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위이이잉. 원두를 분쇄하는 그라인더 소리가 유독 멀게 느껴졌다. 아이를 만나고 시간이 지나 다시 평일이 돌아왔다.
‘……아빠 안 봐도 돼?’
‘제이든 형아 보고 싶어.’
내내 그 여린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 얘기를 듣고도 헤어지며 지강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은우 휴대폰 빼앗지 말라는 힘없는 경고뿐이었다.
지강이 은우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몹쓸 짓을 하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이건은 당연했고, 미란과 지강도 은우에게 애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이라 만큼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애정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나타난 핏줄에 의해서가 전부였다.
지강은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먼저 챙겨주는 법도 없고, 집에 있어도 육아는 대부분 시부모님 몫이었다. 그리고 그 무관심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건 어린 은우였고.
그런 은우에게 있어 호의만 베풀어 준 제이든이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은우는 무언가를 원할 때 가장 먼저 듣는 소리가 ‘안 돼’였던 아이였다. 챙겨줄 이라는 너무 바빴고,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미란은 너그럽지 않았다. 그런 은우에게 제이든은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였다.
가질 수 없던 걸 꿈처럼 잔뜩 사줬고, 갈구하던 애정을 대가 없이 퍼부어줬으며, 어린 은우가 겁에 질렸을 때 히어로처럼 나타나 도와줬다.
아빠는 보지 않아도 되냐며 조심스럽게 묻던 아이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에게는 모든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으로 보고 싶다며 울먹였다. 그런 은우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하아…….”
“이라 씨?”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뱉어냈을 때, 마침 안으로 들어온 수연이 의아해 이라를 바라봤다. 서둘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든 이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너무 크게 쉬었죠?”
“죄송할 건 아닌데, 무슨 고민이 있나 했죠.”
마지막 주문까지 나가고 나니 할 게 없어졌다. 습관처럼 바를 닦는 이라를 보며 수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울적한 월요일이잖아요.”
꽤 오래 있던 제이든이 결국 토요일에 출국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있던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이라가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수연은 힐끗 열심히 일하는 이라를 바라봤다.
“손님이 뜸해졌네요.”
이라는 힘없이 웃으며 마른행주로 물기를 훔쳤다. 수연은 슬쩍 카페 밖에서 안을 힐끔거리고는 가버리는 여자들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시간에 늘 있던 제이든을 찾는 거리라.
“제이든 효과가 떨어진 거죠. 이제 갔으니까.”
“그런가요.”
이라가 작게 하하, 웃음을 흘렸다. 하긴 오늘 아침에만 해도 가게에 들어왔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나가던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와서 생각이 든 건, 그를 알아봤던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긴, 이라야 몰랐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겠지.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도 여러 시선이 따라붙었던 게 뒤늦게 그저 그가 잘생겨서만은 아니었겠다 싶었다.
“저, 몰랐어요. 유명한 사람이었던 거요.”
이라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수연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이든이 연예인인 걸 몰랐다는 거예요?”
“네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수연은 입을 벌렸다. 당연히 방송국에서 일했다고 해서 그런 연으로 알게 된 줄 알았다. 심지어 십 년 전에 만났던 사람이라길래, 그때는 그가 열심히 활동도 하던 때였으니까.
놀란 수연의 얼굴에 이라는 민망하다는 듯 목덜미를 쓸었다.
“유명한 작품 쓴 작가인 것도 배우인 것도 엊그제 알았어요.”
사실 이름과 나이조차도 안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수연에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녀는 상당히 놀란 듯해 보였다.
“그럴 수가……. 미안해요, 내가 너무 놀랐죠?”
“아, 아니요. 저야말로 실례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제가 해외 쪽으로는 잘 모르거든요.”
특히 십 년 전에는 정말 몰랐다. 그 흔한 영화관 한 번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TV는 물론이고, 노트북조차 없던 이라가 맘 편히 영화를 즐기는 취미 같은 걸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그가 집필한 책은 읽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인 줄은 절대 몰랐지만.
이라의 반응에 수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니까.
“십 년 전에 만났다고 하길래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요. 뭐 최근에는 얼굴 드러내고 활동하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십 년 전에도 왜 그 얼굴로 평범하게 살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절대 평범하게 살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방긋 웃는 모습에 수연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지만 진짜 잘생겼죠. 남들이 들으면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학창 시절부터 여자고 남자고 인기가 너무 많아서, 오죽하면 제이든이 한국으로 도망쳐 왔었겠어요. 책 가득한 서재에 앉아 책 읽는 게 취미였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더니 대뜸 책 하나를 주지 뭐예요.”
옛날 일을 생각하던 수연은 지금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출간까지 하고 나서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휩쓴 다음에야 줬어요. 그게 아마 한국 나이로 중학생 정도였을 거예요. 그때부터 쭉 책을 쓰더라고요.”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못 읽어봤지만, 번역본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기가 그렇게나 많았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늘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살던 애라서 조용한 걸 좋아해요. 잃는 게 싫어서 갖는 것에도 욕심이 없던 애예요.”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수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릴 때의 그의 모습이라니, 궁금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픈 기억만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기도 했고.
“그런데 소유하고자 하는 것에 집착도 꽤 있어요. 가끔은 무서울 정도예요.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내 아들이 맞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볼 때는 저 정도로 하니까 결국은 성공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수연만큼이나 그에 대해서 이라는 알지 못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와는 많은 추억이 없었으니까.
미소 지은 채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라를 보던 수연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솔직히 이라에게 호감을 보이는 제이든의 모습을 볼 때 좋지 않았다. 걱정부터 됐다. 아이가 있는 이혼한 여자라니. 하지만 그건 결국 수연이 가진 편견일 뿐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알았다. 이라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의 과거를 들으면서 더 그리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게 쉽지 않은 거라는 것도.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아이를 지켰다는 것도. 결국, 그 사실이 제이든에게는 치유로, 더 큰 감정으로 다가왔다는 것도.
한참 그에 대해서 떠드는데 수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힐끗 보던 수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행동이 이상해 이라가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네.”
-급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로는 익숙한 한국어가 들렸다. 혹시 제이든일까 싶어 이라는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귀를 쫑긋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제이디가 귀국했잖아.
“그렇죠.”
수연의 미간이 짐짓 찌푸려졌다. 제이든이 귀국해도 로버트가 그 일 때문에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근데 갑자기 전화해서 제이든 얘기부터 꺼내니 의아했다.
“그런데요?”
불안한 마음에 참지 못한 수연이 다시 질문하자, 수화기 너머로는 작은 한숨이 길게 퍼졌다.
-제이디한테 사고가 생겼어. 그래서 다쳤지.
“무슨……! 어, 얼마나요?!”
수연이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 휴대폰을 빠르게 고쳐 잡았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내용을 듣던 이라 역시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생명에 지장은 없어.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얼마나, 어딜 어떻게 다쳤는데요? 무슨 사고가 났어요?”
-파파라치들과 접촉 사고가 났어.
차 사고라는 말에 수연의 얼굴에 순간 핏기가 가셨다.
“제이든을 바꿔줘요. 혹시 통화도 못 할 정도로……!”
-수연, 진정해. 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아. 그저…….
로버트가 잠시 뜸을 들이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그 짧은 몇 초가 수연에게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제발 말 좀 빨리해줘요, 제이든이 얼마나 어떻게 다쳤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여러 목소리가 섞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몰라 말을 뚝 끊었던 수연은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
-저예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한 제이든의 음성에 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갑자기!”
-좀 다쳤는데, 많이는 아니고요. 엄마, 그래서 그런데 미국에 오시면 안 될까요?
미국? 수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더 있어?”
-아뇨. 다치니까 엄마가 해 줬던 잔치국수가 먹고 싶더라고요. 움직이기도 꽤 불편하고.
“얼마나 다친 건데? 다리 다쳤어? 혹시 부러지거나…….”
-와 주실 거죠?
대답 대신 재촉하는 말에 수연은 어쩔 수 없이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아까와는 달리 제이든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덧붙여졌다. 수화기 너머로 부탁을 이야기하자, 수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라에게 향했다. 목소리가 낮고 조용해서 뒷말은 들리지 않았는지 이라는 여전히 걱정스럽게 수연을 보고 있었다.
-부탁드려요.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