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이라는 멍하니 이륙하는 비행기 창문을 내려다봤다. 잔 진동과 함께 활주로를 뻗어나가던 비행기는 곧이어 땅과 거리를 벌렸다.
잠시 동안 얌전히 착석해 있던 이라는 이륙을 마친 비행기 옆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건너에는 수연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생 일등석을 타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출발하게 된 건…….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네? 아니에요. 사장님도 같은 상황이실 텐데…….”
말꼬리를 흐리자, 수연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다쳤다는 전화를 받은 후 제이든이 수연에게 미국에 와 달라고 했다. 동시에 그가 부탁이 있다며 말한 건.
‘이라를 데리고 와 주세요. 어떻게든 설득해 주세요.’
단조로운 말투였지만, 꽤 다급하고 절박하게 들렸다. 그게 수연에게만 그렇게 들린 건지, 아니면 정말 그의 상태인 건지 궁금했다.
전화를 끊은 수연은 온몸으로 걱정하고 있는 이라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가 다쳤다는 소식과 함께 같이 미국에 가 줄 수 없겠냐 설득했다. 당연히 많이 다쳤을 거로 생각한 이라는 순간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으나 수연은 기회를 져버리지 않았다.
“돈은 걱정하지 말아요. 멋대로 부른 쪽에서 해결하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당장 카페 문을 닫고 일주일 행 짐을 쌌다. 그리고 곧장 출발한 게 오늘 저녁이었다. 갑자기 미국에 간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허락받거나 알릴 이유가 없는 이라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 문제 없이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수연은 옅게 웃으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이라를 바라봤다. 솔직히 제이든이 다쳤다니까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를 떠나서 그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긴 했다.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너무 걱정 마요. 많이 안 다쳤다니까.”
“그래도 차 사고니까……. 아, 죄송해요. 저보단 사장님이 더 놀라셨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너무 보였다. 수연은 힐끗 이라를 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둘이 무슨 관계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수연의 질문에 이라의 두 눈이 커졌다. 안 그래도 오해받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라니. 잠시 뜸을 들이던 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그냥, 진짜 우연이 많이 겹친 인연 정도일 거예요.”
옅게 웃는 이라의 눈에는 서글픔이 담겼다. 그 짧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본 수연은 음,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
“제이든은 아니던데요. 이라 씨한테 감정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잘해 보고 싶다고.”
이라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벌써 수연에게까지 말을 했다니. 너무 놀라 아무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던 이라가 수습에 나섰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미 수연은 이라의 과거를 숨김없이 알았다. 아이가 있는 이혼녀라는 것도, 고아라는 것도. 그와 나란히 서 있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은 걸 이라 자신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그냥 서로 아직…… 감정일 뿐이라. 그렇다고 제이든과 어떻게 해 본다는 건 아니고요. 그게…….”
버벅대면서도 이라는 속으로 한탄했다. 믿겠느냐고. 당장 다쳤다는 말에 미국까지 쫓아가는 중이면서.
“……죄송해요. 근데 정말로 우려하시는 일은…….”
“우려?”
수연은 의아하게 웃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이라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다 보였다. 그리고 막상 그런 그녀를 보니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다.
로레인 이후에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던 아들이 애 딸린 이혼녀를 좋아한다는 소리에 솔직히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이라가 걱정하는 것 그대로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한국 돌아가면.”
수연은 이라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말이 끊긴 이라는 여전히 죄송한 표정으로 수연을 보고 있었다. 수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라 씨 아들 소개해줘요. 보고 싶어.”
아. 이라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진심인 듯 수연은 은우에 대해 궁금한 질문 몇 가지를 더 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정리되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머리가 복잡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허어…….”
으리으리한 광경에 넋이 나가버렸다. 공항에 내릴 때부터 족히 열은 되는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고급 세단을 타고 올 때부터 그랬는데…….
“나도 볼 때마다 질려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수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무섭도록 넓은 ‘집’을 보며 기가 찼다. 고작 둘이, 그것도 하나는 매일 있지도 않은데 이렇게 큰 집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로버트의 저택은 한국에 있는 수연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입구에서부터 오르막길을 타고 가면 또 다른 대문이 하나가 더 있었다. 대기하던 가드가 신분을 확인하고, 짐 검사도 마친 후에 들여보냈다. 물론 이라와 수연은 제외였지만.
가장 크게 보이는 분수대를 지나 푸른 정원을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차를 타고 도착해 내린 곳이 진짜 입구였다. 그리고 옆에서 얼마 안 되는 그녀들의 짐을 받은 직원 하나가 방긋 웃었다.
[환영해요. 수연, 이라.]
미리 정보를 들었던 건지 나이가 젊어 보이는 갈색 머리의 백인 여자는 생긋 웃었다. 뒤이어 나이가 좀 지긋해 보이는 여성이 갖춰 입은 채로 나왔다. 그리고 둘에게 예의를 차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수연.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이라. 저는 에반스 씨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에이미 마셜입니다. 편히 에이미라 불러주십시오.]
[아, 에이미. 반가워요.]
수연은 몇 번 봤던 건지 얼떨떨하면서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수연과 이라를 배려해 천천히 말한 건지는 몰라도 이라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한이라라고 합니다.]
어색하게 영어로 말하자, 에이미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무언가 더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과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수연과 이라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저런.”
“이런.”
두 여자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입구에서보다 바보처럼 웃으며 뛰어나오는 저 둘은 대체 뭘까. 둘 다 백구십에 가까운 기럭지였다. 이라는 황당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녹색 눈의 남자가 둘이었다. 하나는 알고, 다른 하나는…….
“수연!”
와락.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로버트는 다짜고짜 수연을 끌어안았다. 로버트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수연은 거의 가려진 듯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바랐는지 당신은 절대 알지 못할 거야.”
옆에 멀뚱히 이라를 세워 놓고도 수연만 보이는지 로버트는 찬양의 말을 몇 마디 더 내뱉었다. 그러는 동안 제이든이 이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 제이든. 대체 어딜 얼마나 다친 거예요?”
다른 건 신경 쓸 겨를 없이 그가 보이자마자 이라가 속사포로 물었다. 그 소리에 로버트의 품에서 빠져나온 수연까지 제이든을 바라봤다. 그녀들의 시선에 제이든은 반갑게 안고 싶었던 것을 꾹꾹 참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제이든, 너!”
수연이 휙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딱히 보이는 외상은 없었다. 빨리 설명해 보라는 듯 수연이 제이든과 로버트를 번갈아 봤다. 로버트는 그런 시선을 느끼고서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다가 괜히 빠져나가려는 듯 이라를 알은체했다.
“이라, 맞죠? 반가워요. 나는 로버트 에반스. 수연의 남편이자, 제이든의 아버지예요.”
악수를 하는 그의 행동에 이라는 얼떨결에 손을 잡아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한이라라고 합니다.”
한국어를 너무 잘하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혼혈인 제이든과 다르게 완전히 서양 백인의 모습을 한 그가 제이든과 너무 닮아 놀랐다. 녹색 눈에 구불거리는 저 머리는 역시나 아버지 쪽이었구나.
“우선 들어와요. 여기서 세워 두고…….”
“대체 어딜 다친 건지부터 듣고 싶은데요.”
수연이 로버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꿀꺽 침을 삼키며 제이든에게 시선을 돌리자, 제이든 역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둘의 반응에 수연과 이라는 슬슬 상황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접촉 사고가 있던 건 맞아?”
수연이 미간을 찡그린 채 묻자, 제이든은 서둘러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얌전히 내리고 있던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며 이마를 보였다.
“다치긴 다쳤어요.”
부딪힌 건지 이마 안쪽으로는 멍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내리고 있었구만. 수연은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정말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속인 건 괘씸했지만.
“대체 애도 아니고 둘 다 무슨 짓이에요? 나랑 이라 씨가 얼마나 놀랐는데. 갑자기 이렇게 미국까지 사람을 부르고…….”
많이 다치지 않은 걸 알고 있어서 놀라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괜찮은 제이든을 보니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지쳐 보이는 수연의 모습에 로버트가 당황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우선 들어가는 게 좋겠어.”
로버트가 수연을 부축한 채 들어가고 나니 이라와 제이든이 남았다. 옆에 보는 시선이 몇 더 있었지만, 눈치 빠르게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힘이 풀린 건 수연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프게 헤어져 놓고, 며칠도 안 돼 다시 볼 줄이야. 그것도 미국에서. 이라는 힘이 풀리지 않도록 다리를 더 바르게 세웠다.
“보고 싶었어.”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라는 믿기지 않는 이 현실을 돌아봤다.
다시 이렇게, 미국에서 그와 마주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 역시도 그녀는 애석하게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