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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31화 (31/70)
  • 31화

    “당신이 좋아요.”

    시끄럽던 술집이 한순간 적막만이 떠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술에 취해 달뜬 얼굴, 탐스럽고 붉은 입술, 고양이처럼 앙칼졌던 눈이 풀려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까지. 제이든은 그런 이라의 모습을 보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

    제게 호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순진하지도, 경험이 적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듯, 능숙한 사람도 결국엔 자기감정이 앞서는 순간 모든 게 처음인 바보로 돌아간다.

    언제부턴가 다시 만난 뒤로 멈출 새 없이 직진하던 감정을 지독하게 깨닫고 나니, 정작 그녀가 보였던 호감은 뒤늦게 가슴에서 다이너마이트라도 터트린 듯 크게 다가왔다.

    쿵쿵 뛰는 그의 가슴이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무심하게도 이라의 두 눈에 힘이 풀렸다. 순간 앞으로 쏟아지는 여자의 머리에 그가 벌떡 일어나 손부터 뻗었다.

    “이런.”

    그의 큰 손바닥에 정확하게 안착한 이라는 이마를 댄 채 쿨쿨 잠에 빠졌다. 제이든은 황당한 눈으로 그런 이라를 내려다봤다. 지금 대뜸 고백해 버리고 나 몰라라 잠든 거야?

    “당신은 늘 날 황당하게 만들어.”

    그가 피식 헛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자칫하면 반쯤 먹은 알탕에 이라를 다이빙시킬 뻔했다. 서둘러 테이블을 돌아 작은 몸을 챙겼다.

    “대답은 듣고 자야지.”

    “……으응.”

    얼굴을 찡그린 이라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가 잡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아니라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을 게 뻔했다.

    지나가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계산을 마친 그는 여전히 울상으로 잠든 이라를 바라봤다. 뭐가 이렇게 속이 상했을까. 그저 다 지나간 이야기에 이렇게 함께 슬퍼해 주니까…….

    “내가 널 안 좋아하고 배기겠어?”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이라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

    “으응…….”

    한참을 뒤척이니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온몸이 무거웠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가 일한 것처럼 두들겨 맞은 듯 이곳저곳에서 묵직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그런 감각에 순간 과거로 돌아간 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착각에 눈을 떴다.

    “…….”

    깜빡깜빡. 반쯤 덜 떠진 눈으로 앞을 여러 번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모르는 곳이었다. 누가 봐도 호텔이었고.

    “아.”

    벌떡. 다급하게 일어나니까 어깨까지 올라와 있던 무거운 이불이 스르르 내려갔다. 동시에 이불 밖의 찬기와 함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제 몸을 본 이라의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는 순간 옆에 누워 있는 커다란 살구색의 탄탄한 가슴팍을 봐버렸다. 빚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피사체의 위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피사체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행이야. 오늘은 날 버리고 가지 않아서.”

    “……그냥 날 버리지 그랬어요.”

    곧장 마주친 녹색 눈동자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 눈을 보니까 술집에서부터 잠들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그냥 잊었으면 좋았을걸.

    “……으으.”

    이불부터 확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었다. 이미 이불 안으로 그의 탄탄한 상체가 보였지만 두 눈을 꽉 감아 현실을 부정했다. 젠장, 젠장!

    “후회하는 거라면 늦었어.”

    이불 밖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이라가 눈만 빼꼼 내밀었다.

    “후회할 거 알았으면 그냥 버리지 그랬어요, 날.”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미안하지만 불가능해.”

    “왜, 왜에…….”

    술집에서 취한 이라를 데리고 나온 그가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걷는 모습. 그런 그에게 어느 정도 정신이 깨서 헤실헤실 웃는 제 모습. 잡은 택시 위에 거하게 쏟아내는 걸 급하게 제 몸으로 막는 그의 모습……. 더 기억해야 하나? 죽는 게 나을지도.

    다음은 당연했다. 둘 다 취했고, 그는 다급히 근처 호텔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남녀가 씻어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질 일은 뻔했다.

    십 년 전과는 달랐다. 이라도 그도 경험이 달랐으니까. 그라면 몰라도 이라는 확실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입을 맞추던 게 또렷했으니까. 십 년 전처럼 어설픈 짓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상황이 되도록 내버려 둔 그를 탓해야 할지.

    “왜냐니.”

    손을 뻗은 제이든이 이불을 확 걷어냈다. 아슬아슬하게 쇄골까지 내려간 이불을 이라가 다급하게 잡았다. 그는 그런 이라의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이불 속에서 벗은 나신을 붙였다.

    “설마 이 나이 먹고 날 침대에 눕히는 한이라를 말려야 했다는 건 아니겠지.”

    “취했잖아요! 당신도 나도!”

    “당신이랑 자고 싶었던 건 맞아. 루저처럼 좋아하는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봐서 끙끙거릴 나이는 지났거든.”

    “……아, 아까부터.”

    대놓고 좋아한다고……. 잘못 들었겠거니 무시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렇게 몇 번이고 확인시켜 버리니까. 성격 진짜.

    “문제 있어? 나랑 자면 안 될 이유라도 있던가.”

    “있죠!”

    “왜, 불륜도 아닌걸.”

    만일 이라가 이혼을 안 했더라도 어제의 유혹엔 응했겠지만. 제이든은 불쑥 드는 불순한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하아. 나랑 이래서 어쩌려고요…….”

    이제는 포기한 듯 한숨과 함께 이라가 그를 바라봤다. 아침부터 눈부시게 잘생긴 건 알겠는데,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니까 가슴이 답답했다.

    좋아하는 것도 맞고, 고백도 했고, 어제 유혹도 했다. 전부 다 인정하지만, 그랬지만.

    “알잖아요. 나랑 당신이랑 무언가를 시작할 순 없어요.”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다. 이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찌푸려진 그의 녹색 눈동자를 보면서도 그런 마음이 지워지진 않았다.

    십 년 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다. 십 년 전에 그가 일반인이 아닌 걸 알았으면 생각마저도 접었겠지만, 지금은 모든 걸 알고 그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 부류인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옛날과 다르게 이라에겐 책임져야 할 목숨과도 못 바꿀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그리고 첫사랑과 짝사랑을 이렇게 한순간 끝나버릴 하룻밤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도, 너무 잔인하니까. 그게 짝사랑이 아닐지라도.

    “당신이 말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그저 십 년 전처럼 아무 의미 없이 하룻밤을 보낸 거라는 뜻이에요.”

    이불을 걷고 나온 이라는 눈으로 재빠르게 옷을 찾았다. 찾았다는 게 민망할 만큼 바로 옆 테이블에 차곡차곡 개켜 있었지만. 아마도 그의 솜씨이리라.

    이라가 속옷부터 외투까지 빠르게 입는 동안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우선 먼저 일어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늦잠을 잤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빠르게 옷을 입고 도망쳤겠지, 십 년 전처럼.

    “난 아니야.”

    그의 말에 이라가 멈칫, 뒤를 돌았다. 제이든은 여전히 침대에 길게 누운 채 이라와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랑 했던 모든 것 중에 의미 없었던 거 없어.”

    “갑자기 왜 이렇게…… 저돌적이에요?”

    “몰랐다고 하지 마. 내가 당신한테 호감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완전 나신이었던 이라와는 다르게 바지는 입고 있던 건지, 윗옷을 들어 목에 꿰며 입었다. 하나의 동작으로 옷을 다 입은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신이 나한테 호감 가진 것도 알고 있었어.”

    “그건……!”

    “인제 와서 내가 유명인이니 뭐니 그런 이유로 날 거절한다는 건 아니겠지.”

    성큼. 그가 다가왔다. 넓은 보폭 때문인지 순식간에 그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리 달콤하고 열정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남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제이든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라를 내려다봤다. 솔직히 이라 성격에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그가 좋다고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재고 따져 봐. 당신이 만난 남자들 사이로 순위라도 매겨 봐. 그렇게라도 납득을 시키란 말이야.”

    “그런 막무가내가 어딨어요……!”

    재고 따지라니. 순위는 또 뭔데. 이라의 입이 황당하게 벌어졌다. 저 남자는 알고 있을까. 이라 인생에 남자라고는 딱 둘이었다는 거. 압도적인 스펙의 첫사랑과 인생을 시궁창으로 말아 넣은 전남편이 전부라고.

    이라의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남자가 없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다. 학창 시절엔 고달팠고, 성인이 돼선 시궁창이었다. 지강처럼 다가오는 남자들은 꽤 있던 건 맞지만, 그게 그녀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라는 당황한 채 어버버 거리다가 그를 또렷하게 바라봤다. 솔직히 자신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 안 됐다. 외모만 봐도 그에게 장기까지 팔아넘길 여자가 수두룩해 보이는데, 굳이 이런 나를? 왜?

    그러니까 그는 지금 그냥, 나는 지금 그냥, 연민. 또는 좋았던 옛 시절에 흔들리는 것뿐이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발버둥 치는 거뿐이다. 아주 잠깐 마주했던 달콤함은 쓰디쓴 현실로 녹아 없어질 차례다.

    “우리는 그냥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아주 잠깐 다시 만난 거라고. 맞아요. 우린 각자의 삶이 있는 거예요.”

    차분한 이라의 말에 제이든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짧은 침묵 후에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 말을 한 날 후회하게 하지 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알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말이었어.”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 이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괴롭다, 너무.

    “미안해요. 나의 삶엔 당신이 없어요.”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픈 말이네.”

    툭 튀어나온 그의 마른 미소에 이라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아픈 말을 했던 사람이 끝까지 나이길 바랄게요.”

    “…….”

    “그러니까 이젠 다신 상처 받지 마요.”

    상처가 가득한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상처는 지금 당신이 가장 크게 주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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