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황당해서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서로 말도 안 통하면서 벌써 두 시간이 넘게 그의 방 소파에 마주 앉아 있는 이라와 에릭이었다. 중간에는 번역기 앱이 꽤나 열심히 가동 중이었고.
이라를 너무 막무가내로 미국으로 부른 건 아닐까 조금 고민하긴 했었다. 막상 왔던 이라의 표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서 더 걱정했는데, 그나마 밝은 에릭 덕분에 그녀의 얼굴도 많이 풀어졌다.
소파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책상에서 그들을 보던 제이든은 한숨과 함께 둘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좀 웃기긴 했다.
<나는 안다. 그때의 일을. 우리는 더 친해질 것이다.>
에릭이 번역한 문장을 들은 후 이라가 활짝 웃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에릭의 재치에 이제는 재밌어했다.
“뭐가 그렇게 신나?”
제이든은 당연하게 이라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가 힐끗 이라를 보며 눈썹을 올리자, 이라는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나 찾다가 공항에서 사진 엄청나게 찍히고 그랬다면서요?”
“용케 알아들었네.”
제이든이 힐끗 번역기를 바라봤다. 이미 배터리도 거의 다 달아 꺼질 듯 말 듯 했다. 에릭은 만족한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드디어 껐다.
[참, 십 년 만에 다시 온 미국인데 집에만 있기는 좀 아쉽지 않아?]
에릭의 질문에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든은 간단히 그의 말을 전달했다.
“미국에 십 년 만에 다시 온 건데 집에만 있기는 좀 아쉽지 않냐고 물어보네.”
아. 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온 건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 얄밉긴 해도 이라 역시 그를 더 볼 수 있는 건 좋았으니까. 현실이 어떻든 간에.
[안 그래도 내일 나갈 거야. 근데 넌 안 가? 꽤 늦었는데.]
가라는 듯 눈을 흘기는 제이든에 에릭은 간단히 어깨를 으쓱였다.
[이라한테 전해줘.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주 만나자고.]
[그럴 일 없어.]
[안 전해주면 나 안 갈 거야.]
“한국 가기 전에 또 보자고 인사한 거야.”
곧장 한국어로 통역한 말에 이라가 웃으며 에릭에게 인사했다. 끝까지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에릭이 가고 나니 둘만 남게 됐다.
“진짜 재밌는 분 같아요. 참, 그때 말했던 김장했다던 토종 미국인이 에릭인가요?”
“맞아. 그런 것도 얘기했어?”
“한국을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가볍게 웃었던 이라는 아까는 미처 구경하지 못했던 그의 방을 스윽 둘러봤다. 사실 별다른 건 없었다. 이라의 방보다는 엔틱한 느낌이 강하달까.
“……당신이 아홉 살까지 사장님도 여기 지내셨다고 했죠?”
“응.”
그가 이라를 따라 방을 둘러봤다. 거의 건들지 않은 가구는 그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건너편은 서재야. 저쪽으로 보이는 문이 서재로 통하는 문이고.”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문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방은 유독 문이 여러 개였다.
“화장실 문인 줄 알았어요.”
“그건 저쪽.”
반대 방향을 가리키자, 이라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넓어서 그런가 구조가 독특했다.
“저 문을 넘어 매일 글만 썼어. 책 읽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사장님께 들었어요. 그러다가 대뜸 출간된 책을 건네준 것까지요.”
그가 의외라는 듯 피식 웃었다. 수연이 그렇게까지 이라에게 다 털어놓을 줄은 몰랐었다.
“내가 그랬거든.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당신과 잘해 보고 싶다고.”
“아…….”
“진심이야. 당신과 더 먼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
어느새 그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이라가 난감하다는 듯 그를 보자, 제이든은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릭도 꽤 당신이 마음에 든 것 같더라.”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당신도 에릭도.”
살면서 이런 톱스타를 심지어 두 명이나 개인적으로 알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에릭만 해도 방송국에 왔을 당시 이라 정도의 급들은 아주 멀리서 바라볼 뿐 사진이나 사인 한 장 요청도 못 하는 위치였다.
무언가 비현실적인 상황이 자꾸만 현실이 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여전히 그가 좋다는 것. 맘 편히 표현할 수 없어도 그게 사실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문득 내뱉은 이라의 말에 그는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편히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이라는 무릎 위에 놓았던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잡았다.
“정말로 나와 함께 하는 미래가 그려져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눈빛에 오히려 제이든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대답하기 곤란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질문이 터무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았던 그는 자세를 틀었다.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이라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가벼운 이라는 별 어려움 없이 그를 마주 본 상태가 됐다.
솔직히 말하면 외모부터 성격까지 한이라 자체가 그의 취향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진 몰랐다. 살면서 여자가 필요했던 적이 없었고, 주위에는 늘 차고 넘쳐서 이상형 따위는 그에게 생각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 그런데 이라가 나타난 뒤로는 달라졌다.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이라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허공에서 얽매인 시선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던 그가 한숨과도 같이 대답했다.
“나는 늘 고민 중이야. 당신에게 대체 어떤 모습을 어필해야 할지.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거 이해 안 돼. 거절당해 본 적 없어서 당황스러운 것도 여러 번이야.”
서른여섯 먹을 때까지 늘 여자들의 추파가 끊겨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거절엔 내성이 없었다.
“혹시 내 얼굴이 취향이 아닌가?”
“그럴 리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정해 버리고 나서야 이라는 아차 싶었다. 젠장, 너무 반응속도가 빨랐잖아. 하지만 그런 반응에 오히려 그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면 내 재력이나 인성적인 문제가 걱정돼?”
“……설마요.”
이번에는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자, 제이든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거 셋이 문제라면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거든.”
“아니, 내 말은. 당신이 나한테 부족하거나 마음에 안 찬다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니까.”
“대체 뭐가.”
그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에 이라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내가 모자란다고요. 당신 옆에 서 있기엔 내가, 내가 당신한테 줄 게 없어요.”
“이라. 난 당신한테 뭘 달라고 한 적도, 바라지도 않아.”
“그게 문제예요.”
이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 사람만 주는 관계는 쉽게 지치고 끊어지기 마련이에요. 나는요, 평생을 지지할 사람 없이 살았어요. 그건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잖아요.”
그를 보는 그녀의 시선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얘기 다 털어놓은 거 당신밖에 없어요. 십 년 전에는 다신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서였고,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결국은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인 걸 알기 때문이었어요.”
무릎 위에 있는 작은 두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에 그녀는 현실이라는 무거운 짐이 있었다.
“당신이 좋다는 말, 진심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을게요. 나도 당신 거절하는 거 힘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상황을…….”
“너무 겁부터 먹은 거 아니야?”
그녀의 말을 끊은 그가 꽉 쥔 작은 두 손을 포개어 덮어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두 주먹 안으로 스며들어 강하게 쥐었던 힘이 어느새 자연스레 풀렸다.
“여태 당신 인생이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잖아. 나한테 기대. 여태 하지 못했던 것들 내 옆에서 하고, 조금은 쉬기도 하고, 투정도 부려보고, 마음껏 사랑도 받아 봐.”
“…….”
“그게 당신이 나한테 줄 모든 것들이야. 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받고 싶어.”
너무 확고한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굳게 다짐했던 그녀의 생각이 엉망으로 뒤엎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거절하는 것도 벅찼다. 마음은 그렇게 흔들리는데, 머릿속 이성은 자꾸만 그녀를 붙잡았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삶…… 너무 편하고 좋아 보이는데요, 내 건 아닌 것 같아요.”
“이라, 제발.”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 한국에서 얼굴 꽤 많이 팔렸어요. 그거 좋은 일로 팔린 거 아니에요. 이혼당하고 위자료 한 푼 없이 은우까지 빼앗기고 쫓겨났는데, 없는 돈 긁어서 합의금까지 마련했어요.”
밑바닥까지 추악하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는데. 결국은 알게 될 거라 스스로 드러냈다. 여태 그녀를 힘들게 했던 게 결국 제 잘못이 아니더라도, 밝혀진 건 그 무엇도 없었다.
“당신도 봤으니까 알잖아요. 나 은우 얼굴 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요. 그때 뺨 맞은 거 물어봤죠? 전 시어머니한테 맞은 거예요.”
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다른 추악한 속내를 드러낼 때도 미동도 없던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
“7년 가깝게 그렇게 지냈어요.”
“맞았다고?”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순간 너무 위압적이어서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제이든은 굳은 인상으로 손을 뻗어 이라의 얇은 팔뚝을 잡았다. 험악한 인상과는 다르게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하면 내가 그렇구나, 하고 나가떨어질 줄 알았어?”
“제이든…….”
“당신이 말하는 과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난 결코 다 짐작도 못 하지만, 그냥 드는 생각은 딱 하나야.”
그가 이를 바득 갈았다. 턱 근육이 눈에 띄게 뭉쳤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만큼은 강렬했다.
“당신 앞에 더 빨리 나타나지 못한 게 후회돼.”
이라의 단단하게 굳혔던 표정이 흐려졌다. 그의 말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대체 이런 마음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