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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38화 (38/70)
  • 38화

    “……나한테 왜 이래요.”

    왜 자꾸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 안 된다니까, 정말 안 되는데……. 점점 표정이 흐려지다 못해 곧 울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말 추하게 울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당신 아픈 거까지 말하면서 날 거절하려고 하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당연하지 않아. 이번엔 날 설득하지 못했으니까 다음 기회를 노려봐. 그리고 다음 차례는 내가 당신을 설득할 차례라는 것도 잊지 마.”

    그가 애써 웃으며 소파에서 이라를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품에 안고 자고 싶은데, 오늘은 참을게.”

    “무슨…….”

    “더 있으면 안 참고 끌어안을 거니까 기회 줄 때 얼른 방으로 돌아가지 그래.”

    더 거절하기 전에 대화를 끊으려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바로 옆 방인데도 불구하고 나와서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그를 보며 이라가 힘없이 웃었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자요.”

    “내일 봐. 함께 나가자.”

    그가 피식 웃으며 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 얘기는,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면 그때 다시 해 줘.”

    “……얼른 자요.”

    “Sweet dreams.”

    ***

    “와아……!”

    이른 아침부터 그에게 끌려 나온 이라는 순간순간에 놀라고 있었다. 귀를 뻥 뚫는 배기음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침부터 질주하는 뻥 뚫린 해안도로에 시원하게 머리까지 휘날렸다. 어쩐지 아침부터 대뜸 선글라스를 씌워주더니만…….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흰색 티에 청바지를 걸친 그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이라와 같은 모델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머리는 똑같은데, 그는 화보 촬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왜?”

    바람을 가로지르는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넋이 나간 듯 보던 그녀가 시선을 바로 돌렸다.

    “부가티를 타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살아서요!”

    분명 나오며 저택에 있는 차고를 봤다. 이런 종류가 한두 대가 아니었음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에 얼빠진 듯 고개를 돌려 보던 그가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아하하하하!”

    아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그냥 웃은 거일 수도 있지만 바람에 섞여들려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의 웃음이 의아해 바라보자, 조금 속력을 줄인 그가 씨익 웃으며 선글라스 너머로 이라를 보며 말했다.

    “아쉽게 됐네.”

    “네? 뭐가요?”

    “부가티를 탄 게 처음이 아니라서.”

    대체 무슨 소리야? 의아하게 바라보자, 제이든은 쉽게 답을 내놓았다.

    “십 년 전에 당신을 태웠던 차도 같은 브랜드거든.”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빠진 이라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십 년 전의 그녀는 명품의 명 자도 몰랐으니까. 차를 알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그가 가진 것에 관심도 없었다.

    “와, 내가…….”

    그 잡지나 뉴스에서만 보던 그 차를 탔었다니. 아니, 지금도 타고 있다니. 얼떨떨한 걸 너머서 생각이 정지됐다. 멍하니 있기를 몇 분, 그가 어느 한 곳으로 들어가며 차를 세웠다.

    “아침부터 먹고 다시 넋이 나가는 게 좋겠어.”

    그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서둘러 따라 내리려고 움직이자, 그보다도 빠르게 그가 먼저 문을 열어줬다.

    “아, 고마워요.”

    “천만에.”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나서야 건물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소리 없이 입술이 벌어졌다. 이건 무슨 촬영지인가……?

    “그때 이런 거 잘 먹었던 것 같아서. 브런치 파는 가게야.”

    브런치를 팔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건물 뒤로 펼쳐진 해변에 넋을 놓았지만, 주변에 직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에 놀랐다. 분명 이런 풍경이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야 하지 않나?

    놀란 이라를 데리고 들어간 그는 익숙하게 직원과 가볍게 몇 마디 나누더니 어느 한 곳으로 이동했다. 가게 안이지만, 거의 해변과 가까운 곳에 이미 그들의 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지금은 간단히 먹고, 저녁에는 해산물이나 고기가 좋겠어.”

    “……네에.”

    “계란은 스크램블 어때. 베이컨 굽기는 어느 정도가 좋아.”

    그가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렸는데, 이어지는 목소리가 없자 그가 힐끗 고개를 들었다. 이라는 이미 해변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관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돌아서긴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찬찬히 파도를 구경하는 이라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은우가 떠올랐다. 이런 걸 보면 되게 좋아했을 텐데…….

    “은우도 바다를 좋아하나.”

    퍼뜩 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로 그를 보자, 어느새 테이블 앞에 턱을 괴고 함께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제 생각이 들린 게 아닐까? 순간 의심했다.

    이라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든은 옅게 웃으며 바다로 향했던 녹색 눈동자를 옮겨 그녀를 바라봤다.

    “다음에는 은우에게도 보여주고 싶네. 아이가 좋아한다면 말이지.”

    “아, 은우도 좋아해요. 물을 좋아해서…….”

    “다행이네.”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어쩐지 이상했다. 몇 번 보지 않은 그가 이런 먼 곳까지 와서 아이를 생각한다는 게. 그리고 아이를 생각하는 그의 표정에 풍족한 만족감이 깃든다는 게.

    멍하니 그를 보는데 제이든은 턱을 괬던 손을 치우고 메뉴판을 그녀가 잘 보이도록 돌려놨다. 영어로 적힌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렵지 않게 설명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 중에서 고르면 돼. 마실 것은 여기야.”

    “되게 복잡하네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맛있게 시켜 볼게.”

    직원을 부른 그가 영어로 메뉴를 주문했다. 짧게 주문이 끝나자 다시 둘이 됐다. 그는 먼저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에릭이 추천해서 왔던 곳이야. 여자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굳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정말 데이트 코스를 고심해서 고른 남자처럼 보였다. 아니, 굳이 틀린 말은 아닌가.

    “이런 데서 밥도 먹고. 정말 여행하러 온 기분이네요.”

    “아버지도 늘 어머니가 오시면 오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해. 맛은 그냥 그럴지 몰라도, 보이는 게 다르니까.”

    늘 미국을 꺼렸던 수연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싶어 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결국, 아직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문득 그의 말에 이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례일 지도 모르는데, 사장님은 왜 혼자 한국에 사시는 거예요?”

    멀쩡히, 아니 이렇게 대단한 남편과 아들을 두고서. 그들의 재력을 눈으로 보니까 그 카페는 놀랍지도 않았다. 돈이 많은 건 알아도 이렇게까지 많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굳이 수연이 혼자 있으니 의아했다. 듣기론 그녀 역시 기댈 가족 없던 고아였는데.

    “가족이 한국에 있다면 몰라도 남편과 아들이 다 이곳에 있잖아요.”

    “그러게.”

    그가 언뜻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에 와서 죄책감을 느끼셨거든.”

    해갈되지 않은 고통은 늘 행복을 좀먹었다.

    “나를 버린 게 여전히 힘드신 거지. 막상 아버지의 재력을 눈으로 보고 나서는 견딜 수 없게 더 힘이 드셨던 거야. 이런 풍족한 아버지 밑에서 자랄 수 있는 아이를 보육원에 버렸으니까.”

    그 누구도 쉽게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묻어버렸고, 잊은 척 눈감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이라에게 털어놓았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어머니는 날 다시 데려오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찾아왔어. 그리고 다 함께 미국으로 왔지. 그게 아마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일 거야.”

    ***

    “수연 씨, 귀빈실에 오늘 중요한 분들 오시니까 특별히 신경 잘 써요.”

    “네, 알겠습니다.”

    착실히 대답한 수연은 서둘러 점검을 마쳤던 귀빈실로 다시 향했다. 총 4인의 코스 요리가 준비될 방은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고급 식당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끝나면 PC방에 야간으로도 일했다. 하루에 잘 시간이 고작 5시간도 안 돼 늘 수연의 눈가에는 피로가 물들어 있었다.

    사업상 한국을 들르는 외국인을 접대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식당이었다. 손님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 영어는 필수였다. 영어도 잘 안되는 수연을 채용한 이유는 예쁘장한 얼굴 때문이었고, 채용된 수연은 없는 시간을 쪼개 영어를 공부했다.

    “물을 먼저 채워 둘까.”

    시간을 보니 조금 촉박했다. 도착까지 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빠르게 주방으로 뛰어 가 크리스털 유리로 된 물병을 들고 다시 귀빈실로 향했다. 유리 무게에 물까지 있으니 생각보다 무게가 꽤 나갔다.

    [저기.]

    “아!”

    귀빈실로 들어가기 직전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수연이 그만 물병을 놓쳤다.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입구에 흩뿌려진 물을 시간 맞춰 치울 상상마저 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든 잡으려고 몸을 던지는데, 순간 큰 손이 턱, 병을 잡았다.

    허공에서 멈춘 병을 큰 손 위로 다시 겹쳐 잡은 수연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리고 코앞에서 보이는 영롱하고 진귀한 녹색 눈동자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뭐지, 하며 생각하는 순간 녹색 눈동자를 가진 외국 남자의 얼굴은 혼이 빠진 것만 같아 보였다.

    물병을 잡은 작은 동양 여자를 보던 로버트는 그대로 정신을 놓을 뻔했다. 단 한 순간에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

    그냥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 작고 작은 여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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