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32화 (32/70)
  • 32화

    “미…….”

    “사과하지 마. 진짜 차인 것 같으니까.”

    그의 말에 이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라 면역이 없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이라는 결국 몸을 돌렸다.

    “데려다줄게.”

    그가 제 짐을 챙기고 성큼 다가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날 버리고 가버리면, 또 십 년 정도는 쉽게 휘둘릴 것 같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의미 없지 않았어.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운명은 당신 같으니까.”

    그가 상체를 조금 낮춰 이라를 가까이 바라봤다.

    “밀어내지 마. 아파.”

    쿵쿵. 심장이 너무 빨리 요동쳐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반걸음 뒤로 물러난 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나한테.”

    “이라.”

    “그러지 말아요. 흔들지 말아요.”

    두어 걸음 더 멀어지자, 그가 숙였던 상체를 들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버리고는 가지 마. 같이 나가.”

    “제이든.”

    “더 생각해 봐. 알잖아, 당신이랑 더 있고 싶어도 못 있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난 오늘 돌아가니까.”

    ***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렇지 않다는 걸 옆에 쌓인 휴지가 말해줬다. 그러니까 토요일에 그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다음 날까지 울기만 했다.

    “……흐읍.”

    참으려고 해도 눈물은 툭 튀어나왔다. 이젠 한국에 없겠지. 번호도 알고 수연도 알고 많은 걸 알게 됐지만 변함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 그만 생각하면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오면서도, 이라는 작은 원룸에 박혀서 밤새 그를 검색해봤다.

    한국 사이트에도 충분한 정보가 떴다. 해외 사이트까지 뒤져보고서야 정말 그가 천재 작가에 인기 배우라는 걸 실감했다. 그냥 이름만 쳐도 이미 첫 번째로 프로필이 나오는데 왜 여태 몰랐을까.

    그리고 그를 검색하면서 그가 말해줬던 로레인이라는 여자도 함께 알게 됐다. 따로 검색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를 검색하니까 당연하게도 따라붙는 이름이 그 여자였다. 함께 찍힌 수많은 사진은 부러 보진 않았다.

    “되게 예쁘네…….”

    코를 훌쩍이면서 금발의 푸른 눈의 여자를 보다가 휴대폰을 뒤집어 바닥에 탁 놓았다. 벽에 기대 있던 이라는 고개를 들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원룸을 바라봤다.

    그를 검색하자 따라오는 단어는 무수히 많았지만, 가장 근접해 있는 건 바로 ‘갑부’였다. 벌써 그가 사는 집이 어느 지역에 얼마인지부터, 타는 차에, 차는 시계에. 정말로 그녀와는 동떨어졌다. 그의 집 화장실 크기조차 안 되는 이 방에서 사는 내가 무슨.

    “…….”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었다. 자존심 내세우기엔 그가 압도적이니까. 자꾸 생각나는 얼굴에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뚝뚝 눈물이 흐르자, 벌떡 일어나버렸다.

    “씻자. 씻어야지.”

    오늘은 은우를 보는 날이었다. 지강과 함께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이렇게 보는 게 정상적이었다.

    “그래, 내 아이 하나도 못 키우는 주제에……. 누구랑 연애한다고.”

    그리고 은우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게 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는 너무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 잘했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꼴이 엉망이었다.

    “잘했어, 한이라. 울지 마.”

    그를 거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타이를 수밖에. 잘했다고.

    ***

    애써 붉어진 눈을 숨기고 지강과 은우를 만났다. 함께 하는 내내 제이든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라는 은우를 생각해서라도 애써 웃었다.

    “엄마, 이거 은우가 사 올래!”

    “그래. 인사 잘하고 예의 있게 카드 드리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응!”

    자리에 앉은 이라는 방긋 웃으며 은우에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줬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딱히 위험한 건 보이지 않았다. 카드를 받은 은우가 카운터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라는 내내 지었던 웃음을 지웠다.

    “웬 지갑이야? 못 보던 건데.”

    그때 앞에 앉아 있던 지강이 슬그머니 물었다. 슬쩍 지갑에 향하는 시선이 불편해 이라는 도로 가방에 넣었다.

    “샤넬?”

    하지만 이미 본 건지 지강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네가 돈이 어딨다고……. 너 혹시.”

    “야, 정지강.”

    지강의 말을 차갑게 끊은 이라가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비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제이든이 떠올랐다. 그는 이라와 있으면서도 아이가 주위에서 멀어지면 끝까지 시선을 떼는 법이 없었다.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음에도.

    “너 아빠 맞니? 은우나 잘 챙겨. 나한테 신경 끄고.”

    지강의 입술이 황당하게 벌어졌다. 잠시 붕어처럼 뻐금거리던 그는 하, 하며 거친 숨을 내쉰 후 이라를 바라봤다.

    “오늘 온종일 네가 한 행동이나 돌아봐. 내가 뭘 물어도 대답이나 제대로 해 준 거 있냐? 손 어쩌다 다친 건지, 눈은 왜 그런지, 지갑은 뭔지, 요즘 뭐 하는지 물어도 죄다 무시했잖아.”

    “그러니까.”

    이라가 짜증스럽게 지강을 보다가 다시 힐끗 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자기가 사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를 보고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거 말해야 하느냐고. 오늘 은우 때문에 나온 거지,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이럴 거면 다음부터는 은우만 보내.”

    “한이라.”

    “네 엄마한테 뺨 맞은 건 걱정 안 되고, 고작 손 다친 것만 보이니?”

    “그건…….”

    지강이 움찔했다. 이라는 지겹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너무 운 탓에 눈도 붉게 부었다. 은우가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지강을 만나는 것조차도 괴롭고 지쳤다.

    “그냥 서로 부모 노릇이나 최선을 다하자고. 부부로서 말고 부모로서 노력하길 바라서 이혼한 거잖아. 안 그래?”

    “너 왜 이렇게 날이 섰어? 그때 내가 했던 말 잊었어?”

    “굳이 기억하고 있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말도 아니니까. 네 마음 따위 어떻든 안 중요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혼하자고 했는지 다시 떠올리면 속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결국, 자기감정 하나로 자기 아들 인생을 저당 잡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게 끔찍하게 역겨웠다.

    이라는 지강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지강이 어떤 표정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이제는 받아줄 기력도 없었다.

    어제 그렇게 울면서 어렴풋이 했던 생각도 있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돌아와 지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제이든을 거절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결국은 그 미래에 은우가 없다는 사실에 미련조차 갖지 않고 생각을 접어버렸지만.

    “엄마, 엄마!”

    어느새 미션을 마친 은우가 활짝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이 든 컵 하나를 들고 왔다. 착실히 카드까지 다시 건네준 아이는 이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내내 은우는 지강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방금처럼 웃는 것도 역시나 이라에게만 향할 뿐이었다. 그 사실 하나로도 마음이 아팠는데, 이게 익숙하다는 듯 아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지강의 태도에 화가 났다.

    “진짜 너랑은 진전이 없다.”

    지강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들고 가게를 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담배를 입에 무는 그가 보였다. 그런 그를 보던 은우는 슬쩍 눈치를 보듯 큰 눈을 굴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될지 고민하는 모습에 이라는 다정히 웃어줬다.

    “맛있겠네. 초코 맛이야? 녹기 전에 얼른 먹어.”

    “……응. 엄마두 먹어.”

    아이가 작은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이라의 입술로 먼저 뻗었다. 방긋 웃은 이라는 단 아이스크림 한 입을 먹고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맛있다. 이제 이거 은우 다 먹어. 먹고 또 먹고 싶으면 엄마가 또 사줄게.”

    “진짜?”

    “응, 진짜.”

    “우와!”

    금세 활짝 밝아진 얼굴을 보자 마음이 그나마 놓였다. 아빠가 무섭다는 말을 들은 날부터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 아니었다. 정말 복귀하든가, 안정적인 직장을 제대로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우에게 조금 더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루빨리 아이와 살고 싶었다.

    “은우야.”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 은우가 조금 더 큰 형이 됐을 때, 엄마랑 살 수 있으면 엄마랑 둘이 살래?”

    아이의 큰 눈이 이라를 향했다. 깜빡이지도 못하고 놀란 듯한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아빠도 자주 못 볼 거야.”

    “지금 엄마처럼?”

    “응. 지금 엄마를 자주 못 보는 것처럼.”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이는 시선을 내려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이 좋다면 은우의 의견을 존중할 거였다. 양이 적은 아이스크림을 반쯤 비웠을 때, 은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빠 안 봐도 돼?”

    “뭐……?”

    너무 작은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었다. 이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은우를 바라봤다. 은우는 컵을 작은 무릎 위로 내려두며 고개를 들어 이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의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보고 싶지만, 할머니는 안 보고 싶어. 자꾸 은우 휴대폰도 뺏고, 엄마 아프게 하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알았구나. 알고 있었구나.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폭력을 쓰는 미란을 알고 있던 거였다. 이라의 눈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크게 요동치자, 은우는 작은 손으로 이라의 옷깃을 꾹 움켜쥐었다.

    “엄마. 제이든 형아 보고 싶어. 제이든 형아 보여주세요.”

    마지막 말을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목이 꽉 멨다. 마음이 만 갈래로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