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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39화 (39/70)
  • 39화

    [죄송해요. 괜찮아요?]

    정신을 차린 로버트가 말을 더듬거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자신만큼이나 놀랐는지 여자는 큰 눈을 더 크게 뜬 채로 그를 한참이나 올려다봤다. 동양인치고도 키가 작은 편에 속하는 건지 여자는 앳돼 보이는 얼굴로 말이 없었다.

    [저기, 너무 놀랐나요?]

    그가 서둘러 네임텍을 바라봤다. 한국어 아래 영어로도 적힌 발음의 이름이 있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그는 천천히 그렇지만 정확하게 이름을 불렀다.

    [수연.]

    “네?!”

    수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야 상황이 보였다. 떨어지려는 물병을 저 남자가 잡아줬구나. 그의 손은 큼지막해서 수연이 두 손으로도 끙끙거리며 들던 병을 한 손으로도 쉽게 잡았다. 그나저나…….

    “악! 죄송해요! 암 쏘리!”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아직도 남자 손 위로 겹쳐 잡고 있는지 몰랐다. 수연이 너무 놀라 바라보자, 남자는 녹색 눈동자를 가볍게 휘며 웃었다.

    [괜찮아요. 수연은 괜찮나요?]

    [아,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듬더듬 영어로 대답한 뒤 그에게서 물병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꾸벅이며 귀빈실로 들어가려던 수연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갸우뚱거렸다. 대체 왜 여기 있던 거지?

    [실례지만, 예약하신 분이신가요?]

    아직 십 분 정도 남았는데……. 하지만 오늘 예약이 외국인이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짧은 영어에도 남자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버트 에반스입니다.]

    [아, 죄송해요.]

    역시나.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휙휙 돌렸다. 대체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은 어디 간 거야? 당장 긴 영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어 매니저를 찾았다. 그때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일행은 조금 늦어요. 천천히 해도 돼요.]

    “네? 아. 땡큐…….”

    말꼬리를 흐리며 우선 물병부터 귀빈실 안 테이블에 정갈하게 올려뒀다. 그녀를 따라 별 어려움 없이 룸으로 들어간 로버트가 슈트의 앞 단추를 풀더니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았다.

    수연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구르다가 열심히 연습한 문장을 말했다.

    [식사는 일행분 맞춰 준비해 드릴까요?]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많이 쓰는 문장 위주로 외운 게 도움이 됐다. 내심 뿌듯해하며 룸을 나서려는데, 남자가 붙잡았다.

    [수연. 궁금한 게 있는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중저음 남자의 말에 수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더 어려운 말을 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매니저를 불러야 하나. 잠시 고민하며 다시 그의 앞으로 섰다.

    수연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로버트는 넓은 룸 내부를 살짝 둘러보더니 물었다.

    [여기 직원인가요?]

    [네, 맞습니다만……?]

    [매일 있나요?]

    이런. 난관에 부딪혔다. 둘째 넷째 수요일만 쉰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전해야 하지? 가격대가 꽤 있는 비싼 곳이었고, 남자의 행색과 오늘 주문한 요리만 봐도 돈이 많은 것 같은데 붙잡아야 좋은 거 아닌가?

    수연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며 대뜸 미소부터 지었다. 웃으면서 말하면 뭐든 잘 들리지 않겠는가.

    [수요일에 쉬어요. 2주, 4주.]

    [네?]

    로버트의 녹색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수요일에 쉰다는 건 알겠는데, 2주와 4주는 뭐란 말인가. 알려주기 싫다는 말이었나, 너무 급하게 들이댔나. 그의 눈동자가 격해지는 걸 본 수연은 제가 말을 잘못 전달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수습했다.

    [한 달에 두 번, 수요일에 쉬어요. 아, 그러니까…….]

    더듬더듬 설명해 나가려는 수연을 따라 함께 심각해졌던 로버트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다.

    [아, 두 번째 주와 네 번째 주 수요일에만 쉰다는 말이군요! 맞죠?]

    [네, 맞아요!]

    [내가 맞췄어요.]

    그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라고 수연 역시 방긋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보며 의미 없이 웃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연은 예의 그 미소만 남긴 채 로버트를 바라봤다.

    [그럼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귀빈실을 나온 수연은 문을 닫고 나서야 어깨까지 잘게 떨며 웃었다. 내가 맞췄다니, 귀여운 남자였다. 힐끗 남자가 있는 곳을 돌아봤던 수연은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아, 손님이 왔다고 전달해야지.

    남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눈으로 수연을 찾아 인사했다. 마지막 뒷모습을 보니 괜히 아쉬워졌다. 보기 드물게 진짜 잘생겼는데……. 괜히 아쉬움을 되새길 새도 없이 다시 바쁘게 일에 치였지만.

    그렇게 남자를 보는 건 스쳐 지나가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가 계속 오기 전까지는.

    [수연.]

    식사를 마친 로버트가 먼저 룸을 나와 익숙하게 수연을 찾았다. 처음 오고 나서 나흘 연속으로 오더니 이제는 주에 적으면 세 번에서 많으면 다섯 번까지도 왔다.

    [아,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덕분에. 참, 혹시 단 거 좋아해요? 초콜릿이 선물로 들어왔거든요. 직원들과 나눠 먹어요.]

    그는 쇼핑백 하나를 건네줬다. 얼떨결에 받아든 수연이 의아하게 보자,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뒤따라 나온 일행과 합류했다.

    [다음에 봐요. 수연.]

    [가, 감사합니다…….]

    로버트가 가게를 나가고 나자 익숙한 듯 직원 몇 명이 다가왔다. 홀에서 서빙을 맡은 수연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었다.

    “뭐야? 오늘도 뭐 주고 갔어? 저번에도 마카롱 주고 갔잖아.”

    한 여자가 의아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여자는 어머머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넌 마카롱밖에 못 봤어? 외국에서 유명한 쿠키 세트에, 젤리에, 그때 회식 때 다 같이 마셨던 와인도 저분이 수연이한테 주신 거잖아. 오늘은 뭐야? 초콜릿?”

    “어머, 수연아. 진짜 너 마음에 들어서 계속 오는 거 맞나 보다. 매니저님이 매출 올라서 좋다고 하시더라. 한 번 오시면 몇백은 그냥 찍는 VIP잖아.”

    “저분 되게 유명한 사람 자식이랬는데. 대학 졸업하고 이제 막 경영에 참여하는 거라고 들었거든.”

    “누군데? 엄청 부자겠지? 저번에 Z그룹 회장님이랑도 여기서 미팅했잖아.”

    도란도란 남자의 이야기로 수다에 빠졌다. 그마저도 일 때문에 금방 흩어져야 했지만. 수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초콜릿을 바라봤다. 근래 오기만 하면 수연에게 늘 무언가를 쥐여주고 가는 그였다.

    안쪽으로 들어가 제 사물함에 넣으며 상자를 열어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와.”

    생전 처음으로 먹어보는 식감이었다. 초콜릿이 이렇게 부드러운 거였나.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진한 향이 가득 퍼졌다. 단 걸 먹으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뭐지?”

    다시 나가려고 넣는데 초콜릿 상자 아래에 깔린 종이를 발견했다. 뭔가 해서 보니까 명함이었다. 온통 영어로 된 거였지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명함이라는 걸.

    “로버트 에반스…….”

    뭔가 마음에서 송골송골 이슬 같은 게 맺히는 느낌이었다. 촉촉해진달까. 매일 일에 찌들어서 살았다. 열아홉이 지나 보육원을 나오며 얼마 안 되는 지원금과 여태 모았던 돈으로 월세 20만 원 방을 잡았다. 그리고는 늘 같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대학에 가기엔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친구를 만나 놀기에는 하루가 급했다. 일하다 보며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일하며 만난 사람은 더 가까워질 명분이 없었다.

    “뭐…… 등록금도 없었지만.”

    친구도 여유가 있어야 사귄다는 걸 알았다. 그나마 중학교 고등학교 때나 보육원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도 다 연락이 끊겼다.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수연에게는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서 그의 호의가 더 크게 와 닿았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호의였다. 누군가가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게 아닌. 여태 살며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던 이십 대 초인 수연에겐 설렘을 가득 자극할 일이었다.

    어렴풋이 미소가 지어졌다. 저도 모르게 다정한 그의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뒤이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쇼핑백을 구겨지지 않게 넣은 수연이 홀로 서둘러 나갔다.

    ***

    “안녕하세요, 수연.”

    익숙한 목소리에 그렇지 않은 언어였다. 수연이 휙 뒤돌았다. 여느 때처럼 예약 시간보다 몇 분 더 일찍 온 로버트가 환히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백구십에 육박하는 그는 언제나처럼 정갈한 슈트 차림이었다.

    “한국말을…….”

    [짧게 배웠어요. 앞으로는 더 배울 거예요. 아직은 몇 단어밖에 잘 못 해서.]

    그가 다시 영어로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수연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자, 로버트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는 날 있어요? 다음 주도 괜찮고요.]

    [네?]

    [함께 밖에서 보고 싶어요. 수연.]

    늘 다정하게 불러주는 제 이름이 이때만큼은 너무나 좋았다. 누가 지어준 건지도 모르는 이름을 그가 불러줄 때면 없던 애정이 생겼다.

    [지,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맞아요. 데이트해요, 우리.]

    수연의 얼굴이 귀까지 화아악 타올랐다. 붉어진 얼굴로 수연이 빠르게 부채질하며 그를 보자, 로버트는 그 모습마저 귀여운지 잔뜩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번호,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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