너무 들뜨고 좋았다. 너무 행복해했던 터라, 이제는 그녀에게 다시 불행을 안겨준 것이다.

행복하지 말라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수연은 이틀 내내 울다 지쳐 쓰러졌다. 로버트에게도 가게에서도 전화가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스물한 살 수연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다.

그렇게 이 주를 보냈다. 몸이 너무 좋지 않다는 말로 가게에는 전화 통보로 일을 관뒀다. 거의 잘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로버트의 전화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몇 번 그가 집 앞까지 찾아왔지만, 정확한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어 몇 번 헤매는 그의 차만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연은 번호를 바꾸고 집을 이사했다. 계약이 만료돼 이사할 시기였지만, 문득 제가 도망친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더는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아 번호까지 바꿨을 무렵에 알게 됐다.

자신이 임신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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