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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35화 (35/70)

35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걱정스러운 물음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접촉 사고가 있던 건 맞았다. 그의 동선을 파악해 쫓아다니던 파파라치들과 부딪혔다.

“사고가 난 건 맞아. 하지만 보다시피 괜찮아.”

“……그럼 난 왜 불렀어요? 아니, 애초에.”

말을 하다 만 이라는 생각이 복잡한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다쳤다고 미국까지 쫓아오는 사람이 어딨어. 애인도 아닌데. 막상 온 건 자신이면서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나는 나 나름대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뿐이야.”

그의 뻔뻔한 말에 이라가 황당하게 바라보자, 제이든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렀다.

“말했잖아. 더 생각해 보라고.”

“그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당신 제대로 설득하고 싶은데.”

고개를 내리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어버버 거리던 이라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사장님께도 죄송한 일이에요.”

“카페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해. 서재 정리를 도와준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하네요.”

슬쩍 그를 노려보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일 뿐 번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굳이 번복하더라도 이라가 당장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짧은 시간이긴 했어도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었는데. 그 운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는 이라의 앞에 떡하니 있었다. 저 잘생긴 얼굴로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집 구경부터 시켜줄까? 아버지 집이긴 한데, 어릴 때는 나도 여기 살았어. 지금은 자주 있진 않지만.”

그가 웃으며 입구를 가리키자, 이라는 선뜻 걸으려던 걸음을 멈췄다. 확실히 할 건 해야지.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제이든 역시 걸음을 멈추고 이라를 바라봤다. 무언가 다짐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녀가 할 말을. 그리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런 거 다 헛수고예요. 이미 말했다시피…….”

“말했잖아.”

그가 단정하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

“납득시켜 달라고. 우리가 만나면 안 될 이유를 이해시켜 당신은. 그러는 동안 나는 우리가 왜 만나야 하는지 당신을 이해시킬 테니까.”

“제이든…….”

“기회를 줘. 밀어내면 아프다고 했잖아.”

그는 다시 미소 지은 채 이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일주일이잖아. 즐겨.”

“그렇지만.”

“재밌었잖아. 십 년 전에, 우리.”

짙은 녹색 눈동자가 반달로 접히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속수무책이었다. 십 년 만에 다시 온 미국에서는, 그때와 같이 그와 함께였다.

***

“방은 이쪽이야.”

저택은 이라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컸다. 중앙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 후에 제이든은 어느 한 방 앞에서 멈췄다.

“짐은 다 이쪽으로 넣어놨어.”

아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짐부터 옮겨주더니, 이게 여기로 갔구나. 멍하니 집을 구경하자, 그가 달칵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이 방을 쓰면 돼. 참고로 내 방은 바로 옆이야.”

문과의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었으나, 그는 바로 옆방을 가리켰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자, 그가 방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혹시 더 필요하거나 불편한 거 있으면 꼭 말해 주고. 엘리베이터도 있어, 복도 끝이지만. 아, 아까 인사 나눴겠지만, 에이미가 이곳을 총괄하는 관리자야. 한국어는 못하지만, 듣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해.”

“아…… 네.”

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둘러봤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넓었다. 방 하나가 30평 즈음은 되는 듯했다. 어쩌면 더 클 수도.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그레이가 섞인 인테리어였다. 누군가 쓰던 방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깔끔했고, 가구 역시 모던했다. 입구에서부터 느꼈지만, 저택이 전체적으로 엔틱했는데 그녀가 쓸 방은 그렇지 않았다.

침대부터 화장대, 한편에 마련된 드레스룸과 화장실, TV부터 대형 스피커, 간이 냉장고, 소파와 책상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내가 써도 되는 거예요……? 다 비싸 보이고 되게…….”

새것 같은데. 힐끗 그를 보자, 당연하다는 듯 그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당신을 위한 거야. 편히 쓰면 돼. 불편하다면 옆방에서 나랑 같이 지내도…….”

“감사하게 잘 쓸게요.”

이라가 눈을 흘기며 그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버티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제이든은 웃으며 밀려나는 척 밖으로 나갔다. 문고리를 잡은 이라가 반쯤 문을 닫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조심히 가세요. 옆방으로.”

“오케이, 오케이. 이라. 알겠으니까 밀어내지 마.”

그가 문을 채 다 닫지 못하게 큰 손으로 턱 잡았다. 이라가 여전히 눈을 흘기며 보자, 제이든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비행 때문에 피곤할 테니까, 집에서 쉬자. 엄마와 당신을 위해 꽤 맛있는 요리가 준비됐으니까. 대신, 내일부터는 함께 밖으로 나가보는 거야. 이왕 온 김에 데이트 실컷 하자.”

“제이든.”

“기회는 주라고 했잖아. 미국까지 와서 이 작은 방에 박혀 있긴 시간이 아깝잖아.”

전혀 작지 않은데요. 이라는 뒷말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으려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다.

“다이닝룸은 1층이야.”

어쩔 수 없이 다시 방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말해줬다.

“부모님이 쓰실 방은 1층에 있어. 건너편 건물은 직원들이 쓰고, 에이미는 1층 복도 끝방에서 지내. 침대 옆에 보면 전화기가 있는데 그건 에이미에게 연결되는 거니까 필요한 건 그걸로 말하면 될 거야.”

“영화에서나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은 영화처럼 사나 봐요.”

어느새 눈을 빛내며 구경하던 그녀의 말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의 의미를 몰라 올려다보자, 제이든은 이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이렇게 살진 않지. 나 또한 이렇게 살진 않아.”

의미를 몰라 올려다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에는 거의 나가 살았어. 남들보다 돈을 잘 벌었으니 풍족하게 산 건 맞겠지만, 이 정도로 부를 과시하면서 살진 않지.”

어쩐지 대답하며 저택 내부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이질감이 담겨 있었다. 이라는 그런 그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가 여기서 태어나 자랐다면 달랐겠지. 한국에서 태어나 보육원까지 가 고생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쩐지 그와 동질감이 느껴졌다. 주어진 환경과 미래는 전혀 다르지만.

[제이디, 시간 맞춰 잘 내려왔구나.]

다이닝룸 근처로 가니 마침 함께 들어가던 로버트와 수연이 보였다. 로버트는 반갑게 웃으며 둘을 바라봤다.

“식사부터 하며 이야기해요.”

인자하게 웃으며 수연을 챙겨 먼저 들어가는 로버트의 뒷모습을 보던 이라는 문득 이건이 생각났다. 늘 저렇게 다정하게 웃어주던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이라, 가자.”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다양한 음식이 한 상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미 로버트는 수연의 존재만으로도 기쁜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제이든과 함께 나란히 식탁에 앉자, 뒤에 있던 메이드가 웃으며 잔에 물을 따라줬다.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건 이라 뿐이었다. 제이든과 로버트는 당연했고, 수연 역시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황인 건지 어색하게 보이진 않았다.

“아, 감사…….”

꾸벅 인사하는 그녀에게 메이드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게 있다면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다이닝룸을 나갔다.

“방은 구경했나요?”

그때 로버트의 목소리에 이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미 수연의 앞 접시로 음식을 옮겨주던 그가 친절하게 이라를 바라봤다.

“아, 네. 방금 보고 내려왔어요. 방이 참 예쁘던걸요.”

“수연과 이라가 오는 하루 동안 제이디가 꽤나 노력했죠.”

그의 말에 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력이라니? 무슨 소리지.

“원래 있던 가구를 다 끌어내는 것도 모자라 스무 시간이 채 남지 않았는데도 저 가구를 들여놓느라 모두가 꽤 고생했죠. 특이 에이미가.”

“굳이 필요 없는 설명을 하시는 것 같네요.”

제이든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압박을 담은 시선을 보내자, 로버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했어요. 제이디가 푹 빠진 여자가 누군지.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로버트가 다정한 시선으로 이라를 보며 음식을 향해 정중히 손짓했다.

“많이 들어요. 최대한 입맛에 맞게 준비하라 했으니까.”

“아, 네. 너무 맛있어 보여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대답하고서도 아까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가지 않아 멍하니 물컵을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고작 일주일 쓸 방인데도…….

“이거 먹어 봐. 당신 이런 거 잘 먹었던 것 같은데.”

부드러운 수프와 함께 관자 요리를 그녀의 앞으로 놓아준 그가 여러 음식을 보며 그녀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래요. 이왕 온 김에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요, 이라 씨.”

수연이 생긋 웃었다. 이라는 어색하지 않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웃는 이라의 모습에 제이든은 다시 시선을 차단하며 이라를 향해 여러 음식을 놓아줬다.

“얼른 먹어. 배고프지 않아?”

“아, 비행기에서 먹었어요. 덕분에.”

“고작 기내식으로 배가 찰 리가 없잖아.”

충분히 찼었는데요. 이번에도 뒷말을 삼킨 이라가 포크를 들었다. 그가 놓아준 관자 요리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때도 맛있었는데, 지금 역시도 맛있었다. 쫄깃함 뒤로 사르르 녹는 식감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진짜 맛있어요.”

그녀의 반응에 제이든은 더 만족한다는 듯이 제 접시는 여전히 비어 있음에도 이라의 접시에 맛있는 것들을 잔뜩 덜었다.

방향까지 아예 이라 쪽으로 틀어져 있는 그를 보며 수연과 로버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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