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이를…… 잃었다고? 이라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결혼 안 했다고…….”
“안 한 건 사실이야. 한 적도 없고.”
잊고 지낸 적 없어 그런가, 떠올린다 해도 그리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아이를 잃은 후, 로레인과는 완전히 연을 끊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수연과 로버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호흡과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다. 이따금 오는 공황에 수년간 정신과 진료도 필요했다. 동시에 방송 활동을 포함한 연기, 연예 활동은 잠정 은퇴 상태였다. 뜨거울 정도로 미국을 휘어잡던 그가 돌연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모든 이가 그를 궁금해했다.
그렇게 5년을 넘게 그는 ‘작가’로서만 살았다. 그 후 여자라곤 쳐다도 안 봤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했다. 로레인과의 어떤 것도 전부 끊어냈다. 그런데도 로레인은 아직도 그를 찾았다. 무슨 염치인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가지고 있던 초음파 사진도 며칠 전 수연이 가져갔고. 끊었던 담배는 아이를 잃고 난 후 지독하게 피웠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간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잠시 보글보글 끓는 알탕을 보던 제이든은 고민했다. 이라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작가라는 것도, 배우였다는 것도. 숨기려 한 적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끝까지 모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몰랐던 십 년 속에 내가 이렇게 망가졌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었다. 결국, 로레인에게서 5년간 이라를 찾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가 길어.”
나직한 그의 말에 이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포근한 시선에 그는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땐 이렇게 당신과 다시 마주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실없이 웃는 그의 미소가 텅 비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알려면, 내 직업부터 알아야겠지.”
***
술잔을 들었던 이라의 손에 천천히 힘이 풀렸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십 년간의 일을, 아니 자신의 일생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문득 짓던 씁쓸한 표정, 이상하게도 차갑고 날카로웠던 모습. 듣는 내내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디서도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더 충격적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둘 사이엔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넘실대는 술잔만 바라보던 이라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봤다.
“많이 충격인가.”
그가 낮게 웃었다. 이라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괜찮냐고 묻고 싶은데,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
“맞아. 괜찮지 않아.”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쓴 술을 넘겼다. 물처럼 넘어가는 목 넘김에 잠시 그 느낌을 음미하던 그가 말했다.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그가 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아.”
이라의 눈이 커졌다. 5년이나 흘렀다고 들었는데.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요. 적어도 내가 듣기엔, 당신은 늘 당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잖아요. 세상에는 최소한의 제 일마저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요.”
후자의 말에 둘은 다른 둘을 떠올렸다. 이라는 지강을, 제이든은 로레인을. 그들에게 있어 지워낼 수 없으나, 지워내고 싶은 사람들.
어느새 빈 술병이 늘어났다.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 들으며 홀짝홀짝 마셨던 술은 이라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대요? 자기 아이를…… 어떻게.”
분노에 찬 이라를 담담히 보던 제이든은 일이 벌어진 후 어느 날의 로레인이 떠올랐다. 몇 날 며칠 술에 빠져 살았다. 두 번째 아이마저 그리 잃고,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로레인이 찾아왔다.
‘사랑받고 싶어서 그랬어.’
파란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오른 로레인은 울며 매달렸다.
‘내 행복이 먼저잖아!’
술에 취해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의 앞에서 그렇게 외쳤다.
‘아이를 가지면 제이디가 날 사랑해 주니까. 나만 바라보니까. 날 위해주니까!’
풀린 동공으로 로레인을 보던 그가 결국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고, 그녀는 쓰러져 엉엉 울었다.
‘그렇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게 너무 무서웠어. 제이디, 배도 나오고 살도 찌고 점점 힘들어지는 내 모습에 내가 행복하지 않았어.’
‘…….’
‘항상 네 옆에 있을 때마다 불안했어. 날 사랑하지 않는 게 보여서. 아이가 태어난 순간 넌 돌아설 것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아이를 죽였어?’
다 식은 그의 눈동자가 로레인을 향했고, 그녀는 그대로 굳었다. 그는 자조적인 텅 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바람을 피웠어?’
‘자기야…….’
‘로렌. 난 네 손 놓지 않았어. 놓은 적 없었어.’
이제 충격은 덜했지만, 그래도 떠올리니 끔찍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알게 됐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가 자기 입으로 털어놓는 건 이라가 처음이었다.
제이든은 물끄러미 이라를 바라봤다. 로레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가 혹여 상처라도 받을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그는 그리운 것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원망했고 미워했고 증오도 해 봤고 혐오도 해 봤어.”
그러나 끝내 그 모든 감정은 돌고 돌아 다시 제게 돌아왔다.
“결국은 연민이었어.”
그를 보는 이라의 두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끔찍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결국은 로렌도 같은 처지였어. 아이를 잃었잖아. 그 모든 일을 자기 몸으로 감당했고. 그저 사랑이 고팠던 거지. 난 줄 수 없는 사랑을.”
“아니에요.”
이라는 단호했다. 멈칫하며 고개를 드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화가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비슷한 또래에 임신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처럼 좋은 남자를 두고서도 그런 선택을 한 이기적인 여자 때문인가.
“그냥 자기만 아는 사람인 거잖아요. 아이의 안위도 당신의 안위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여자잖아요. 사랑은 짧아요.”
그걸 너무 빨리 깨달았다.
“자기감정 하나로 그렇게……!”
‘나 좀 봐 달라는 거였어. 내 사랑에 한 번을 대답하지 않은 네가 미워서, 후회하라고.’
지강의 말이 생각났다. 이라는 아랫입술을 터질 듯 꾹 깨물었다. 왜일까. 나보다 백배 천배 아니, 만 배는 더 잘 살 것만 같던 남자가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으니까 더 화가 났다. 당신이랑 내 사랑은 왜 고작 이 정도뿐이었을까.
새로 시킨 소주를 딴 이라는 빈 잔에 채워 벌컥 들이켰다. 꾹 참았던 감정은 자꾸만 요동쳤다. 탱탱 튕기는 공처럼 순식간에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울먹이는 이라의 말에 그의 입술이 놀란 듯 벌어졌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신 울어?”
“안 울어요.”
잽싸게 대답한 이라는 다시 잔을 채워 거칠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쓴 소주는 여전히 더럽게 맛이 없었다.
“우는 것 같은데.”
“억울해요.”
취기가 오른 이라는 두 눈에 힘을 줘 그를 바라봤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그의 녹색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났다.
말을 끝내면 우울하거나 자괴감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말을 들어주던 그녀의 반응에 그런 감정은커녕, 왠지 모를 포근함과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잠겼다.
“너무 억울해.”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당신 배우라면서요. 아직 안 믿기지만, 연예인이라며. 그 여자도 마찬가지라며. 그럼 화려하고 빛나게 살아야지. 원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잖아.”
투덜거리는 건지, 우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하소연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라의 술주정에 그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가볍게 턱을 괬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라는 씩씩거리며 이번엔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씨……. 어쩐지 더럽게 잘생겼다고 생각했어. 나는 돈 많은 백수인 줄 알았잖아. 지금도 이렇게 일 안 하고 한국에 오래 있고.”
“푸흡.”
아, 이 타이밍에 이래도 되나. 나 꽤 심각한 얘기해준 것 같은데. 웃음을 터트린 제이든은 눈을 가늘게 떠 이라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혼자 술을 과하게 들이켠다고 생각은 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고작 와인 몇 잔에 인사불성 되는 여자였다는 걸.
“십 년이 지나도 주량은 늘지를 않나 보네.”
“당신은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인데 왜 그런 여자를 만나서…….”
정말로 속상한 듯 이라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미 앞에 있는 그의 말은 가뿐히 무시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당신이 날 버리고 가지 않았어야지.”
“내 탓이냐구…….”
“그건 아니지만.”
술병으로 다시 뻗는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그 손을 그가 테이블 위로 잡았다. 이라의 눈이 손에서 그에게로 향했다.
“로렌한테서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찾았거든. 어쩌면, 하는 희망에.”
취기가 오른 눈으로 멀뚱히 잡힌 손을 바라보던 이라는 금세 울상이 됐다. 유독 오늘따라 표정이 풍부해져 그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언제 이렇게 취해버린 건지.
“내일 내 얘기 다 기억하려는지 모르겠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멀뚱하게 보는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툭 튀어나온 탐스러운 입술에 시선이 가던 찰나, 그 입술이 툭 하니 말을 뱉어냈다.
“당신이 좋아요.”